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

포항빛오름 ‘깨소’

재난은 우리 앞에 왔다
2017년 포항 지진 때, 대구에서 느꼈던 공포는 가끔 큰 트럭이 옆을 지나가면 느껴지는 울림에도 반응하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가까이 가족 중에도 피해를 직접적으로 겪은 이들이 있었다. 재난은 먼 나라의 일로만 생각했는데, 코로나19로 일상 단절의 시기를 지나면서 ‘재난은 우리 앞에 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과 경주 일대는 물적 피해도 컸거니와 수많은 이재민이 수년간 일상에서 떨어진 삶을 감내해야 했다. 재난이라는 것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건물과 우리의 일상은 손쉽게 극복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5년을 공동체의 힘으로 지진의 피해와 상처를 극복하였다. 그런데 2022년 태풍 힌남노가 부산, 울산, 포항, 경주 등 동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포항제철소가 가동 이래 최초로 전면 가동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포항 일대는 그야말로 재난도시가 되었다. 이후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어마어마한 경제적‧사회적 비용이 들었으며, 사람 간의 관계와 공동체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문제는 개인으로 전가된 심리적 충격을 해소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충격은 쉽게 이전 상태로 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로의 고민과 담론이 형성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포항시는 이중삼중의 심리적 재난상태에 빠져있었고, 누군가는 ‘문화예술을 통한 치유’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저와 가족도 당시에 지진을 느끼고 대피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후유증 같은 거는 없었는데, 저희 동생이 흥해(읍)에서 지진 트라우마로 너무 힘들어하는 선생님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이 상처가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 것이 재난 상황을 회복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태풍 힌남노 때는 오천에서 주차장에 있는 차를 옮기러 가다가 돌아가신 분의 친척분도 여기 계셨어요. 예술가로서 재난으로 힘들어하는 시민을 곁에 두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 지점이에요. 재난은 한순간이지만 치유는 오래 걸리는 거 같아요. – 엄말숙 포항빛오름 단원, ‘깨소’ 기획자
  • 치유타령
전통공연예술인들의 곁눈질
포항빛오름은 원광대학교 디지털대학 전통공연예술학과 출신들로 구성된 포항의 성악·무용·타악의 ‘가무악(歌舞樂)’ 문화예술인으로 구성됐으며 2014년 창단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엄말숙 기획자는 전통춤을 추는 예술가로서 지역에서 수년간 전통연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구룡포 해녀 삶·애환, 춤과 노래로 풀다>, 영덕군 해녀들의 삶과 애환, 꿈을 담은 창작연희극 <바다의 딸 해녀> 등을 통해 지역 서사를 전통공연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그런 예술가, 예술단체가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분야도 생소한데, ‘재난의 치유’라는 어려운 주제를 선택한 배경이 매우 궁금했다. 인터뷰 내내 이 부문을 집요하게 질문하였지만, 엄 기획자는 매우 담담하게 “재난이 일어나기 전 일상으로의 회복”을 이야기하였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지역 문제 해결, 공동체성 회복과 같은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요즘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온도감이었다. 일상의 중요성을 일상이 무너진 재난도시 포항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경북문화재단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공모 준비를 하면서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을 처음 가지게 되었어요. 모두 예술을 업(業)으로 하는 분들이 모였기에 처음에는 문화예술교육이 조금 어려웠었어요. 그런데 공고문에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단어가 있는데요. 바로 ‘이웃’이라는 표현이었어요. 예술가로서 지금까지는 관객만을 염두에 두고 열심히 창작하고 연습했는데, 이번에 이웃형 공모를 준비하면서 ‘이웃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이 포항이라는 지역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기획서를 작성했어요. – 엄말숙 기획자
  • 치유타령
저의 첫 문화예술교육 기획입니다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예술교육사’로 대변되는 제도 아래, 전공자 중심으로 문화예술 전공역량과 교수역량에 중점을 두고 운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문화예술교육은 특정 분야의 역량 강화도 해당되지만, 시민의 참여를 통한 문화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측면도 매우 중요하다. 즉, 문화예술을 경험하지 못한, 더 나아가 문화예술적 해방의 경험이 없는 시민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물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난의 충격 앞에서 ‘가야금을 연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엄 기획자는 <문화예술로 풀어내는 치유와 회복 “깨소”> 프로그램을 지난 6월 13일부터 진행하고 있다. ‘깨소’란 ‘웃음으로 깨다. 깨우다. 경상도 사투리로 깨뜨리다. 깨우다’란 뜻이다. 재난으로 인한 상처, 고통, 잠들어 있는 마음을 깨고, 깨워서 재난이 일어나기 전 일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포항시 동해면민, 오천읍민을 대상으로 하는 이번 프로젝트는 지진, 태풍 등의 큰 재난을 당한 이들의 상처받고 억눌린 가슴앓이를 이야기로 털어내고 노래와 무용, 악기연주로 위로하고 격려해 건강한 심신을 갖도록 돕는데 그 의미가 있다.
포항빛오름 1기 회장이기도 하신 김도연 선생님도 많이 도와주셨고, 저도 처음이다 보니까 잘 해보고 싶은 욕심이 점점 커졌어요. 팀원들에게 처음 하자고 했을 때,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한국무용 전공이다 보니까 1시간 동안 한국무용만 딱 진도 나가고 했는데, 무언가 명확하지 않은 주제로 참여자를 모집하는 거부터도 막막했지만, 커리큘럼을 짜면서 과연 시민들이 따라와 주실까 하는 우려가 가장 컸어요. – 엄말숙 기획자
