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시 구도심에 위치한 미술중심공간 보물섬(이하 보물섬)은 2016년 대구 미술가로 구성된 그룹 ‘썬데이페이이퍼’에서 <청년미술 페스티벌>을 위해 임시로 빌린 공간이었다. 미술그룹은 전시 이후에도 이곳을 작업실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경산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썬데이페이퍼는 2018년 해산했지만, 나는 경산에 머물며 지금까지 보물섬을 운영하고 있다. 보물섬에 정착할 즈음 과도하게 편향적이며 억지스러웠던 동시대 미술과 대구의 보수적인 미술계 분위기에 몹시 지쳐있던 터라 경산처럼 작은 규모의 도시 생활이 편안했다.
대구광역시의 위성도시인 경산은 경상북도의 다른 시·군과는 다르게 인구소멸지역이 아니라 매년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이다. 특히 대구 지하철 2호선 종착역인 영남대학교 방향으로는 해마다 몰라볼 정도로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반면 보물섬이 위치한 경산의 구도심은 오래된 골목과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농촌 지역, 발전하는 곳, 구도심이 혼재한 경산의 모습이 나에게는 흥미로웠다. 대구로 가는 길목으로만 인식되어 그동안 미술계에서 관심이 없었던 경산을 나는 경산시민의 눈으로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까슬까슬하고 쌉싸름한 문화예술교육
경산에서의 첫 기획이었던 2017년 《서상동 프로젝트》 전(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산 ‘코발트 광산’을 알게 되었다. 코발트 광산은 보물섬에서 4.5km 떨어진 ‘백자산’의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단번에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골프장에 높게 솟은 조명탑 덕분이다. 이 조명탑 아래가 옛 광산으로 두 곳의 수평굴 입구와 한곳의 수직굴 입구 외에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이 자연 속에 이루는 마을과 이야기들은 슬픈 이야기도 있고, 억울한 사연도 많다. 이런 사건 중에서 경산 코발트 광산은 매우 슬프고 억울한 곳이다. 우리나라 10대 흉가 중 하나로 불리는 ‘안경공장 괴담’의 장소가 이곳과 겹쳐있다. 대부분의 괴담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안경공장 괴담도 결국 코발트 광산의 억울한 진실이 상상 속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결과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학살한 후 은폐했던 곳이다. 보물섬은 이곳이 국가권력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이 있었던 장소이며, 그전 일제 강점기에는 전쟁물자를 위한 일제의 자원 수탈이 행해지고 폐광된 광산이라는 사실과 마주쳤다. 이곳의 다른 이야기를 알아가는 건 마음이 무겁고 아픈 일이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운명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보물섬이 코발트 광산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보물섬의 전시나 프로젝트의 상당수는 코발트 광산을 다루고 있다. 코발트 광산은 제주 4·3이나 광주 5·18, 충북 영동 노근리에 비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코발트 광산의 문제를 전시나 다른 프로젝트로 풀어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확장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민과 함께 코발트 광산 이야기를 문화예술교육으로 시도해 보았다. 다양한 이야기를 위해서 학살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이동하 소설가의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을 활용해서 교육하기도 했으며, 암석 덩어리로부터 코발트를 골라냈던 장소인 선광장을 방문해서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 했다.
전시와 포럼, 문화예술교육으로 의미를 되짚어 본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는 아직도 많은 유해가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다. 경산은 삼성현(三聖賢, 원효‧설총‧일연)의 고장으로 자부하고 있다. 삼성현 중 한 명인 원효대사는 당나라로 유학가던 중 동굴에서 우연히 해골 물을 마신 일을 계기로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어디에서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 내 마음이 문제다”라고 깨달으며 공부하러 가던 길을 돌아섰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경산은 뼈와 관련된 인연이 깊은 곳 같다. ‘어두운 역사’를 상상력을 발휘하여 까슬까슬하며 쌉싸름한 짙은 초콜릿처럼 진한 맛의 문화예술교육을 꿈꿔본다.
  • 코발트 광산 방문
  •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코발트&블루’(2021)
새로운 상황, 새로운 눈, 새로운 방법으로
보물섬 문화예술교육의 전환점은 2021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가족여가 프로그램 ‘유연한 함께살기’의 <홀로가 사라지다>를 하면서부터다. 당시 보물섬의 프로그램 계획안에 대한 멘토들의 의견서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공공사업형 프로그램이다, 타자를 교육하려 하지 말고 함께 탐색하고 성찰하자, 도시재생사업 같다, 당사자들과 연결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보물섬만의 방법으로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보물섬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보물섬 연구원들 간의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일부는 ‘간섭이 심하다’ ‘이건 아닌 것 같다’ ‘20대의 니즈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일부는 이번을 전환의 계기로 삼자는 의견이었다. 조금씩 고쳐서는 불가능하기에 처음부터 다시, 백지에서 시작하자는 의견으로 결론이 났다.
이날 이후의 연구모임은 좌충우돌했으며 기존의 방법에 머무는 연구원과 변화에 적응하려는 연구원 간의 미세한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홀로’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고, 원룸을 빌리고, 울진을 다녀오며, 프로그램을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재구성했다. 이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보물섬의 방향은 유연해지고 좀 더 창의적이고자 노력했다. <홀로가 사라지다>는 보물섬의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중요 변화지점으로 습관적으로 쓰는 단어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사는 동네를 관찰하되 창조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2022년에는 가족여가 프로그램으로 <P씨의 무성영화제작기>와 65세 이상 어르신들과 함께 디지털을 활용한 프로그램 <나 어떡해 엔터테인먼트>를 진행하였다.
