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농사를 배우다 ① 쌈지농부·논밭예술학교 탐방 기사보기

 

몇 주 전 경기도 고양시의 한 주말농장 장터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아파트와 빌딩 사이에서 언제,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와 집결할 수 있었을까? 주로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비닐하우스 안에 모여 직접 씨 뿌리고 키워낸 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었다. 작물들은 자연농법에 준해 생산되어 울퉁불퉁 모양도 제각각이다. 따로 챙겨둔 작물들은 식사 뒤 마련된 임시 장터에서 무게나 상품적 가치가 아닌 도시농(農)의 상식과 마음에 의거한 가격을 붙여 거래되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이 모든 장면들은 비밀스럽고도 흥분으로 가득한 집단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어떤 매혹적인 생의 에너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평일 한 낮, 도심 속 옥상텃밭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다. 매료 뒤에 남겨진 생각들을 추려보자. 그간 미술공간 안에서 4~5년 일해 오다가 이제 막 한 사회적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농업, 농사, 도시농업이라는 화두를 마주하게 된 나로서는, 왜 농사와 미술이 만나서 서로 사귀어야 하는지 스스로의 선택에 계속해서 되묻고 있는 형편이다. 연결해야 한다는 미션의 근거를 어디서 찾고, 작동법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 것 인가. 그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한다는 생각으로 몇 가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본다.

 

약초, 실제적 치유와 능동적 개입

 

‘홍수: 적극적인 공공의료 활동 참여를 위한 자발적 네트워크(Flood: A volunteer network for active participation in healthcare)’는 시카고 퍼블릭 아트 프로그램 ‘행동하는 문화(Culture in Action, 1993)’ 참가작 중 하나로, HIV 보균자와 AIDS 환자들과 함께 이상적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프로젝트이다.

 

‘홍수’ 프로젝트에는 시카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협업공동체 ‘하하(Haha)’가 발의하고 그 밖에 서른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이 함께 하였다. 참가자들은 시카고 로저(Roger) 공원 근처 빌딩 실내에 수경재배장을 마련하고 고영양, 저박테리아 농법으로 채소와 약용작물들을 재배했다. 잘 자란 약초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는 때때로 AIDS, 대안 의학, 허브 치료 등에 관한 비공식 토론이 이뤄지기도 했다. 재배된 약초들은 AIDS 환자들의 집단 주거지인 시카고 하우스에 보급됐다.

 

프로젝트 이후에 정말 AIDS를 완치시키는 효능이 입증되거나 약초성분을 이용한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뒤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약초정원은 소위 건강하고 일반적인 도시인들이 불온하다고 외면하거나 접촉하길 거부해온 AIDS 환자들을 이웃으로 인식하게 하는 매개 역할을 했다. 좋은 먹거리는 미술공간을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생태적인 삶을 위한 행동 및 교육을 실천하는 공공의 현장으로 변모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의 생태적 삶을 구성하는 원리는 나와 타자의 생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긍정되고 나누어지는 동반자적 우정의 관계이다.

 

 

자유를 담지한 과일, 작고 사소한 저항의 연결

도시텃밭의 목적은 토지와 작물 사유화나 이윤창출이 아니라 도시생활인들이 소비사회 패턴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자급자족을 성취하는 것에 있다. 그들은 과밀화된 도시로부터 자립적으로 삶의 공간을 가꿈으로써 황폐화된 풍경뿐 아니라 자신들의 심리적, 신체적 풍경까지도 변화시킨다. 이러한 움직임은 도시라는 삶의 구조 안에서 자유롭고 자생적인 사유공간의 모색을 가능케 한다.

