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도서관에서 환경 수업이 끝나고 어린이들이 두고 간 그림을 봤다. 그림 속에는 뻘뻘 땀을 흘리는 지구, 활활 타오르는 지구,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지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북극곰과 꿀벌도 빠지지 않았다. 중간 중간에 구름 그림과 그 속에 CO2, 오존층, 탄소중립 같은 글자를 쓴 것도 보였다. 그림들을 보니 기후위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수업 후기로 그린 것 같았다. 기후위기에 대한 전형적인 표상들이 여지없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구야 미안해’, ‘기후야 미안해’라는 글귀를 볼 때는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아니, 왜? 어린이들이 왜? 앞선 인류가 망가뜨려 놓은 지구에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여러분이, 왜 죄책감을 짊어지고 인류를 대표해서 사과해야 하나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림에서 드러나는 어린이들의 마음은, 불안, 공포, 죄책감, 그런 것. 또 다른 한편으론 그림들이 다 천편일률적으로 비슷비슷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어릴 때 숙제로 그려내던 반공 포스터나 각종 계몽 포스터처럼 강요된 당위나 의무 같은 느낌. ‘무찌르자 공산당’이 ‘막아내자 기후위기’로 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밖에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수 없는 걸까?
사실 이런 상황은 어디서나 비슷하게 펼쳐진다. 왜 그럴까? 기후위기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 대부분 과학과 경제학의 언어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탄소라는 물질이 있다. 기후환경 교육을 받은 어린이들에게 기후위기의 원인을 물어보면 대부분 ‘탄소’ 혹은 ‘온실가스’를 지목한다. ‘화석연료’나 ‘화력발전소’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어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인은 이산화탄소고, 결과는 지구온난화다. 빙하가 녹고, 봄이 없어지고, 꽃이 동시에 피고, 너무 추웠다가 너무 더웠다가 하는 것은 모두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기후위기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층위의 역사, 사회, 정치적 문제를 모두 탄소 문제로 환원시킨다.
원인이 탄소와 온도로 정리되면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도 탄소와 온도의 문제로 집중되는데, 이 프레임을 벗어나기가 참 힘들다. 과학적 상상력은 탄소를 포집해서 땅속에 묻고, 우주로 보내고, 탄소를 흡수할 수 있는 흡수원–대표적으로 숲–을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온도를 낮추기 위해 성층권에 먼지를 뿌리거나 바다의 탄소 흡수력을 높이기 위해 철분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논에서 메탄이 발생하니 논물을 빼거나, 소의 트림과 방귀에서 나오는 메탄을 저감시키기 위해 해조류를 사료로 먹이거나 하는 등의 기상천외한 대안을 만들어 낸다. 지하 농업이나 컨테이너 농업 등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기술농업을 농업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하고, 심지어 달이나 화성 개발 등 우주 개발 프로젝트도 지구가 영 못 살 곳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추진 중이다. 기술주의적 대안과 시장주의적 대안들은 쉽게 결합한다. 경제적 상상력은 탄소를 돈으로 변신시킨다. 탄소세나 탄소배출권 거래제 같은 제도를 발명하여 탄소에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부과하고, 탄소 크레딧처럼 교환과 거래가 가능한 신용상품으로 전환되는 등 탄소가 ‘음의 자원’으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계급의 상상력이기도 하다. 여기에 시적 상상력과 정치적 상상력은 자라날 틈이 없다.
