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1 “우리가 누고? 이래 봬도 우리가 마 세계적인 한량묵객 아니겠나?” (“그렇지~!”)
단원 2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화알짝 펴고!” (“화알짝 펴고!”)
연 출 “자, 자, 잠시만요. 더 재빨리 대사를 붙여줘야죠! 입장부터 다시 해봅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삼일절 오후, 극단이중생활 단원 10여 명은 만세운동 재현극 〈걸인이 일어났소, 기생이 일어났소〉 연습이 한창이다. 흩어졌다 모이고 노래하다 춤추며 사방팔방 무대를 휘젓는 단원들, 아니, 자칭 “세계적인 한량묵객”인 ‘걸뱅이’들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저 무리 속에서 어깨를 활짝 펴고 한판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하는 나를 발견한다.
2017년 함양문화예술회관 상주단체이던 극단현장으로부터 받은 생활예술가 자격증(?)은 내가 딴 몇 안 되는 자격증 중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국가나 회사가 인정해 주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나는 딸의 생일에 선물할 노래도 직접 만들어보고 내가 운영하던 ‘카페 빈둥’ 손님들을 생각하며 희곡도 써보았다. 그 희곡으로 동네 사람들과 연극을 선보이기도 하고, 딸을 위해 만든 노래를 관객 앞에서 부르기까지, 난생처음 시도해 본 일들로 꽉 찬 한 해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영화 관람할 극장 하나 없는 촌에 사는 한 시민의 삶에 예술꽃을 활짝 피워준 고마운 프로그램 〈예술함양소〉를 기획하고 운영해 준 극단현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낮엔 직장인 밤엔 배우, 우리는 이중생활 중
내가 첫 노래를 만들고 희곡을 쓰던 바로 그해 진주에서는 극단현장과 경남문화예술회관이 협력해 만든 시민예술교육 프로그램 〈내가 바로 국민배우〉(이하 국민배우)가 시작되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연극을 하고 싶다고 모인 시민 40여 명이 8개월이란 긴 기간 동안 매주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극장 공연까지 해낸 것이다. 극단이중생활을 이끌고 있는 신경준 대표도 국민배우 1기 참가자로 난생처음 연극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극단현장 최동석 배우를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만났어요. 시민들 상대로 연기 수업도 하고 무대에 세우는 프로그램이 있다면서 한번 참여해 보지 않겠냐고 하대요. 그 말을 듣고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랬죠. “내가 하면 네 밥벌이가 없어질 텐데 괜찮겠니?”(웃음) 1년 지나니까 거짓말처럼 제가 무대에 서 있었어요. (웃음) 희한하죠. 전혀 모르는 관객들이 저에게 보내주는 그 박수 소리와 격려, 환희라고 해야 할까요, 그 뭔지 모를 감정에 이끌려 1년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국민배우 동기들이 모인 뒤풀이 자리에서 그랬죠. “우리가 시민극단을 창단하면 어떨까요?” – 신경준 극단이중생활 대표
신경준 대표의 제안에 낮엔 직장인, 밤엔 배우가 되겠다는 이중 생활자 14명이 기꺼이 화답했고, 극단현장의 전적인 지지를 받으며 시민극단 이중생활이 탄생했다. 해마다 신입 단원이 하나둘 입단하면서 이중생활은 9년 만에 무려 44명이 함께 활동하는 규모 있는 시민극단이 되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의 다양한 세대, 다양한 직업군이 어우러져 매해 5~8편 정도의 공연을 소화해 낸다. 여러 사람의 협업이 없이는 불가능한 연극이라는 장르를 서로 다양한 재능을 발휘해 거뜬히 헤쳐나간다.
44명의 직업이 워낙 각양각색이다 보니 웬만한 문제는 그 안에서 다 해결됩니다. 영상 잘 만드는 사람, 조명 잘 다루는 사람, 음향 전문가, 서류 잘 만드는 사람, 저처럼 ‘노가다’ 잘하는 사람. 게다가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되는 〈내가 바로 국민배우〉 프로그램을 끝까지 해낸 분이 이중생활에 들어오거든요. 연극에 대한 열정이 이미 검증된 상태에서 입단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따로 준회원 제도를 두지 않고도 잘 운영이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 신경준 대표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 최근엔 단원들이 친목부, 연출부, 홍보부, 워크숍부 등으로 나뉘어 조금 더 조직적으로 극단 운영에 필요한 일을 해나가고 있다. 극단 유튜브 채널과 SNS에 올라갈 콘텐츠 촬영과 편집, 업로드 등은 홍보부가, 체육대회나 MT, 회식 기획과 공지는 친목부가, 희곡 읽기 모임이나 내부적으로 진행되는 1~3인극 공연 등은 워크숍부가 운영하는 식이다.