 

‘자유 과일(Free Fruit)’은 이런 아이디어를 담고 이동하는 과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유 과일’은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큐레이터들이 2000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로, 전국적인 토지파괴현상, 상업적 대농장의 확대, 주택개발 붐으로 인해 사라지는 소규모 과수원들과 초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행동을 벌였다. 지역에서 생산된 작물 중 오렌지를 골라 각 오렌지 위에 ‘공짜 과일(Free Fruit/Fruta Gratis)’ 이라고 도장을 찍고, 과일을 담아갈 수 있는 종이봉투에 과거방식의 농업이 가진 풍요로움에 관한 내용이 담긴 인쇄물을 동봉하여 배포했다.

 

이 공짜 과일들은 1시간도 채 못돼 동이 났다고 한다. 프로젝트 실행자들은 전 과정을 사진과 텍스트로 기록한 후, 이것을 기존 미술계에서 유통시키는 대신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이들은 프로젝트 기록물을 지방자치단체 행정가들과 관심을 가졌던 행동가들, 그리고 전화번호부에서 임의로 선택된 지역거주자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일종의 작고 사소한 사건에 대한 ‘시민 증인들(Citizen Witnesses)’을 만들고 연결하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제도와 파괴된 환경 속에서도 순환을 모색하고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보여주지 않을까? ‘자유 과일’의 편지를 받고 삶에 대한 감성, 인식이 변화됨을 느끼는 순간, 전면적 압박을 가해오는 사회에서 미력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들은 서로의 지적인 사유를 연대하고 미래의 행동을 위해 협동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처럼 미술제도, 사회생산시스템을 재구성하는 실험이 도시농업과 미술이, 생태적 가치와 문화예술이 서로 직면한 과제 아니었던가?

 

 

불법점거 예술가 농장

 

포괄적 의미의 도시농업 방법론에 속할 수 있는 게릴라 가드닝, 아방-가드닝(Avant-Gardening)은 스쾃(Squat)으로 대변되는 도시주거권과 관련된 문화운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 중 아방-가드닝은 국내에서 ‘뜰-운동’으로 번역되곤 한다). 게릴라 가드닝은 1973년 뉴욕 바워리 가의 사유재 공터를 가든으로 바꾼 리즈 크리스티(Liz Christy)의 그린 게릴라를 시작으로 본다. 바워리 지역은 이민자들의 낙후된 거주지 및 상업지구, 여관 등 도시환경에서 유해 내지는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어온 공간이기도 했다. 이후 유럽 등지로 퍼져나간 게릴라 가든의 가드너들은 불법으로 점유한 가로수 주변에 약초를 재배하기도 하고, 상습적 쓰레기 투척지역을 꽃밭으로 가꾸기도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방-가드닝의 핵심은 도시에서의 삶 투쟁, 직면한 문제에 포기하지 않고 행위를 벌여 나가는 것에 있다. ‘아방 가드닝: 도시와 세계 안에서의 생태적 투쟁(Avant Gardening: Ecological Struggle in the City and the World)’은 생태적 삶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고군분투들을 문화,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다룬다. 이 책에서는 뉴욕시가 도시개발을 위해 사들인 11,000개의 공터들, 빌딩들이 도시정원으로 전유되었다가 사라지는 과정이 상세히 보고된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뉴욕시만이 아니라 개발에 직면한 모든 도시들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지방 소도시에서도 시 정부가 사들인 집들이 오랫동안 주차장이 되거나 방치되곤 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행정편의 혹은 개발논리로 인해 방치된 이 공공의 장소들을 어떻게 커뮤니티 안으로 다시 들여올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아방-가드닝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도시문화 운동가인 고소 이와사부로는 아방-가드닝을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인 대지와 스쾃을 이어줌으로써 사는 것과 생산하는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행동하는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개발의 압박에도 정복되지 않는 주변부의 문화적 행동은 유토피아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해 준다.

