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미 넘치게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린다

예술교육이 내 삶에 스며드는 사이

며칠 전 쓰러져 응급실로 향했다. 의식이 돌아오자 불쑥 내 인생의 기억을 되짚게 되었다. 어린 시절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가족 장기 자랑을 여셨던 기억이 젤 먼저 떠올랐다. 나는 부채춤이나 악기 연주를 했고 두 언니는 시(詩)나 노래를, 남동생들은 태권도, 때론 마술을 했다. 그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는 매번 곱추춤을 추셨다. 아버지가 고(故) 공옥진 여사로 변신해 바보 같고 재밌는 표정과 행동으로 웃음을 줬던 시간, 우리 가족의 딱딱한 관계를 비집고 들어온 사이, 그 장기 자랑 시간이 기억났다.
그 해학미 넘치던 소리, 예술가의 시선이 만든 사이
20년 전, 지인의 소개로 포이동 판자촌을 알게 되었고 그곳 아이들이 직접 설계한 놀이터를 만들자는 ‘꿈’같은 프로젝트를 덜컥 맡게 되었다. 나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가우디를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어디나 놀이터가 될 수 있다’라는 주제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아이들이 설계한 놀이터 모형을 만들어 후원을 약속했던 모 기업에 보여주기로 한 마지막 날, 기업으로부터 사업 취소 통보를 받았다. 판자촌 철거 문제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무거운 걸음으로 도착한 공부방 가득 어른들이 만든 철거 반대 현수막이 펼쳐져 있었다. 몇 달간 애써온 프로젝트의 취소 소식과 프로그램을 존중하지 않는 듯한 어른들의 태도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땡그랑’ 그 순간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한쪽에서 울렸다. 아이들은 그 현수막 위로 동전 전달 게임을 만들어 놀고 있었다. 모든 조건이 사라져도 ‘어디나 놀이터가 될 수 있다’를 몸소 실천하는, 이미 건축가가 돼버린 아이들. 절망했던 내 마음과 붉은 글씨 현수막 사이를 비집고 울리던 그 해학미 넘치던 소리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은 코스티(V. Glasgow Koste)의 말처럼 예술교육을 통해 길러진 눈으로 현실의 절망 속에서 창조성을 발휘해 문제를 다르게 보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놀이터를 만들었다. 예술을 통해 발견된 사이, 이미 아이들 속에 자라난 힘을 발견했고 해학미 가득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포이동의 아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놀이터를 스스로 만들었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것이기에, 예술가의 시선이 만든 그 사이가 그들 내면에서 꺼지지 않고 꿈틀대며 자라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축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돌아왔다.
삶을 리허설 하는 사이의 공간
‘약봉지만 달고 사는 할머니들’로만 생각했던 마을 청소년과 청년들은 할머니들이 살아오신 사연을 듣고 놀란다. 나는 전남 곡성에서 세대가 어울려 연극을 만드는 일을 수년간 해오고 있다. 마치 전쟁 같은 삶을 살아낸 할머니들의 이야기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냈지?’ 당황해하며 생각은 길을 잃는다. 그 속에서 예술교육은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낯선 사이의 공간을 만든다. 현실이지만 현실 어디에도 없고 가상의 연극이지만 가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이의 공간, ‘삶을 리허설하는 공간’. 예술교육을 통해 우린 삶을 극복한 여성사로 그분들의 삶을 다시 하나하나 조명하며 읽게 되고 앞으로 나의 여성사는 어떻게 그려갈지 자문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랑께 말이여. 이렇게 재미난 인생이 어디 있어. 내 이야기로 감동을 주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난당께.” 평생 똑같고 지루해 보였던 자신의 일상을 새롭게 바라봐주는 젊은이들의 시선은 삶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사이의 공간을 만든다. 이러한 과정은 여태껏 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리허설 장이 되고 85세임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연극 무대를 주저 없이 시도해 보게 되는 사람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탯줄처럼 연결되는 영적 교환의 사이
성북구 정릉의 한 공부방에서 만난 초등 3학년 김수정(가명)은 어느 누구와도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사실 수정이는 어린 시절 엄마의 자살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우리는 그런 수정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놀이를 통해 끊임없이 초대하고자 했고 아이를 잉태하듯 수정이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려줬다. 그저 천천히 서로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나누는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10개월 마지막 발표의 순간 수정이는 당당히 무대에 올랐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모든 인간의 만남은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하나의 영적 교환”이라고 했다. 수정이는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며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삶의 경험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하며 내면의 치유와 성장을 경험했다. 호흡. 그렇다. 예술교육은 마치 탯줄처럼 수정이와 세상을 다시 이어 호흡하게 했다.
고립과 단절이 심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교육의 역할은 더욱 크다. 세대와 세대, 현실과 이상 사이에 질문을 던지고, 삶의 리허설을 맘껏 할 수 있는 사이의 공간을 내어줘 공감할 기회와 도전할 용기를 줘야 한다. 예술교육은 예술을 모르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차원이 아닌 영적인 교환의 사이임을 기억하고 생명을 전하는 탯줄이 그리하듯 깊게 서로 호흡하며 만나는 장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현실을 만나더라도 예술가의 시선으로 여기저기 사이를 만들며 넘어갈 수 있는 해학의 미를, 새로운 질문을, 상상할 힘을,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스며드는 사이를 창조해가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면 우린 어떤 기억들이 떠오를까? 나는 응급실 상황을 벗어나는 동안 예술교육이 내 삶에 스며들어 만들어낸 사이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가슴이 기억하는 선물, 앞으로 살아갈 힘 같은 것이었다.
손혜정
손혜정
극단 마실 대표, 연출가, 배우이자 엄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어릴 적부터 품었던 꿈을 이루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아동청소년연극을 전공했고, 2005년에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을 관객 삼아 쓴 첫 작품 <달려라 달려 달달달>과 함께 극단 마실을 창단했다. 공연자 중심의 활동에서 벗어나 관객이 주체가 되는 참여형 연극을 실현하기 위해 영유아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세대와 만나 예술교육과 연극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극단 마실 페이스북 @masiltheater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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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10월 30일 at 12:14 PM

    해학미 넘치게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린다
    예술교육이 내 삶에 스며드는 사이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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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10월 30일 at 1:53 PM

    해학미 넘치게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린다
    예술교육이 내 삶에 스며드는 사이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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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희 2024년 11월 27일 at 1:20 PM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면 저는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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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10월 30일 at 12:14 PM

    해학미 넘치게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린다
    예술교육이 내 삶에 스며드는 사이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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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10월 30일 at 1:53 PM

    해학미 넘치게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린다
    예술교육이 내 삶에 스며드는 사이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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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희 2024년 11월 27일 at 1:20 PM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면 저는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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