보물섬의 문화예술교육은 2019년 경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오감백감(五感百酣)’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은 예술 활동을 조금 변형시켜서 시민과 함께 진행하면 될 거라는 애초의 생각은 안이했다. 문화예술교육은 예술 활동의 응용 분야가 아니라 나름의 특징과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더군다나 보물섬 문화예술교육의 시간은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관성과 습관은 얼마나 무섭고, 버릇은 빨리 정착되기에 모든 새로운 상황에는 새로운 방법이 있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문화예술교육 활동에도 필요하다. 항상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 <홀로가 사라지다>
함께 사는 모든 생명을 위한 쓸모 있는 연구
2020년 1월 코로나19로 인해서 전국은 꽁꽁 얼어붙었다. 활동이 어려웠던 이 시기는 보물섬의 창작활동 전환은 물론 문화예술교육의 방향에 중요한 계기가 된 시간이었다. 이 기간에 보물섬은 디지털 온라인 창작에 적응했고, 환경·생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2020년 <서상동별곡>과 <우주로 보내는 편지 1, 2>는 지역의 가까운 곳에 늘 있었던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고자 노력하며 디지털 매체를 소통과 문화예술창작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생각해 보고자 한 프로그램이었다. <인터스페이스 프로젝트-경산>이라는 온라인 창작물도 이때 만들어졌으며 이후에도 보물섬의 온라인 창작은 이어졌다. 이처럼 코로나19로 대면이 힘들었던 시기에 보물섬은 온라인,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힘들었지만, 대면의 위기가 또 다른 문화예술의 ‘쓸모 있는 도구’를 인식하기 시작한 계기와 기회가 되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영업이 어려웠던 보물섬 옆 카페가 문을 닫고 새로운 주인이 들어왔다. 나간 이가 버린 건지 새로 들어온 이가 버린 건지 모를 식물들이 보물섬 주차장 한편의 화단에 버려지기 시작했다. 모두 상태가 좋지 않거나 생긴 게 잘나 보이지 않았다. 버림받은 식물 식구가 늘어났고 보물섬의 내부가 식물로 상쾌해졌다. 더불어 황무지였던 보물섬 주차장 담장 밑 공간이 텃밭과 작은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길 위의 식물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이웃이며 나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여름에 시들어가는 바깥 식물의 상황이 안타까웠다. 자동으로 물을 줄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있는지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보니 그런 기계를 코딩과 결합해서 연구 중이라고 한다.
보물섬의 위치가 시장 근처라서 그런지 길고양이들도 많이 오고 간다. 개중에는 아예 보물섬에 눌러앉은 고양이도 있다. 보물섬 주변의 길고양이를 관찰하다 보니 비가 오면 사료가 퉁퉁 불고 바람이 불면 먼지가 들어간다. 그래서 보물섬 주변 길고양이의 생활환경에 착안해서 코딩교육과 접목한 <그린코딩: 길냥이 돌봄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대구시 시지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과 함께해본 이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은 길고양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길고양이를 위한 급식대와 장애물 제거 장치를 코딩했다. 흔히 인공지능 로봇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지만, 기계를 다루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기계의 특성과 기계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인문학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면 이 문제는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을 문화예술교육에 활용하는 것을 고심하던 중 버려지는 식물과 길고양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다.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은 경산 시내에서 9km 떨어진 인구 5,3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대구를 오가는 버스가 들어오는 곳이라서 나와 같은 뚜벅이에겐 살만한 주거지역이다. 자인면에서 보물섬까지 버스로 25분 걸리는데 계정숲, 오목천을 지날 때면 등 뒤로 따뜻한 아침 햇살이 비친다. 작은 다리 아래의 물 위로 새 떼가 동동 떠 있다. 아침 버스에는 병원이나 시장가는 어르신과 등교하는 중·고등 학생들, 간혹 직장인이 타고 있다. 같은 시간대에 버스를 타면 인사 나눈 적은 없지만 익숙한 얼굴이 많다. 10분 동안 버스는 좌우로 들판이 펼쳐진 시골의 멋진 풍경의 한가운데를 달린다. 이곳은 복숭아, 포도, 대추나무가 있고 계절마다 새로운 풍경을 선물한다. 지구 위의 모든 곳은 평등하다. 지구, 우주와 나의 관계는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다. 나와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문화예술을 쓸모있는 도구로 곁에 두며 살아가는 건 행복한 일이다.
  • ‘AI, 고향을 춤추게 하라!’ – 캐릭터가 출 춤 연습(왼쪽)과 춤추는 캐릭터
최성규
최성규
시각 예술가이지만 전시기획, 문화예술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독일 유학 이후 소그룹 미술활동에 관심이 많아서 <썬데이페이퍼>를 결성하였고 지금은 경산에서 <보물섬>을 운영하고 있다. 소도시에서 활동하면서 어느 곳에서나 문화예술을 매개로 창의적인 인생과 활동이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창조적이며 미학적인 삶이 일상을 통해서 추구되기를 소망한다.
mandol109@naver.com
사진·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제공_미술중심공간 보물섬 @gyungsan_bomuls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