 

1974년부터 6년 동안 지속되어온 ‘사거리 커뮤니티 – 농장(Crossroads Community – The Farm)’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아래 공터를 도시텃밭으로 변화시켰던 프로젝트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고속도로 교차로 아래에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들을 기르고, 각기 다른 배경의 이주민과 선(先)주민이 만나는 장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한 미술과 무용강습, 지역주민을 위한 판화 워크숍, 지역극단과 뮤지션을 후원하는 퍼포먼스 공간, 정신병원환자들과 노인들을 위한 활동들을 제공했다. 이 외에도 태양광 에너지 실험, 오가닉 채소밭, 어린이 동물농장을 실험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창안자인 보니 셔크(Bonnie Sherk)는 1977년 발표한 성명서에서 예술과 그 사유감각에 대한 믿음은 사회변화를 가능케 하는 동력이라고 언급한다.

 

‘농장’이 실천했던 지역문화생활공간, 생태적 배움의 장, 즉 대안적 삶을 위한 공간 창출이라는 미션은 현재에도 여러 프로젝트들에서 공유되고 있다. 작가와 큐레이터가 모여 커뮤니티의 환경, 소통, 지속가능성 등의 이슈를 창의적 방법으로 촉발하는 예술활동을 벌이는 ‘아방 가드닝(Avant Gardening)’ 프로젝트, 농작물을 교환하고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괴리된 환경을 연결하는 소셜 아트 프로젝트 ‘텃밭 생활(Field Faring)’을 비롯한 이른바 ‘생태적 문화예술 공동체 만들기’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동반자를 위한 초대

 

2002년 캄보디아에서는 ‘수퍼플렉스(Superflex)’라는 이름의 덴마크 출신 미술작가 그룹이 슈퍼가스라는 신물질을 이용한 바이오가스램프를 개발했다. 주황색 볼에 담긴 신개념 수퍼가스의 정체는 사람과 동물의 분뇨를 이용한 메탄가스였다. 또한 이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동식 사우나인 수퍼사우나를 만들기도 했다. 야외에서 불, 돌, 텐트, 구덩이를 팔 삽만 하나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사우나이다.

 

이 미술작가들에게 이런 도구 만들기는 재현이 아닌 ‘초대’ 라는 맥락에서 기능한다. 이들은 단지 미학에 국한된 실험을 하기 보다는 직접적인 사회활동의 도구를 만들고, 이것을 이용한 비즈니스 모델의 작동 가능성을 타진하며, 역으로 이 도구의 사용이 어떻게 미학적, 담론적 맥락으로 전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도구들은 초라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삶의 속도를 줄일 수 있는 전복적 가능성을 잠복시켜 놓고 있다.

 

우리 옆에도 이미 가능성이 숨을 쉬고 있다. 여기에 비판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사회변화를 꾀해 온 미술영역과 인력들이 있어왔다. 그 가운데에는 생태주의미술, 자연주의미술, 바깥미술 등 도시농업이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을 가진 활동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자연을 표피적으로 등장시키지 않아도 황폐해진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노는 땅에서 무력해지기를 거부하는 여러 미술작업들도 있어왔다.

 

이 글에서는 다소 먼 거리에 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봤지만, 지금 직면한 현실에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혀 관심을 가지기 위한 잠깐의 외유로 이해될 수 있길 바란다. 미술이 도시농업과 만났든, 문화예술이 어떤 비판적 생태주의를 택하든, 우리가 앞에서 언급된 가능성을 공유한다면, 그 우정은 속도에 가려져 사라지고 있는 오래된 미래를 붙잡아내는 동력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글_ 김진주 (미술작가, 독립 큐레이터, (사)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 사회적 기업)
사진 및 참고 홈페이지_

소셜 아트 프로젝트 ‘텃밭 생활’ 홈페이지http://www.fieldfaring.org

‘아방 가드닝’ 프로젝트 홈페이지http://www.avantgardening.org

예술가 협업공동체 ‘하하’ 홈페이지www.hahahaha.org

리빙 라이브러리 홈페이지http://www.alivinglibrary.org

하이브리드필드 홈페이지http://hybridfields.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