두 극단이 상생하는 법
함양이란 농촌 지역에 15년쯤 사는 동안 멀리 도시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챙겨본다는 사람은 만났지만, 연극을 챙겨본다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도시라고 사정이 그리 다를까. 1974년 창단된 진주의 극단이자 전문예술법인인 극단현장의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공연을 열심히 만들어도) 관객이 늘지 않더라고요. 어떨 때는 12명 앞에 두고 공연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땐 1명밖에 오지 않아 공연을 취소한 적도 있어요. 그런 시간을 겪으면서 깨달았죠. ‘연극 할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야 우리가 산다.’ – 황윤희 극단현장 배우‧교육팀장
평소 그런 고민을 익히 알고 있던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문예회관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지원사업’을 받아 판을 깔아준 것이 〈내가 바로 국민배우〉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1년 가까이 만난 시민들이 극단현장이 그토록 원했던 극단을 창단한다니, 그 반가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까. 극단현장 입장에선 교육 프로그램의 최대 성과이자 말 그대로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실로 두 극단은 연극을 매개로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이중생활이 공연할 때면 극단현장 단원 중 1명이 예술감독 역할을 맡아주고, 연습 공간, 공연장, 무대, 음향, 조명, 의상, 소품 등 필요한 것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반대로 극단현장에서 사람 손이 필요한 모든 일에 이중생활 단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하고, 배우가 여럿 필요한 공연에 이중생활 배우가 출연하기도 한다. 이중생활 단원이 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극단현장의 후원회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희 정관에 극단현장 후원회원 가입이 아예 명시되어 있어요. 극단현장과 이중생활은 연극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인생 선후배로서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기도 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기뻐해 주고 서로 안타까워해 주고. 이제는 가족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이 너무 많은 대가족이 되어 버렸지만. (웃음) 저는 이 왁자지껄한 모습이 좋아요. – 신경준 대표
지원사업이 5년 만에 종료되면서 〈내가 바로 국민배우〉 프로그램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신경준 대표는 경남문화예술회관을 찾아가 “우리 힘으로 이 프로그램 운영할 테니 계속하게 해달라”고 설득했다. 국민배우 참가자들에게는 3만 원씩 회비를 받고, 모자라는 부분은 이중생활 통장에서 메꿔가면서 되든 안 되든 지원사업에 응모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맨땅에 헤딩을 좀 잘해요. (웃음) 저희 운영진 4명이 다 그쪽(문화예술) 계통은 아니지만, (지원사업이) ‘떴다’ 하면 우선 같이 작성해서 보냈어요. 처음엔 많이 떨어졌는데 계속하다 보니 이제는 매년 두세 개 사업은 지원을 받습니다. 지원금이라고 솔직히 공연 한 편 올리는 데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거라도 있어야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고 편하게 공연할 수 있거든요. 그나마 (극단현장 공간인) ‘예술중심현장’에 공연장부터 연습장까지 다 있으니 그 부분은 쉽게 해결되고요. 가능하면 지원사업을 받으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연초에 많이 바빠요. (웃음) – 신경준 대표
오롯이 지원사업에만 의존했다면, ‘맨땅에 헤딩’ 정신을 가진 시민극단이 없었다면, 5기 이후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국민배우는 올해 무려 9기 참가자를 성공적으로 모집해 순항 중이다.
커뮤니티 공간이 가진 힘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두 극단의 관계에 기여한 일등 공신은 ‘공간’인 듯하다. 오랜 기간 옛날 영화관 건물 3~4층을 빌려 공연장으로 운영하던 극단현장은 5년 전 이 건물을 샀다.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지원과 자체 자금, 단원들의 기부, 시민 모금과 무이자 출자금으로 4층 건물 전체를 사들이고 리모델링하여 복합문화예술센터인 ‘예술중심현장’을 개관하게 되었다. 지하에는 다목적 소극장, 1층엔 카페형 전시실, 2층엔 공유사무실이 있어 다양한 개인과 생활예술동아리, 지역 단체들이 활용할 수 있다. 이중생활 또한 2층 공유사무실의 한 칸을 극단 사무실로 쓰는 한편, 연습, 공연, 모임 등 극단 운영에 필요한 대부분의 활동을 이 공간에서 이어가고 있다.
