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2025 우수 예술교육가 역량 강화 해외연수 참가기①

연극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특히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런던이라는 도시를 쉽게 지나칠 수 있을까? 필자는 지난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진행한 ‘2025 우수 예술교육가 발굴대회’ 수상 특전으로 주어진 ‘2025 우수 예술교육가 역량 강화 해외연수’를 통해 런던의 살아 있는 문화예술 현장을 경험할 귀한 기회를 얻었다. 해외 유수 예술·교육 기관을 방문하여 국내 예술교육 현장에 적용·도입할 수 있는 다양한 영감을 얻고자 기획된 이번 연수는 2025년 9월 21일부터 7일간 영국과 프랑스에서 진행되었다.
기대에 잔뜩 부푼 연수였지만, 마음 한켠 부담도 있었다. 9월은 마침 내가 교육 및 연출 책임을 맡고 있던 꿈의 극단 기획형 프로젝트 ‘리허설룸 프로젝트: 맥베스’가 막 시작된 시점이었고, 연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구성원에게 미안한 마음은 물론, 아이들과 <맥베스>라는 쉽지 않은 대작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하는 무거운 과제를 동시에 안고, 연극과 셰익스피어의 고장에서 반드시 의미 있는 영감을 얻어 돌아오리라는 다짐과 기대로 연수길에 올랐다.
  • 아티즈 재단 ‘창의적 교수법’ 워크숍
말없이도 통하는 것들
연수 첫날에는 아티즈(Artis) 재단이 진행하는 ‘창의적 교수법’ 워크숍에 참여했다. AI와 각종 기술을 결합한 예술교육 모델들이 쏟아지는 요즘, 그 속에서 오직 몸으로, 땀으로,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수업을 이어온 나의 방식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던 시기였는데, 낡은 교실의 마룻바닥 위에서 뒹굴고 춤추고 노래하는 아티즈의 워크숍은 그간 쌓인 외로움을 충분히 회복해 주고도 남는, 순수한 몸의 예술로 다시금 용기를 얻어가는 시간이었다.
둘째 날에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Shakespeare’s Globe)을 방문했다. 통역 없는 투어다 보니 가이드의 모든 설명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연극인으로서 말없이도 통하는 것들이 있어 오히려 많은 것이 이해되기도 하는 묘한 순간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공간에 들어와 땅을 밟고 나무 기둥 냄새를 맡으며 뚫린 천장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옛날 울고 웃으며 관객과 어우러졌을 얼큰한 연극 한마당의 기운, 그러니까 어떤 얼 같은 것이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졌다. 역사와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 지닌 힘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글로브 극장을 나와 예술·디자인·공예 분야를 아우르는 영국의 대표 국립 박물관인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어린이·청소년 분관을 방문했다. ‘어린이박물관(Young V&A)’으로 불리는 이곳은 ‘디스커버(Discover)’라는 큰 주제 아래 나이와 발달 단계에 따라 놀이(Play), 상상(Imagine) 디자인(Design)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공간은 아이들이 몸으로 놀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나만의 작업을 연습해 봄으로써 ‘창의적 자신감(Creative Confidence)’을 키우는 곳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힘주어 말하는 창의적 자신감은 단순히 창작을 잘하는 ‘능력’만이 아닌 스스로 질문하고 탐색하고 시도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삶의 ‘태도’에 가깝게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 글로브 극장 가이드 투어
  •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어린이박물관의 놀이 공간
버리지 않기 위한 설계
셋째 날이자 런던 일정의 마지막 날, 언젠가 꼭 방문해보고 싶었던 영국 내셔널시어터(The Royal National Theatre)를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서려는데 그보다 먼저 길목에 주차된 큰 트럭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띄었다. ‘Making theatre sustainable’(지속 가능한 연극 만들기). 여러 예술 가운데서도 연극이 유독 전 제작 과정에서 많은 탄소 발자국을 남긴다는 점을 떠올리며 세계적인 극장답게 기후와 환경을 위한 제작 방식에 앞장서고 있었다. 과연 이들이 어떤 제안과 대안을 제시할지 호기심을 안고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마주한 곳은 무대 뒤에 있는 거대한 제작 공간이었다. 세트, 의상, 소품, 작화 등의 공간으로 분리된 이곳은 내셔널시어터 내 세 개의 극장 백스테이지로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제작소와 극장 간 거리를 최소화해 이동으로 발생하는 탄소까지도 줄이고자 했다는 이들의 의도는 ‘지속 가능한’ 실천이 활발한 ‘재사용’ 내지 ‘재활용’ 정도일 것으로 추측했던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이들의 목표는 무려 ‘넷 제로(Net zero)’. 2030년까지 극장 운영 전반에서 탄소 순 배출을 0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제작 공간 한가운데에는 ‘어셈블리 에어리어(Assembly area)’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완성된 세트를 공연 전에 통째로 조립하고 시연해볼 수 있는, 말 그대로 ‘세트 연습실’이었다. 이곳에서 세트 제작 과정을 사전에 검증하고 조율함으로써 무대 설치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불필요한 재제작과 폐기를 최소화한다. 더불어 재작업으로 인한 추가 노동, 이동, 장비 사용, 물품 배송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탄소 배출까지도 함께 낮출 수 있게 하는 공간이다. 더 놀라웠던 점은 이들이 제작하는 모든 물품이 최초의 기획 단계부터 재사용을 전제로 설계된다는 사실이다. 공연 전 사용되는 자재의 50% 이상은 재사용된 것이어야 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65% 이상의 자재가 재사용이나 재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명확한 기준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지속가능성’은 단순한 윤리적 슬로건이 아니라, 이들의 필수 작업 조건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수업 전 습관적으로 다*소를 들러 이내 버려질 자잘한 교구들을 사들이고, 매일 새벽 문 앞으로 물건을 배송해주는 서비스 없이는 연극을 만들 수 없다고 외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중고 마켓에 물품들을 올리며 나름 뿌듯해하던 기억도 스쳐 지나갔다. 내셔널시어터가 말하는 지속가능성은 단순한 ‘후처리’ ‘하면 좋은 선한 행동’이 아니라 기획부터 제작, 사용, 보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철저히 계획하고 설계하는 실천이었고, 이 모든 기준은 ‘그린 북(Green Book)’이라는 구체적인 매뉴얼로 정리되어 전 세계의 작업자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 어떤 실천을 시도할 수 있을지, 동료들과 아이들과 어떻게 나눌지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 트럭에 쓰여 있는 ‘지속 가능한 연극 만들기’
