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기록의 시대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놓치기 싫어하는 이들은 디지털 기기에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즐기고 자신의 일상을 ‘로깅(logging)’한다. 감사 일기를 쓰고 저널링(journaling)을 즐기는 행위는 어쩌면 자신의 삶에 인색하지 않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흔적, ‘하찮다’ 여겼던 사소한 일상도 친절하게 돌아보고 아끼다 보면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활동가들 역시 자신의 삶을 성찰하듯 현장의 순간들을 기록한다. 프로젝트 기획과 프로그램 설계가 결국 일상의 물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메모·음성·사진·영상으로 남긴 소소한 기록들은 곧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된다. 서점에서 마주한 책 디자인이 홍보물이나 결과자료집의 이미지가 되고, 취향을 찾아가며 들은 음악은 현장의 음악이 되며, 전시에서 본 작품은 활동의 소재가 된다. 활동가의 기억과 기록은 이렇게 현장의 곳곳에 스며든다.
사이의 틈을 채워주는 현장 기록
프로젝트 기획은 의도적으로 시작되지만, 실제 결과물은 축적된 문화적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누군가의 시선이 머물렀던 장소, 음악, 글, 이미지들이 활동가와 참여자의 관계 속에서 다시 엮이며,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장(field)에서 발화하는 것이다. 내가 본 것이 곧 ‘나’이기에 우리는 같은 장면을 바라보아도 서로 다른 상상의 지평을 펼쳐간다.
문화예술교육 초기, 세분화된 사업 정책은 대상을 분류하고 적합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현장을 지원했다. 시간이 흐르며 표준화된 프로그램보다 각 현장의 맥락이 담긴 사업을 발굴·지지하는 흐름으로 변화했고, 정책 연구 역시 프로그램 개발에서 ‘매뉴얼 개발’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때 강조된 것이 바로 수업 기록과 분석이었다.(주1) 수업 과정 자료를 수집하고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를 다루는 ‘수업 일지’는 흔히, 기술(description), 해석(interpretation), 평가(evaluation), 주제론(thematics)을 다루는 수업 비평으로 불린다. 특히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나 무의식적 수업 원리는 형식적 문서가 아니라 생생한 경험의 기록 속에서 발견된다.
오랜 시간 문화예술교육 행정을 하다가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두려움이 앞섰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 불안과 불확실함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수업 현장으로 모셔 왔다. 그들의 피드백은 기획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버려야 할 것과 견고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을 알려주었다. 불안에서 시작한 수업 기록은 동영상을 촬영하고 분석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낯설기만 한 영상 속 내 모습 너머로, 함께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참여자분들의 반응이 세밀하게 보였다. 부족한 나를 환대해 주는 모습에 감사함이 밀려왔고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갔다. 특히 동료의 관찰과 분석이 큰 힘이 되었다. 내가 기록한 수업과 동료가 기록한 수업 현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건, 잘못되었다기보다 사이의 틈을 채우면 된다는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이를 계기로 나는 작은 목표를 하나씩 정했다. 어떤 날은 ‘관계의 시작’을, 어떤 날은 ‘움직임에 관한 대화’를, 또 ‘음악의 숨결’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쌓인 기억과 기록은 다음 수업과 프로그램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잊지 않도록 했다.
그때의 나, 다음의 나를 위한 기록
하지만 때때로 현장 기록이 행정 문서에 갇히기도 한다. 활동(출강) 보고서의 ‘학습 평가’란이 대표적이다. 참여자만이 평가 기준인 것을 보며 우리의 모습-현장 예술교육가-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후 여러 예술교육가와 지역아동센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학습 평가 대신 자기 수업을 분석해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학습 평가’란에 자기 의도와 전개 방식을 기록하고 기억에 남는 모습과 아쉽거나 놓친 점을 적어나갔다. 스무 번 넘는 기록을 모아 다음을 기약하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정리해 결과자료집에 담았다. 또한 프로그램을 각 지역아동센터의 환경에 맞게 어떻게 재구조화해 실행했는지 남겨 보았다. 기획자가 설계한 프로그램을 과감하게 더하기 빼기 한 현장 기록은 기획자에게는 다음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귀중한 자료이자 피드백이 되었다. 예술교육가들 역시 같은 프로그램을 다르게 해석한 결과를 비교하며 자신의 수업 방식을 되돌아보았다. 특히 연령대가 다른 동료의 접근 방법과 아이디어가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현장 기록은 예술교육가 모두를 ‘현장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주말예술캠퍼스 프로젝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임 연구자·연구원·예술교육가 모두 프로그램이 종료되고 난 후, 각자의 기록을 펼쳐놓고 최종 결과자료집을 함께 만들었다. 활동에 사용된 음악과 사진, 참고 자료는 물론, 실패와 시행착오까지 과감하게 드러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 기록이 분출될 때면 서로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암묵적으로 ‘이건 뭐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언어로 담기 어려운 순간은 예술교육가의 시선이 담긴 사진집으로 제작됐다. 이렇게 기록된 사진은 현장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각자의 기록이 쌓이면서 기획–과정–결과의 궤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굳이 ‘성과’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우리의 행위에 대해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내적 논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행동 이후에 의미를 발견한다. 기록은 ‘그때의 나’를 불러오며 ‘다음의 나’를 기대하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록하고 또 기록한다. 프로젝트를 해내느라 소홀하고 급급했던 관계를 소중히 기억하기 위해 현장을 기록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narrative)이며 대화다. 각자의 문화적 경험에서 출발해 우리의 이야기(culture)를 만들고, 실패와 성공을 예단하기보다 숨어 있는 맥락을 찾고 서로를 돌이켜보며 삶에 인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사적인 내용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를 은유적으로 담아내려는 시도다.