사실 이 건물을 극단현장 단원들보다 저희 이중생활 단원들이 더 많이 쓸걸요? 극단현장은 전국으로 공연을 다녀서 비우는 날이 많지만, 저희는 있을 곳이 여기뿐이라 아주 살다시피 합니다. (웃음) 이 건물 리모델링할 때 저희 단원들이 몇 날 며칠 붙어서 1층부터 옥상까지 페인트칠이며 일을 도왔어요. 정말 보기 좋았죠. 뭐 어차피 우리 놀이터가 될 곳이니까요. (웃음) – 신경준 대표
극단현장이 50여 년을 활동했지만, 신경준 대표는 아직 극단현장을 알지 못하는 진주 시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이중생활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극단현장과 예술중심현장이라는 공간은 더 많이 알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단원 한 사람이 공연에 참여하게 되면, 적어도 그 단원 주변 10여 명의 가족이나 지인이 공연을 보러 오게 되고, 이것은 다시 말해 극단현장을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이 10명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신경준 대표의 경험에서 도출된 셈법이다. 신입 단원 10명이면 100명의 시민에게 홍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극단현장 또한 예술중심현장 공간을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 공간을 지역 사람들이 많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 과제이기도 해요. 많은 시민이 드나드는 한편, 관객도 끊임없이 오게 해야 하고요. 공간에 주택도시보증공사 지원금이 제일 많이 들어갔지만, 2억 5천만 원 정도는 시민들이 무이자로 빌려주거나 기부해 주신 것이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공간이라 극단현장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민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고자 해요. – 황윤희 팀장
2017년 극단현장과 〈예술함양소〉 프로그램을 경험한 뒤 나는 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일이 가치 있다는 것을, 그 삶의 이야기를 각자 빛깔로 내보이는 일이 우리 삶의 주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멋진 예술을 소비하는 것과 평범하지만 내 삶 속 예술 생산자가 되는 것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평범한 나의 삶,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글로, 노래로, 그림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을까.
저는 연극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좋은 매개라고 생각해요. 연극을 통해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할까요. 내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온전히 무대 위에 설 수 있더라고요. 연극을 통해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그 경험은 시민들에게도 필요할 것이란 확신이 있어요. 어린이든 할머니든 꼭 해봐야 해요. – 황윤희 팀장
연극을 하면서 저 자신을 계속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틀린 게 아니라 우리가 다르구나!’ 그걸 인정하는 순간부터 ‘틀렸어’가 아니라 ‘그럴 수 있어’가 되더라고요. 상대방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저도 조금씩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고요. 이런 작업을 더 많은 사람이 하게 되면 결국은 서로 이해하며 사는, 조금은 더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 신경준 대표
내년이면 이중생활은 10살이 된다. 10주년에 어떤 재미난 일을 벌여볼지 벌써부터 고민 중이다. 예술중심현장이 주인인지 손님인지 모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현장아트홀 공연 일정을 빼곡히 채워 돌아가는 어떤 날을 그려본다. 그때는 분명 지금보다 조금은 더 괜찮은 세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이은진
- 지리산 북쪽 덕유산 남쪽에 있는 함양에서 #문화예술 #서로배움 #청(소)년 #로컬 등의 키워드로 일과 활동을 넘나들고 있다. 요즘은 주로 서하다움에 서식하며 카페지기, 팝업식당 쉐프, 기획자, 촉진자 등으로 살며 시골로 잠시 깃든 청년들에게 지역의 삶을 가감 없이 소개하는 중이다. 빈둥밴드에서 퍼커션과 노래를 한다.
svjin96@gmail.com
서하다움 -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극단현장・극단이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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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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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네요.
응원합니다.
삶의 중심에 예술을 두고 서로를 부추기는
극단현장과 극단이중생활의 공진화
잘 보고 갑니다
삶의 중심에 예술을 두고 서로를 부추기는
극단현장과 극단이중생활의 공진화
기대만점이네요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