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부터 미국의 예술가 프랭크 워렌은 사람들에게 엽서를 한 장씩 나눠주고 ‘인생 최고의 비밀’을 적어 익명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지하철역, 미술관,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 뿌려놓은 엽서들은 예상외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현재까지 15만 통이 넘는 엽서가 모였다. 그 중 가장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과 창의적인 표현 방식으로 적힌 엽서를 모아놓은 책 〈비밀 엽서〉가 이 날 변정원 강사의 창작극 수업의 주 소재였다. 뮤지컬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수업 중 한 과정인 이 창작극 수업을 토대로 아이들은 연말에 공연할 창작 뮤지컬의 대본을 만들게 된다.
처음 하는 수업도 아닌데 아이들은 쭈뼛쭈뼛 어색해하며 친한 친구들끼리 뭉쳐 앉아있었다. 동아리 수업이다 보니 학급은 물론 학년도 다른 아이들이 모여있는데다, 아직 학기 초인지라 서로 충분히 친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얘들아, 이제 몸 좀 풀어볼까?”라는 변정원 강사의 말에 아이들은 익숙하게 책상을 앞으로 밀고 넓은 공간을 만든 후, 원을 그리고 섰다. 놀이를 활용한 몸풀기로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의 몸풀기 놀이는 ‘찰칵’이었다. 모두 두 명씩 짝을 지어 원을 그리고 선 후, 두 명이 앞으로 나왔다. 한 명이 술래가 되어 다른 한 명을 잡으러 다녔고, 도망 다니는 학생은 잡힐 것 같으면 얼른 ‘찰칵’을 외치며 다른 학생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놀이에 심취할수록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서로 끌어안고, 뛰어다니고, 꺅꺅 비명을 질러대며 마치 우리가 언제 어색했냐는 듯 활짝 웃었다.
놀이에 이어 온 몸을 쭉쭉 늘여주는 스트레칭을 한 후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변정원 강사는 책 <비밀엽서>에 나오는 몇 가지 인상적인 엽서와 다른 학교에서 무기명으로 받은 비밀엽서를 아이들에게 소개했다. “그는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2년 동안 감옥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 9년 더 있어야 한다.”, “나는 수영장에서 쉬하는걸 좋아해요.”, “내 앞의 미래로 가는 길은 많지만, 나에겐 꿈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전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어요. 지금 현재의 생각으로 그 사람을 증오하기보단 다른 사람한테도 안 그랬음 하는 걱정이 들어요.”
강렬하고도 슬픈 이 비밀엽서의 내용을 토대로 왜 글쓴이가 이런 비밀을 가지게 됐는지를 상상해 짧은 극으로 만들고, 그 비밀의 해결책까지 연극으로 제시해보는 것이 오늘의 수업 내용이었다. 18명의 아이들은 세 개의 팀을 나뉘었고, 각 팀은 자신들이 원하는 엽서를 한 장 선택했다. 연극을 짤 수 있는 시간은 20분. 아이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팀에서는 부모에게 무시당하는 중학생의 이야기를 만들며 자신이 집에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다른 한 팀에서는 지적 장애인 역을 맡은 학생의 연기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다른 팀에서는 주인공이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장면을 만들다 한 학생이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냈으며, 서로 공감했다. 변정원 강사는 “아이들이 서로 감정을 나누며 공감할 수 있도록 수업하려고 노력한다”며 “창의력만큼 소통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한 번의 창작극 수업을 더 마치면, 그 때부터는 아이들이 직접 뮤지컬 대본을 쓰는 수업이 진행되고, 그 대본을 토대로 연말에 한 편의 창작 뮤지컬을 공연하게 된다. 아이들은 1년의 수업 과정에서 나 혼자서는 이 작업을 마칠 수 없으며, 이 세상은 ‘모두와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연극을 만들 때 가상을 인물을 내세우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함께 표현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힐링하게 되죠.” 변정원 강사는 연극 수업이 내면의 상처를 보듬고, 타인과 함께 소통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뮤지컬 동아리에 가입한 이유는 다양하다. 중학교 2학년 예진이는 좋아하는 배우 주원이 뮤지컬 배우 출신이라 덩달아 뮤지컬을 해보고 싶어서, 주영이는 가수가 되고 싶어서, 그리고 지원이는 작년 학교 축제 때 선배들의 뮤지컬 공연을 보고 감동받아 뮤지컬 동아리에 들었다고 했다. 연극을 배우게 된 동기는 다르지만,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는 비슷하다. 짧은 시간에 한 편의 연극을 뚝딱 만들어내고, 여러 친구들 앞에서 연기하는 스스로의 능력에 놀라워하며 점점 자신감을 가진다. 아이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연극을 배우며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어요.” 오늘도 변정원 선생님의 창작극 수업에서 아이들의 자신감이 한 뼘 더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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