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하철 안에서 피어나는 자연의 춤꾼 – 아이와 극장에 가다


 

말랑말랑한 아이들의 몸은 타고난 춤꾼처럼 세상을 받아들여 몸짓으로 표현해낸다 ‘자연스럽게’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던 어느 저녁의 기록.

우리는 지하철 의자에 앉지 못하고 철제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우리의 아이는 사람들 가득한 복도로 나아가 춤을 추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리듬에 용케 쓰러지지 않고 아이는 까르르거리며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쳐다보았고, 가끔 우리에게도 눈길을 던졌다. 우리는 잠시 우쭐했지만, 아이는 제멋에 겨워 마냥 춤을 출 뿐이었다. 밤 9시 4호선의 전철에 쇼타임이 도래한 것이다.

아이의 자연스런 춤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타고난 춤꾼임을 느낀다. 호모 댄스쿠스. 천상 춤꾼으로 태어났지만, 이 세상은 춤을 추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춤실력을 잃어가면서 사람은 사람이란 이름을 얻나 보다. 날아가는 새의 노래를 알아듣고, 아침에 돋아난 새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가 어느새 쫑긋하는 귀의 움직임을 잃어버리듯이. 한가지 일을 잘하면서 몸이 뻣뻣해져 가듯이.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하지만, 그것에 완전 굴복하는 것은 아닌가. 아이의 춤은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저 혼자 즐겁다. 그 무엇에도 기대고 있지 않아 즐겁다. 단지 아이가 자신의 여린 몸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 따를 뿐이다. 우리는 기둥에 기대고 서서 팔짱을 풀지 않고 하염없이 우리의 아이가 추는 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도 더 이상 출 수 없는 춤을.

우리는 난생 처음 함께 극장을 찾았다가 함께 돌아가는 길이었다. 극장에는 항상 나 혼자 가곤 했다.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 되었을 때, 극장 나들이는 곤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찾아 끄적여야 할 것 같았고, 다른 이들보다 더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할 것만 같았다. 객석에 앉아서 글을 쓰는 마음으로 공연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역인가. 순수한 관객은 더 이상 될 수 없다는 것이 슬픔이 될 때가 있다. 그런 슬픔이 지긋해질 때면, 이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닐까. 나는 아직 그런 일을 바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돌아보면, 우리가 함께 극장에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실감한다. 더구나 우리 사이에 아이를 끼고 본다는 것. 아무나 누리기 힘든 일이리라.

 

소설 <위대한 개츠비>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남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이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네가 누리는 특권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좋지 않은 작품 앞에서 곧잘 발끈하는 나에게 이 충고가 가끔 떠오르곤 한다. 겸손하지 않을 때, 나는 극장에 가는 것이 일종의 특권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이의 춤을 보고 있으니, 아이의 몸 자체가 극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자기 한 몸을 살아있는 극장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을 천천히 상실해가는 것이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눈 앞에서 추는 아이의 춤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심지어 극장 안에서도 아이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신발을 신겨달라고 졸랐다. 신발을 신고 객석의 복도로 나가서 춤을 추겠다고 떼를 쓴 것이다. 우리는 말렸지만, 아이는 듣지 않았다. 행여 무대로 달려나가면 어떡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수줍어하며 객석 뒤쪽으로 돌아다니면서 어깨춤을 추었다. 우리는 무대의 퍼포먼스에 흠뻑 빠져 있으면서도 가끔 정신을 차려 아이의 행방을 찾아 눈길을 뒤로 돌리곤 했다. 어디선가 의자 너머로 삐죽 나온 머리칼이 보이고, 그 머리칼조차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빙긋 웃곤 했다.

