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나라가 세월호 참사의 그 어찌할 도리 없는 슬픔과 애통의 무게에 짓눌려 어린이날 조차 어린이날이 아니었던 지난 5일 서울 중구의 충무아트홀을 찾았다. 김혜자의 모노드라마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인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가 써서 이미 전 세계 39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소설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원작으로 한 모노드라마였다. 어느새 실제 나이 73세가 된 ‘국민엄마’ 김혜자가 6년 만에 무대에 올라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작품 속 10여 명의 등장인물을 모두 혼자 소화해내는 독특한 연극이었다. 극의 형식은 배우 김성녀가 일인 다중 역할로 열연하는 ‘벽 속의 요정’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극의 내용은 보다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미한 탓에 사뭇 달랐다.
# 극중 주인공 오스카는 백혈병에 걸려 오랫동안 병원 생활 중인 10살짜리 아이다. 그의 친구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베이컨’, 머리가 남들보다 두 배는 커다란 ‘아이슈타인’, 몸이 가로세로 모두 110cm인 비만 소년 ‘팝콘’ 등이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하루하루의 삶일 뿐인 아이다. 그런데 연극을 본 그 날 따라 감기가 걸린 배우 김혜자는 정말 병든 어린 환자 오스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연극을 보는 내내 실은 삶과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삶은 늘 죽음의 그늘을 껴안고 있고, 마찬가지로 죽음이란 삶의 종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말이다. 어쩌면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300여명의 어린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연극을 보는 내내 마음 속에서 교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시한부 삶을 사는 어린 오스카가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장미할머니’는 그 아이가 생의 마지막에 머무는 병원의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다. 아마도 자원봉사자 중 최고령자 할머니였을 것이다. 극중 나이가 이미 83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원봉사자로 일할 때 핑크빛이 감도는 장미색 가운을 입어 오스카가 그렇게 별명을 붙여준 장미할머니는 자신을 전직 프로레슬러라고 소개하는 괴짜할머니다. 물론 진짜 프로레슬러 출신은 아니었겠지만 워낙 거침없고 씩씩한 이미지이다보니 아마도 그렇게 별칭이 붙은 것인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오스카가 장미할머니를 특히 믿고 따른 까닭은 그녀에게 남다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장미할머니는 에둘러 말하거나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는 자신에게 그것을 숨기고 있는 다른 어른들-심지어 오스카의 부모마저도-이 거짓말쟁이로 비겁하게만 비춰졌던 것에 반해 오로지 장미할머니만이 거짓말하지 않는 어른으로 보여졌던 셈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날 장미할머니가 “하루가 10년”이라고 말하자 그 말 마저 진짜처럼 믿고 그 날 이후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마지막 12일을 120년처럼 보내게 된다. 장미할머니의 권유대로 하느님께 매일 한 통씩의 편지를 쓰면서…….
