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간의 캘빈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게리 D. 슈미트 교수는 150년 된 한 농장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대학교에서 강의하는 틈틈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정원에 꽃을 심고 날마다 자라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돌보면서 동화를 쓴다. 그의 작품 가운데 뉴베리(Newbery)를 수상한 『수요일의 전쟁』은 어린이가 예술을 통해서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돕는 조력자로서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이 책은 1967년 가을부터 1968년 여름까지 미국의 한 학교가 배경이다. 베트남 전쟁, 68년 학생운동, 히피, 마틴 루터 킹, 케네디 등이 나오는 방대한 서사다. 예술과 어린이, 교육의 역할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작품을 언급한 이유는 주인공 어린이가 자신의 가능성과 세계의 다양한 면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쓰이는 중요한 매개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수요일마다 만나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잘 읽히는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어린이가 읽기에는 두께가 제법 두툼해 보이는 이 동화책에는 다양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등장한다.
주인공 홀링 후드후드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특별한 방과 후 수업을 받는다. 원래 이 학교의 학생들은 수요일마다 학교 바깥에 있는 종교 기관에 찾아가서 종교와 관련된 개인 체험활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홀링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파의 종교기관이 없어서 홀로 학교에 남아 베이커 선생이 진행하는 방과 후 특별 수업을 듣는다. 베이커 선생과 단둘이 진행되는 방과 후 교실의 주제는 곰팡이와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원전으로 읽고 그 예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홀링은 자신도 어른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른들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베이커 선생이 자기를 미워하고 있고 단둘이 수요일 방과 후에 남는 상황을 너무나 싫어했기 때문에 일부러 어렵고 딱딱한 셰익스피어 읽기를 제안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견고한 저항의 자세를 갖추고 수업에 들어온 홀링에게 베이커 선생은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책 속에서 만난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홀링 스스로 얻는다. 베이커 선생이 곁에서 하는 일은 어린이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한 단계 더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중간 지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홀링은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나서 샤일록이 진짜 악당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샤일록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미리 정해버렸고 샤일록은 그 올가미에 꼼짝없이 갇혀 버렸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베이커 선생은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비극이라고 딱 한 마디만 거든다. 이 장면은 홀링이 편견이 왜 옳지 않으며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의 가능성을 제한해버리는지 깨닫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자신도 알게 모르게 행동을 제한하는 여러 편견에 둘러싸여서 자유롭게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고 자라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베이커 선생은 홀링에게 고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가르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전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 예술을 교육한다는 것은 이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고 재미도 없다며 강경하게 맞서던 홀링은 점차 변화해간다. 좋아하던 여학생과 헤어지고 슬픔에 빠진 홀링에게 베이커 선생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권하고 그는 “아예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죽음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독후감을 내놓는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두 가지를 한꺼번에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로미오는 몬테규 가문과 줄리엣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베이커 선생님은 이런 홀링의 계속되는 질문의 과정을 존중하면서 한 번 더 독후감을 적어보라고 차근차근 권한다. 그리고 홀링은 마침내 이런 물음에 다다른다. “만약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로미오와 줄리엣은 살아있었겠지만, 그 만남이 없는 살아있음은 무슨 의미가 있나요?”라고.
홀링은 셰익스피어 방과 후 수업을 하면서 예술을 통해 분노를 표출하는 법도 배운다. 치솟는 화를 어찌하지 못하는 홀링에게 베이커 선생은 『템페스트』를 권하고 그 작품에 나오는 욕설은 큰 도움이 된다. ‘두꺼비, 딱정벌레, 박쥐, 불벼락 맞을 놈! 지저분한 늪에서 나온, 우리 어머니가 까마귀 깃털로 빗질을 해 준 사악한 아침 이슬이 너에게 떨어지리라’라는 길고 긴 욕설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홀링은 멀게만 느껴졌던 예술가 셰익스피어가 자신과 비슷한 분노에 찬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인생에는 이런 분출의 통쾌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차차 알아나가게 된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던 베이커 선생도 실은 터뜨리고 싶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족의 고통으로 인해 깊은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베이커 선생은 한 사람의 어른이 어린이에게 예술적 경험을 전달하는 과정이란 얼마나 수평적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예술의 어려움과 절망까지도 이해하는 조력자로서 홀링 곁에 선다. 홀링은 수요일마다 겪은 방과 후 수업을 바탕으로 드디어 요정 아리엘 역을 맡아 연극 무대에 서게 된다. 하얀색 깃털이 달린 분홍 타이즈를 입은 난감한 복장이었지만 그는 친구들 앞에서 진지하게 공연을 하고 베이커 선생은 그런 홀링을 격려한다. 그럼에도 상황은 더욱 난처해진다. 공연 직후에 홀링이 평생 영웅으로 흠모해온 야구선수 미키 맨틀의 사인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홀링은 무대의상을 입은 채 그의 사인을 받으려고 달려가지만, 미키 맨틀은 분홍 타이즈를 입은 남자 어린이에게는 사인을 해주지 않겠다고 돌아서서 가버린다. 어린이가 우상의 편견을 목격하고 아픔을 겪는 동안 베이커 선생은 묵묵히 함께 등을 토닥여준다.
어린이와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그들과 나란히 서는 것이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섣부르게 강권하지 않는 것이다. 홀링과 베이커 선생의 수요일 방과 후 수업은 좋은 모델이 된다. 문화예술교육의 힘은 어린이에게 예술 앞에서 우리는 모두 존엄하며 모두 동등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에게도 그런 예술적 경험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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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교수.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지은 책으로는 『어린이 세 번째 사람』 『거짓말하는 어른』, 함께 지은 책으로는 『이토록 어여쁜 그림책』, 옮긴 책으로는 『쿵쿵이와 나』 『너무너무 무서울 때 읽는 책』 등이 있다.
aldo211@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