우리가 찾은 극장은 정동의 문화일보홀이었다. 문화일보 뒤꼍에 있는 이 극장에서는 퍼포먼스 <위트 앤 비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즉 위트도 있고, 비트도 있는 음악 퍼포먼스. 위트는 한 시각장애 소년이 라디오의 음악에 귀를 기울일 때, 그의 상상력이 고스란히 무대로 옮겨지면서 발생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지나치는 플라스틱 통, 나무 계단, 자동차 바퀴, 환풍기 날개를 두드리며 재기발랄하게 소리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트는 그 소리의 발견을 다시 음악의 발견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있는 울림의 음악으로 전환하는 연주가 사뭇 경쾌했다.

객석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5세 이상의 아이라면, 누구나 환영이라는 문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이가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다는 공연은 얼마나 뭉클한가. 이제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공연도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화내지 않는다는 미덕은 아이에게 정말 좋은 것이다. 아이들은 눈앞에서 형광빛으로 펼쳐지는 어둠 속의 수화도 좋아하고, 별 것 아닌 몸짓 하나에도 까르르거렸다. 해골 문양을 그린 옷을 입고 추는 춤에는 일제히 ‘하…’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_-; 같은 인터넷 이모티콘을 흉내 내는 개그 퍼포먼스에 폭소를 터뜨린 것은 아이들만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뭇 아이들 속에서 우리 아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감탄하는 능력, 그리고 표현하는 능력은 아이들에게 공통적이다. 마치 어린왕자가 지구별로 여행 왔을 때, 자신의 별 B612에 두고‘온 꽃이 흔하디흔한 장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잠시 멍해졌던 기분과 흡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어린왕자는 자신에게 성가실 정도로 사랑의 실천을 요구했던 장미가 지구별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장미보다 훨씬 더 개성 있고 특별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것이 자신의 아이를 뒤쫓는 우리들의 눈길에도 깃들어 있던 마음일지 모른다. 아이는 어느새 우리에게 돌아와 무릎 위로 답싹 올라선다.

이윽고 <위트 앤 비트>의 시각장애 소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색깔을 싫어하고 조각상을 싫어하고 미술을 싫어한다고. ‘만지지 마시오’가 가장 싫다고 말한다. 그러자 무대는 실은 소년이 애타게 갈구하는 그 감각들을 맛보게 도와준다. 빨간 우산을 음악으로 번역해서 연주하고, 만져볼 수 있게 살아있는 조각상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자리. 그물처럼 촘촘하게 자리 잡은 별자리를 무대 가득 그린다. 실제의 별빛보다 훨씬 더 초라한 별빛이지만, 소년은 그 별빛 속에서 가만히 접촉한 것처럼 활기찬 웃음을 터뜨린다.

그 별자리를 보고 있으니, 언제나 내가 무대에 일찍 갈 때면 마주 보는 광경이 떠올랐다. 어둠의 빈 공간에는 야광 테이프가 X자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그것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지만 오롯하게 빛나곤 한다. 나는 그 야광의 지점들을 보면서 저 지점들이 어떻게 연결될까, 어떻게 연결되면 멋진 공연이 될까를 상상하곤 한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 가상의 선을 그어서 별자리를 만들고 그 별자리마다 신화와 전설을 꾸몄던 옛사람들의 감각을 엿보듯이. 실제로 우리가 보는 밤하늘에는 따로따로 떨어진 별들만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그 별들 사이에 선을 긋고 이야기를 상기하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별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 이야기 역시 천천히 회전한다. 밤하늘조차도 하나의 무대라는 듯이.

그래서 나는 그 야광 테이프로 점찍어둔 지점들이 어떤 동선의 춤으로 이어질지를 상상하는 것인데, 그 상상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상상은 아이의 춤처럼 마냥 자유롭고 쿨하게 무책임한 것이지만, 무대의 공연은 무겁게 그런 낭만주의를 벗어난다. 별자리를 만드는 것에 실패한다. 그럴 때마다 영문 모를 아픔이 쿡쿡 찌르기도 하고,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물론 이조차도 항상 있는 일은 아니다.