# 장미할머니는 오스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생각을 고백하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생각들, 그것들은 네게 들러붙고 너를 짓눌러 꼼짝 못하게 한 다음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 너를 썩게 만들지. 고백하지 않으면 너는 구닥다리 생각들로 가득 찬 악취 나는 쓰레기장이 될 거야.” 어린 오스카는 장미할머니의 말대로 더 정화시킬 것도 없어 보이는 자신을 애써 더 순수하게 정화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12일 동안 자기 속의 생각들을 꾸미지 않고 털어 놓는다. 어른들은 그것을 ‘고백’이라는 단어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겠지만 어린 오스카에게는 그저 담담한 삶의 낙서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오스카가 자기 생명의 물감으로 그려낸 담담한 삶의 낙서 앞에 오래 살아온 우리는 때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또 때론 “아, 그렇지” 하며 자기 속의 탄성을 자아내며 벌거벗게 된다. 한마디로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xannonce.ch
# 장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열흘째 되던 날, 다시 말해 죽기 이틀 전 오스카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오늘 난 백 살이 되었어요. 장미할머니처럼요. 계속 잠이 쏟아지지만 기분은 좋아요. 난 엄마랑 아빠에게 삶이란 참 희한한 선물이라고 얘기를 해줬어요. 사람들은 처음에 이 선물을 과대평가해요. 영원한 삶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지만 나중엔 과소평가해요. 지긋지긋하다느니 너무 짧다느니 하면서 내동댕이치려고 하죠. 그러다 결국 선물 받은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요. 삶은 선물이 아니에요. 잠시 빌린 것이죠. 그리고 빌린 것이니 잘 써야죠.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예요.” 죽음을 코앞에 둔 열 살짜리 아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이 짧은 편지글이 우리를 때린다. 삶이, 그리고 생이 처음 자신에게 주어졌을 때는 누구나 어떤 처지에서나 ‘고귀한 선물’이요 ‘더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 삶이 조금만 힘들어지거나 고단해지면 예외 없이 지긋지긋해하고 심지어 내동댕이치기 일쑤이지 않았던가. 결국엔 스스로의 삶을 학대하기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 “하느님께, 오늘 전 사춘기를 맞았어요. 이 사춘기란 게 그냥 조용히 지나가질 않네요. 난리 법석이었어요. 친구들과 싸우고, 엄마, 아빠랑 다투고 이 모든 게 다 여자들 때문이었어요. 저녁에 스무 살이 된 게 다행이에요. ‘휴, 이제 최악의 시기는 지났구나’하는 생각이 다 든다니까요. 사춘기! 한 번 겪지 두 번은 절대로 못 겪어요.” 오스카가 하느님께 보낸 세 번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열 살짜리 오스카는 사실 사춘기를 겪을 나이도 아니다. 하지만 같은 병원에서 청색증으로 투병 중인 페기에게서 이성의 느낌을 갖게 된 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빼놓지 않는다. “40~50대 아저씨들은 아직도 자신이 여자를 유혹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아요!” 그 말에 객석은 잠시나마 웃음바다가 된다. 늘 그렇지만 순진한 아이의 시선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무장해제 당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어린 오스카가 어른처럼 말했거나 어른을 흉내 내서 말했다면 감동은 적었을 것이다. 아니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어린 오스카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동심 그 자체였다. 오스카는 하느님께 편지를 쓰면서 “나를 살려주세요” 혹은 “나를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라고 말하거나 묻지 않았다. 오히려 오스카의 편지 속 끝 인사는 “근데, 하느님 도대체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였다. 그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순수함이 되려 우리를 울린다. 12일째 되던 날, 하루가 10년이라는 이상한 셈법에 따르면 오스카가 장미할머니보다도 훨씬 더 늙은 120세가 되던 날, 오스카는 홀로 조용히 그리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누구도 모르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뜬 오스카를 부여잡고 장미할머니는 이렇게 애통해하며 흐느꼈다. “그래, 너는 매일 처음 본 느낌대로 세상을 바라봤던 아이야. 이제 나도 너처럼 매일 처음 본 느낌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거야”하고.
#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삶과 죽음의 찰나같은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있음에 교만하지 말 것을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해준다. 하루를 10년처럼 살다간 오스카의 담담한 낙서같은 삶의 편지들은 우리의 허울과 허상을 깨뜨린다. 마침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월호의 참사 앞에 무너진 우리의 일상을 추스르고 주워담아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작지만 단단한 지렛대가 되어주는 것 아닐까 싶다. 한 편의 연극이 때로 우리 일상과 삶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우는 경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 원작 작가의 말처럼 “죽음을 눈앞에 둔 채 침묵과 맞서 싸워야 했던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삶에 대한 찬가”였던 셈이다.
# 어쩌면 지금도 어린 오스카와 장미할머니 사이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삶에는 해답이 없다는 건가요?”
“삶에는 여러 가지 해답이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정해진 해답은 없는 거야.”
“내 생각에는요, 장미할머니, 삶에는 사는 것 외에 다른 해답이 없는 것 같아요.”
글쓴이_정진홍
광주과학기술원(GIST) 다산특훈교수 • 한국문화기술연구소(KCTI)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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