서로의 말과 글에 간섭하며 연결되는 우리
코로나19로 공적 공간이 단절되었을 때는 사회학의 관찰 방식을 변주해, 같은 공간 속에서 다른 동선으로 이동하는 참여자의 모습과 생각을 기록하고 공유했다. MZ세대 1인 가구와 함께한 프로젝트에서는 움직임 외에 색·선·단어·그림 등으로 무용 경험을 표현하는 새로운 기록 방식을 실험했다. 그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언어 중심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양한 표현 형식에 친숙해지고, 점·선·면으로 연결되는 비언어적 기록을 통해 자기표현 도구와 문화를 발견하며 그런 자기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협력가로 참여한 지역 문화플랫폼에서는 기록자의 역할이 특히 강조되었다. 참여자 중 누군가가 기록하거나, 서로 다른 세대가 기록하기도 했다.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지 않고 묘사·해석·이해하는 기록은 ‘함께하기’의 또 다른 방식이 되었으며 기록 도구(그림, 글, 영상, 사진, 인터뷰 등) 또한 각자 다르게 해석·적용했다. 진행 과정보단 그 안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기길 기대했다. 때론 기록 도구 자체가 다른 시대와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는 각자의 모습을 투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활동 과정의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건, 남겨두지 않으면 우리의 경험과 이야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기록이 없으면 성찰 또한 묘연해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면, 일상의 기록이 모여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되고 불규칙한 다이어그램과 스케치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기록은 새로운 감각 자료를 찾고 도전하도록 자극한다. 예술교육가와 흥미로운 정보나 관찰 기록을 나누다 보면 파편화된 생각 조각들이 연결되고, 서로의 말과 글에 간섭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던 간섭이 어느 순간, 포근하게 다가온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기록은 나의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면서 기꺼이 좌절하고 설레고 기대하며 남긴 기록은 또 하나의 문화 공유재로 거듭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에 인색해지지 않기 위해, 자기 경험을 세상에 꺼내 놓아야 한다. 평범함 속에 깃든 비범함을 신뢰하면서 말이다.
(주1) 한양대학교 산학협력단(김선아·안금희·전성수·강정헌·박윤미·정세환), 「2009 사회문화예술교육 강사 교수활동 매뉴얼 개발 연구-아동복지시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2009. 참조

- 황정옥
- 비언어적 표현이 좋아 무용을 하던 중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행정, 연구, 기획, 교육 활동 등의 경계에서 소심하게 작고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바라보는 게 마냥 즐거워 지금은 꿈의 무용단 무용교육감독으로, 대학에서 늘봄학교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edudance7@gmail.com - 사진제공_황정옥 문화예술교육 활동가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5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인색하지 않기 위한 노력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남기는 기억과 기록
잘 보고 갑니다
인색하지 않기 위한 노력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남기는 기억과 기록
기대만점입니다
간섭이 연결이 된다는 건 그만큼 관계의 신뢰가 구축되었다는 증거이겠지요. 시스템 구축을 위해 애쓰신 시간과 노고가 귀하게 짐작됩니다!
문화예술교육은 성과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경험을 기록하며 ‘왜 이 일을 하는가’를 다음의 나에게 건네는 과정이다.
새해에는 큰 욕심보다 소소한 기쁨이 자주 찾아오고, 하루를 돌아볼 때마다 잘 버텼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처럼 힘차게 달리되 너무 지치지 않게, 마음의 여유와 웃음을 함께 챙기는 2026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