  • 영국 내셔널시어터 옥상 웰빙 가든
지속 가능한 순환을 향해
투어는 이어서 아담한 정원이 자리한 극장 옥상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키워낸 꽃과 식물은 의상이나 세트에 쓰일 천을 염색하는 데 쓰인다고 했다. 옥상 곳곳에는 벌통을 설치해 꿀벌도 키우는데, 벌들은 템즈 강변 일대를 오가며 수분 활동을 하고, 극장 주변의 도시 생태계가 유지되는 데 작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량이지만 꿀을 생산해 실제로 판매도 이루어진다. 앞서 극장 안에서 보았던 거대한 스케일, 체계적 시스템과 반대되는 소박하고 귀엽고 다소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접근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연극으로 어떻게 인간과 환경을 연결하고, 도시와 자연의 공존을 고민하고 있는지 그 진정성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들이 말하는 지속 가능한 연극의 의미를 더욱 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셔널시어터가 고민하는 지속가능성은 제작 과정에 국한되지 않았다. 옥상 정원에서 느낀 웰빙 뿐 아니라 ‘어떻게 사람을 소모하지 않고, 다음 세대까지 남길 것인가?’ 하는 인력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 ‘공공극장으로서 어떻게 오래 작동할 수 있는가?’ 하는 조직의 운영 방식, 한 번 오고 끝나는 사람이 아닌 관계를 맺는 존재로서의 관객 등 다양한 요소에서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연극이 지속될 수 없으며, 이 모든 조건이 동시에 고려될 때 공연예술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고, 공공적 가치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전제에 깊이 공감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 꿈의 극단 ‘리허설룸 프로젝트: 맥베스’를 통해 이 경험을 작게나마 실천해 보고자 했다. 아이들과 ‘지구를 아프게 하지 않는 연극’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의상은 공연이 끝나도 아이들이 평상복으로 계속 입을 수 있는 것들로 구매했다. 무대의 주요 대도구는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소장품을 대여하고, 시대극에 어울리는 칼과 방패 등 소품은 프로젝트가 끝나고 백석예술대학교 연기과 소품실에 기증하였다. 하지만 아직 남은 숙제는 예술교육, 특히 공연이라는 특수성으로 얽힌 구조 안에서 참여자들이 언제든 다시 돌아와 시도하고 다음을 궁리하는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달걀로 바위 치기처럼 느껴지지만, 뭐든 시작이라도 하면 변화가 생기리라 다짐해본다.
이번 연수는 런던 유수 기관들의 예술과 교육, 창작과 운영에 대한 철학과 실천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고, 예술과 환경,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어떤 의미 있는 순환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깊이 이어가고 싶어졌다.
김기분
김기분
배우,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사람이다. 극단 여행자 단원이며, 1인 단체 ‘분기탱천’을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목적과 대상을 아우르는 예술교육을 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백석예술대학교 연기과에서 학생들과 연기와 문화예술교육을 탐구하며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 조만간 배우로 올리게 될 1인극 제작도 고심 중이다.
인스타그램 @giboon @_bgtc
사진제공_김기분 분기탱천 대표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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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6년 02월 03일 at 11:39 AM

    무대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2025 우수 예술교육가 역량 강화 해외연수 참가기
    잘 보고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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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6년 02월 03일 at 1:05 PM

    무대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2025 우수 예술교육가 역량 강화 해외연수 참가기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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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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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6년 02월 03일 at 11:39 AM

    무대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2025 우수 예술교육가 역량 강화 해외연수 참가기
    잘 보고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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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6년 02월 03일 at 1:05 PM

    무대 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2025 우수 예술교육가 역량 강화 해외연수 참가기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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