언젠가 무대미술가 윤정섭씨는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무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무대를 무서워해요. 막상 극장에 가서도 무대를 마주 보지 않고, 도면을 달라고 해서 봐요. 무대는 어마어마한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깊이 속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대는 깊이로 사람을 억압하지 않아요. 오히려 해방감을 주지요. 무대는 깊지만, 그 깊이는 아이들 놀이터의 속성이에요.”

다행히도 <위트 앤 비트>는 진정한 놀이 정신이 가득한 무대였다. 컵과 실로 연결한 소박한 장난감 전화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애틋했다. 그리고 그 전화의 실을 문지르면, 매우 구슬픈 음색이 흘러나와 아이들을 진정시켜줬다. 세상은 놀이터인 것이 분명하지만, 주위를 살피고 돌아봐야 하는 놀이터야, 라고 가만히 속삭이듯이. 나만 좋으면 좋다는 생각이 우리 시대의 가족주의를 감싸고 있지만, 무대는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진실을 일깨웠다. 장난감 전화의 끝에는 민감한 핀마이크가 달려 있어서 아주 작은 진실의 흔들림에도 구슬픈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마치 소년이 앞을 못 보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그리고 상상력이 아무리 풍부해도 그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음악과 퍼포먼스가 가득한 무대는 암울한 분위기 대신에 별밭을 우러르는 밤하늘처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공연의 영향이 너무 컸던 탓일까. 지하철 안에서 아이가 벌이던 즉석 공연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이미 자기 몸속에서 출렁거리기 시작한 리듬의 발동을 이기지 못한 아이는 뻗쳐오르는 기운을 따라 제멋대로 나아갔다. 아이는 “오빠, 오빠빠빠빠…” 라고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순간, 우리는 아연실색했다. 아내는 말했다. “어서 잡아와요.” 나는 재빨리 뛰어갔지만,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다. 그리고 저만치에서 돌아서서 “터질라에요, 터질라.” 라고 고함쳤다. 아이는 4세나 되었음에도 여전히 모유를 먹고 밥을 먹는다. 그 덕분인지 우리 귀에는 쩌렁쩌렁할 정도로 지하철을 울리는 소리였다.

TV 체험은 마른 스펀지가 잉크를 빨아들이듯 아이의 가슴에 들이붓는 체험이다. 우리는 아이가 오늘 극장의 첫 경험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결국 TV 체험을 들쑤셔놓은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자연스런 마음으로 자라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하지만 이미 콘크리트 숲과 아스팔트 길 위에서 아이가 맛보는 자연심은 인위적 환경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한 뼘의 무른 흙도 밟기 힘들 정도인 이 서울에서 아이가 접하는 것은 눈앞의 네모난 상자이고, 주사선을 타고 발사되는 빛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CF의 외마디 카피거나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이다. <위트 앤 비트>는 그렇게 미디어에 의해 조절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살가운 음악을 창조하고 유희의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자연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흡수력이 좋은 잠재적 신체를 가진 아이들, 그 아이들은 그저 빨아들일 뿐이다. 우리는 아이의 가슴을 꽉 채웠던 것들이 지하철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지켜보며, 아프게 깨달았다. “이제 TV 보는 시간을 좀 줄여야겠어.”

무대가 자연으로 나아가기를, 밤하늘을 우러르기를, 집 안에서는 휴대전화를 꺼놓기를 권한다. 시간의 속도가 마치 산 속을 달려가는 호랑이 등짝 위에 올라탄 것 같은 현기증일 때,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을 권한다. 그런 권유와 함께 <위트 앤 비트>는 유년의 녹색이 없는 이들에게 상상력 놀이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눈이 없으면, 귀를 쫑긋 세우고 손으로 섬세하게 더듬으면 감각은 생생해진다는 것. 시각이 비대해질수록 상상력이 무뎌지는 우리의 시대적 기후를 진단하며, 귀를 기울이는 낮은 자세와 촉지하는 손가락의 온기를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