문화예술로 풀어내는 치유와 회복
문화예술 치유 프로그램 “깨소”를 직접 보기 위해 동해면민복지회관을 방문했을 때 사실 꽤 놀랐다. 많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참여하거나 인터뷰하였는데, 바닥에 둥글게 눌러 않아 서로를 확인하며 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기획자와 포항빛오름 강사들의 속도감과 진중함에 한 번 더 놀랐다. 으레 악기를 치고 노래를 부를 줄 알았건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절반 이상의 시간을 무언가를 하는 것을 지양하고 무언가를 고민하고 탐문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2기 김점숙 회장과 3기 최현화 회장은 물론이거니와 포항빛오름 단원들이 함께 동해면, 오천읍 시민 참여자들과 호흡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바쁜 일상 가운데에서도 금번 기획에 의미와 가치에 동의하고 묵묵히 자신의 맡은 분야를 수행하는 것을 보며 지역 예술교육가들의 진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쓰레기를 모아 악기로 만드는 치유의 행위가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였다. 특히 ‘수다 랩소디’를 통해 지진과 태풍을 직접 겪은 참가자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치유타령>을 따라 부르자니 마음에 억눌린 상처가 치유되는 듯하였다.
깨소는 재난으로 인한 고통으로 닫혀있고, 숨죽여 있는 속내를 이야기와 웃음으로 깨우자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깨소 1부 ‘수다랩소디’에서 재난 당시의 감정과 현재의 감정을 공유하며 나눈 이야기에 민요 가사를 개사해 입히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몸짓으로 표현해 고통과 아픔의 벽을 허무는 데 중점을 두었어요. 오늘 부르는 <치유타령>이 바로 그 결과물이에요. 2부 ‘난리법석’은 이 과정을 노래와 춤으로 만들고, 리듬에 맞게 악기로 연주함으로써 한바탕 웃음으로 상처와 아픔을 승화시키는 과정입니다. – 최현화 포항빛오름 3기 회장
저도 서양악기 전공자예요. 처음에는 국악을 배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치유 프로그램이라서 더 신선하고 의미에 공감하는 거 같아요. 실제로 태풍 때 가까운 지인이 돌아가셨다고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지하 주차장을 가면 느껴져요. 오늘같이 재활용품으로 악기를 만들어서 직접 연주회도 한다는 것 또한 바다를 접하고 있는 우리 마을에서는 더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 – 김정아 참가자
  • 재활용품으로 만든 악기
집단적 트라우마를 포착하는 문화예술교육가들
포항빛오름은 매주 회의를 통해 고유의 전통연희 연습뿐만 아니라, 이번 ‘깨소’ 프로그램과 ‘지진 드라마 창작공연’ 등의 추진 상황을 공유하고 역할을 분담해 추진하고 있었다. 전문 예술가로서 이렇게나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빈 영역을 포착해주는 것이 문화기획자로서 고맙기까지 했다.
포항빛오름은 재난으로 무너진 담장을 치우고 그 너머로 우리 이웃 간의 마음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재난의 일상화로 인해 집단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상실이 빈번해지는 요즘, 문화예술교육가와 단체의 진중한 관찰력이 개인과 일상의 소외된 바로 그 지점에서 한동안 멈춰보기를 기대한다.
강구민
강구민
문화경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문화도시 계획수립 및 문화영향평가 연구 등 다수 지역문화연구를 수행하였다, 이후 고향인 영천에서 일한 지 5년 차, 문화를 중심으로 두고 청년과 지역을 연결하고자 노력 중이다. 코뮤니타스 연구기획팀장과 기억과아카이브 대표를 지냈고, 현재 사회적협동조합 도시사람콘텐츠랩 대표이자 영천시 문화공감센터장을 맡고 있다.
페이스북 @guminkang83
도시사람콘텐츠랩 @upcl_2022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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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08월 01일 at 3:04 PM

    재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
    포항빛오름 ‘깨소’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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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08월 01일 at 5:06 PM

    재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
    포항빛오름 ‘깨소’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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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2024년 08월 02일 at 11:40 PM

    재난과 어려움을 문화예술로 치유하고 승화시키며 보다듬는 “깨소”의 활동이 참 인상적입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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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남 2024년 08월 01일 at 3:04 PM

    재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
    포항빛오름 ‘깨소’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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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현 2024년 08월 01일 at 5:06 PM

    재난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
    포항빛오름 ‘깨소’
    기대만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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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희 2024년 08월 02일 at 11:40 PM

    재난과 어려움을 문화예술로 치유하고 승화시키며 보다듬는 “깨소”의 활동이 참 인상적입니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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