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어 쓰기를 시작한 이유
작년부터 나는 강의실에서 대학생들과 평어를 쓰고 있다. 『예의 있는 반말』(이성민 외, 텍스트프레스, 2021)이라는 책을 읽고, 왠지 모르게 따라 해 보고 싶었다. 학생들과의 반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말끝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강의실이 달라졌다. 모두 조금 들떠 있었고 주고받는 얘기도 날쌔졌다. 평어의 원리는 간단하다. 어떠한 호칭도 쓰지 않고 (성을 뺀) 이름만으로 서로를 부르고 반말로 대화한다. 학생들은 나를 ‘진해’라고 부른다. ‘반말’이라는 기존의 말하기 방식과 ‘이름 호칭’이라는 새로운 호명 방식이 묘한 긴장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선물한다.
배움은 ‘스며듦’이다.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앎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모험’이다. 존댓말 쓰기는 서로 예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듯이 지식을 주고받는 상거래 관계에 머문다(다른 사회적 관계도 엇비슷하다). 평어는 말하기의 방식(틀, 프레임)을 바꿈으로써 선생과 학생을 평등하고 친밀한 관계로 재조립한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말에서 시작하고 말로 표출된다. 존비법 체계의 본질적 문제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 유무에 있지 않다. 상대를 높이거나 낮추지 않고서는 한마디도 뻥끗하지 못한다는 ‘무조건성’이 문제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상대를 높일지 낮출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권력적 위계는 언어적 위계로 반영되고, 언어적 위계는 개인의 생각과 태도를 좌우한다. 평어 쓰기는 이런 권력적 위계를 평평하게 만들어 ‘친밀감’을 관계의 중심에 위치시키려는 새로운 한국어다.
약간의 철학적 의미
나는 그저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바꿀 힘이 있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육체(몸뚱아리)의 변화. 즉, 말을 바꾸거나 바꾸어야겠다고 마음먹기만 해도 그 순간부터 육체가 바뀐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형식은 중요하다. 형식이 바뀌면 육체가 바뀐다. 공간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당이나 절처럼 ‘구분되는’ 공간에 가는 이유는, 형식이 주는 힘 때문이다.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면, 일상과 다른 무게의 공기, 사물의 고유한 배치, 이질적 고요함을 감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공간은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변함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경삼아 성당에 간 사람은 높이 솟은 건물 천장이나 벽에 그려진 성화를 올려다볼 뿐이다. 그 공간에 들어간 사람이 가져야 할 합당한 행동이 따라야 그 공간 고유의 의미가 드러난다.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면 그에 걸맞은 몸으로 변모해야 한다.
평어 쓰기라는 새로운 말하기 공간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깟 평어가 어떻게 모든 인간관계를 하루아침에 상호 존중의 관계로 변모시키겠는가. 실제로 평어는 쉽게 반말로 곤두박질칠 수 있다. 결국은 ‘누가’ 쓰느냐가 중요하다. 그 공간에 들어간 사람이 신체적으로 상대를 실감하고 거기에 맞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섬세하게 상대를 의식하는 몸뚱아리가 필요하다. 아기가 아무 거리낌 없이 이 세계에 다가가듯이, 여행자가 낯선 이국땅의 골목을 호기심 어리게 돌아다니듯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내뱉는 말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듯이, 말을 바꾸면 내 마음이 타인을 향해 열린다. 개방성은 마음이 넓다는 게 아니라, 우발성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예측 불가능성을 기대하고 만끽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를 확인하는 ‘너’
관계는 법과 제도로 규정될 수 없다. ‘나’와 ‘너’라는 실존적 관계에 기대지 않고 제도나 규칙, 또는 명령으로 권리나 상호 존중감을 실현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어떨 때는 정의로워야 하고, 어떨 때는 자비로워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원칙을 강하게 얘기해야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야 한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법으로? 매뉴얼로? 행동강령으로? 급훈으로? 예쁘게 말하면 포인트나 커피 쿠폰을 주고, 험하게 말하면 벌점을 주는 걸로? (욕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언어인 경우도 있는데?)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공간은 인간‘들’이 뱉어내는 무수한 말과 행동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산물이다. 이 공간은 고정적이지 않고 계획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순간순간 타인(너)의 말을 듣고 거기에 ‘내’가 반응하면서 직조된다. 순간순간에 대한 몰입이야말로 ‘어떻게 말할까?’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예술이 인간다움의 핵심인 것도 예술이야말로 천변만화하는 순간성에 대한 집중, 그리고 그 순간성을 포착하려고 하는 몸을 만드는 수련의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화는 몸에서 나온다. 몸이 바뀌면 말도 바뀐다. 타인에게 더 가까이 가라. 말에 대한 감수성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인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험을 반복해야만 길러진다. 절반의 실패를 각오하는 모험이다.
김진해
김진해
국어학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학교에서 실천교육센터 센터장과 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으며, 평화의 무술 합기도(Aikido)를 수련하면서 [한겨레신문]에 매주 <말글살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말끝이 당신이다』를 비롯하여,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26가지 키워드로 다시 읽는 김수영』(공저), 『한국어의 규범성과 다양성』(공저), 『촛불항쟁과 새로운 민주공화국』(공저) 등을 펴냈다.
jinhae@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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