이런 기후위기 대응 방안 중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개입하여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실천뿐이다. ‘탄소중립’은 너무 큰 목표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개인들에게 남는 것은 대부분 에코백, 텀블러, 플라스틱 제로, 옷 안 사기, 고기 안 먹기, 대중교통 이용, 쓰레기 줄이기, 물 절약, 전기 절약 같은 환경운동의 오랜 실천론이다. 전기자동차로 차량 교체, 비행기 덜 타기, 해외여행 줄이기 같은 대안에는 실천에서조차 구매력의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그대로 반영된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탄소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지만 우리가 탄소를 감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과 경제학의 언어로 표상되는 탄소는 매우 추상적이고 수량화된 형태로 제시된다. 지구 온도 1.5도는 우리의 체감 영역을 벗어난다. 지구 전체의 탄소량을 놓고 뺄셈과 덧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 지구적 탄소중립은 계산에 의해서 가능할 뿐,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목표다. 그래서 국가 단위, 지자체 단위로 분할해서 탄소중립 목표를 설정하는데 이는 북반구와 남반구, 도시와 시골, 부자와 빈자 간의 탄소 불평등과 배출의 역사적 정치적 책임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감각할 수 없고 쉽게 이해되지도 실천할 수도 없는 목표 앞에서 사람들은 자포자기해 버리거나, 수많은 숫자와 도표들, 전문용어의 범람 속에서 길을 잃고 ‘이것은 전문가의 영역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전문가들이 만들어 낸 ‘탄소중립’ 용어가 절대 목표처럼 되어 그것이 불의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하게 된 것이 그 증거다. 이는 ‘기후-테크노크라시’라는 또 다른 정치적 위기를 야기한다. 위기관리를 독점하는 기술-자본의 과두 지배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위협이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기후위기 강의와 워크숍을 예술가들과 몇 차례 진행한 적이 있다. 매번 그런 물음이 돌아왔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고백하자고 말하곤 한다. 사실 인문학자인 나에게도 지금 같은 시대에 인문학이 가능한지,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지가 존재의 고민이다. 인문학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하고 무용한 학문으로 취급받는 시대, 생존가능성도 지속가능성도 희박해지고 있는 인문학자는 그 자신이 ‘멸종위기종’이다. 예술가도 비슷한 처지다. 이산화탄소와 지구온난화 사이의 관계를 밝혀낸 것은 과학자들의 중대한 기여지만, 과학의 언어가 가진 한계도 명확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금과 같은 문명적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근대 서구 문명의 합리주의와 과학기술주의를 오히려 강화한다. 여기에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고 위기에 대한 다른 감각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지금 예술과 정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후위기 강의에서 만났던 한 초등학교 국어 교사가 했던 이야기를 나는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 선생님은 처음에 기후 교육을 할 때는 ‘지구과학’ 이론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을 이해하고 거기서 얻은 과학적 지식들을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그런 과학적 설명이 가진 한계나 위험을 곧 깨달았고 지금은 신화나 구전설화, 동화 같은 것을 많이 읽어준다고 하였다. 그 속에서 위기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를 읽고 간직했다가, 나중에 그런 순간이 오면 이야기를 떠올리며 영감과 용기와 지혜를 얻었으면 해서. 어쩌면 이 이야기 속에서 전 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는 문화예술교육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신 씨앗 선생님은 매번 흙과 씨앗의 신비에 경탄하며 반드시 싹이 튼다는 믿음을 심어주셨다. 돌보는 이에게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운다는 그 믿음을 나는 ‘교육학적 희망’이라 부른다.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에서 나는 방조제 공사로 다 망가지고, 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갯벌이 바다 물길이 열리자 스스로 조금씩 살아나는 기적 같은 모습을 보았다. 죽음의 갯벌은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생태학적 희망’을 본다. 어쩌면 그것은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 자란다’고 했던 시인(프리드리히 휠덜린)의 시적 상상력에 대한 응답이었다. 구원자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도 지구의 데모스(demos, 민중)들은 어디서든 안간힘을 다해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씨앗은 반드시 싹이 트고, 죽은 땅도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측이 아니라 희망이며, 계획에 대한 실행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책임이다.
채효정
채효정
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직강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연구, 강의, 교육, 농사를 지으며 강원도 인제에서 살고 있다. 경향신문 정동칼럼, 월간 워커스에 ‘워커스 사전’을 연재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기후정의선언 2021』(공저) 등이 있다. 노동, 생태, 정치, 교육을 연결하는 담론과 실천을 고민한다. 현재 기후정의동맹에서 활동하며 열심히 기후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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