도시에 속해 있으나 풍경은 정겨운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산마을. 버스도 하루 네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이 마을 주민은 대부분 70~80대 할머니다. 대부분 농사를 지으시는 어르신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을 경로당에 모여 하루를 보내곤 한다.
마을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다
박산마을에서는 지난 두 달간 광주광역시 창조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창고를 생활사 전시관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일반적인 생활사 전시관은 오래된 농기구나 옷가지, 서적 등 유물을 중심으로 하기 마련인데, 박산마을 전시관은 조금 달랐다. 오래된 유물이 주인공인 전시관이 아니라 이 마을을 터전으로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전시관인 것이다. 전시관의 이름은 ‘박산마을 예술창고’. 이곳에선 생생하게 숨 쉬는 마을 주민의 이야기가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마을 주민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같이 울고 웃는 경험이 생겨나는 것.
전시장 가운데 위치한 재봉틀과 커다란 벽면의 전시물은 ‘얼기설기 이야기 조각보’라는 제목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알록달록한 조각보 모양의 이 전시물은 한 조각 두 조각 마을 주민의 이야기가 아로새겨져 있다. 전시물을 보고 있노라면 어르신이 직접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띄우지 못한 편지’라는 조각 이야기는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할머니의 서툰 글씨로 만들어진 것. 자식에게 보낼 택배를 부치기 위해 하루 종일 집배원을 기다리는 또 다른 할머니의 모습도 잔잔한 미소로 전해진다. 옛날 으뜸가는 혼수였던 재봉틀에 얽힌 여러 할머니의 이야기 또한 정겹고 따스하다.
먼저 ‘정’으로
하나가 되다
“좋지~ 신기하지. 우리 이야기가 이렇게 ‘작품’이 된다니까 얼마나 좋아. 기자님들도 와서 보고. 아주 좋아.” 마을 주민의 이야기에 다른 주민이 웃으며 대꾸한다. “좋기는 한데 좀 쑥스럽지. 뭐 별난 이야기라고.” 하지만 어르신들의 얼굴엔 우리 이야기도 ‘예술’이 된다는 자부심과 기쁨이 배어 있다.
“어르신들 이야기를 ‘전시’한다는 시도 자체가 쉽지 않았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할머니들과 친해져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바쁜 추수철에는 같이 깨도 털고 콩도 줍고… 농사일을 거들면서 조금씩 어르신들과 마음의 벽을 허물었지요.” 박산마을 예술창고 작업을 진행한 ‘양념쳐 스튜디오’ 박연숙 작가(대표)는 시작이 쉽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올해 설립한 양념쳐 스튜디오는 지역 예술가, 건축가, 기획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이 모여 지역 예술활동을 펼치는 비영리 단체. 평범한 마을 이야기가 곧 예술이라는 이들의 생각에 지역 주민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점심 시간엔 경로당에 모여 어르신들과 함께 밥상을 나눴어요. 매주 금요일엔 저희가 직접 어르신께 식사를 차렸고요. 주민들께서 많이 기특해 하시더라고요. 요즘 젊은 사람은 촌을 떠나려고만 하는데 저희는 그렇지 않다면서요. 메주를 쑤고 김장을 담그는 날엔 서툰 솜씨지만 힘을 보탰습니다.” 박연숙 작가와 동료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할머니들 시집 온 이야기, 재봉틀로 옷 지어가며 바느질해 자식 키운 이야기, 손수 마을 일군 이야기가 하나 둘씩 풀려 나왔다. 그 소중한 이야기는 박산마을 예술창고 전시관의 작품으로 남았다.
한편, 전시관에서 관람객의 눈을 끄는 작품으로는 주민들이 기증한 오래된 생활용품 35점을 천정에 설치한 것도 있다. 줄을 당기면 용품이 움직이며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어르신이 직접 리포터가 되어 다른 어르신을 촬영한 ‘주민 영상편지’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들이 자리잡은 마을 창고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주민들이 직접 블록을 쌓아 만든 뜻 깊은 건물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황룡강에서 직접 이고 지고 나른 모래로 블록을 다져서 만든 이곳에 주민들의 이야기가 작품이 되어 자리잡으니 그 뜻이 더욱 깊다. 창고와 나란히 자리잡은 건물은 마을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번 예술창고 사업을 진행하며 두 건물 사이의 벽을 허물고 마루를 설치했다. 마루는 경로당에서 바로 전시장(창고)로 건너올 수 있는 통로가 되고, 동시에 관람객과 주민이 함께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거듭났다. 마을 주민의 폐쇄적이고 고요한 일상이 예술로, 그리고 활기찬 소통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지속가능한
지역 예술을 꿈꾸다
박연숙 작가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 공간을 활용하여 마을 주민과 지속적인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와 어떤 사업을 진행한 후, 일이 끝나면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어요. 저희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박산마을 예술창고는 앞으로도 계속 운영할 것입니다. 이제 저희는 여기 계신 어르신들께 손자, 손녀처럼 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오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마을에 자주 와서 할머니들께 삶의 지혜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하나씩 재미난 예술 잔치를 해 보려고 합니다. 시작은 ‘관’이 주도하는 사업에서 비롯되었지만 앞으로 운영은 주민이 주인공 되는 박산마을 예술창고로 꾸려 나갈 계획입니다.” 박연숙 작가의 이야기다.
얼핏 보기에 어울리기 힘들 것 같던 20~30대 젊은 예술인과 70~80대 어르신의 만남. 할머니들의 골 깊은 사투리가 젊은이에겐 낯설었고, 젊은 친구들의 행동이 어르신에겐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들에게서 세대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해와 공감’이라는 따스한 정이 묻어났다. 박산마을 예술창고에서 만난 작품들,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생활용품과 전시품은 바로 이들의 교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말로만 외치는 문화와 예술이 아니라 직접 마을을 찾고, 문화 소외지대에서 활동하며 진심을 다해 움직이는 젊은 예술인이 있어 든든하다. 앞으로 박산마을 예술창고의 활동에 기대를 걸어 본다.
글.사진_ 정선희 광주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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