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방학이다 방학이란 학업을 조금 쉬어도 좋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학이면 더 바빠진다. 물론 교사에게도 방학은 그저 놀아도 좋은 방학이 아니다. 때론 새벽 6시 반부터 버스를 대절해 타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3군데나 다니면서 하루 종일 전시 관람의 경험을 빼곡하게 쌓아야 하는 벅찬 일이 생기기도 한다. 강원도 양구지역 미술교사 교과연구모임 교사들은 왜 꼭두새벽부터 서울로 달려와 미술관 순례를 하는 것일까?
강원도 양구에는 박수근미술관이 있다. 작년 학교-지역사회 연계 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으로 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양구중학교 및 양구여자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벽화그리기와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던 곳. 올 여름 집중 호우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복구 작업을 서둘러 하반기에는 좀 더 많은 학교들과 프로그램을 재개하려는 중이다.‘미술관’이 학교 미술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의 땅과 함께 숨 쉬는 박수근 미술관
먼저 미술관의 이야기를 해 보자. 박수근미술관의 하수봉 학예연구사는 “미술관은 그 지역의 땅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말한다. 선문답 같은 이 말은 박수근미술관이 양구지역의 미술교육을 위해 벌이는 사업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밑바탕이 되는 말이다. 그리고 지역의 문화 시설로서 미술관이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모색해야 하는지를 응축한 말이기도 하다. 박수근미술관에 오는 양구 시민들 중에는 박수근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숙제나 수행평가 때문에 오는 학생들도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 미술관을 찾은 계기가 무엇이든, 그들이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이해하게 되면서 미술관에 가는 일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미술관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하수봉 학예사는 “마치 연애할 때 어떻게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어떻게 학생들이 미술을 좋아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학교 연계 프로그램을 구상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상을 통해 시작된 프로그램이 2005년에 진행된 벽화그리기와 애니메이션 제작이었다.
박수근미술관 전경
“작년의 프로그램은 이벤트성이 강한 것이었다. 올해의 사업을 준비하면서 작년처럼 한 번 해보고 끝나는 것이면 아예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 것은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고 지역의 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올해 프로그램을 구체화하면서 지금 가장 역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로그램의 지속성이다. 예를 들어 2,3년 동안 지속되는 프로그램으로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그 다음 후배들을 교육하는데 조교로 투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고 가능하면 동아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박수근미술관이 미술교사모임의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서울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하루에 둘러보는 강행군의 일정을 주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생들이 조교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미술교사들이 조교로 결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한다. 작년도의 시행 과정과 결과를 평가하면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못지않게 교사 계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 미술관의 학교 연계 프로그램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미술교사들의 역할이다.
박수근 미술관으로 인해 달라진 것들
2005년에 진행된 벽화그리기와 애니메이션 제작은 비록 외부 이벤트성이 강한 프로그램이었다고는 하나 학생들에게 실제로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학생들의 표현력이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글로써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형태로서 전달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는 것 같다. 미술 시간에 그림으로 편지를 쓰게 하는데, 미술 작품을 많이 감상해 본 아이들이 옛날에 전시장 한번 못 가본 아이들에 비해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이것은 그림에 재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양구여자중학교 유금희 교사의 이야기다. 자신이 직접 찍고 편집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을 상영할 때는 너무 감명 깊어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양구중학교의 최은숙 교사도 그 순간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한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다. 다른 지역의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밖의 미술관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다. 아이들이 미술관에서의 미술 수업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모두 다르다. 몇 명은 다리 아프고 수업 안 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보면 다른 지역의 아이들과 감성적인 측면의 발전이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교사들이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미술관에 가서 한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처음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다녀와서 아이들이 너무 행복해하고 좋아했고 그 얘기가 교장선생님에게 전달되니까 인정을 해주시더라. 박수근미술관과 연계가 되는 것이라 더 신뢰를 하는 것 같고, 지속적으로 연계 사업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아무래도 일개 교사가 고민을 풀어나가기 힘든 부분이 많은데, 미술관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유금희 교사는 미술관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드러낸다. 최은숙 교사도 “교사들도 끊임없이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미술관에서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며 교사들의 자기 계발 욕구를 피력했다. 서울의 미술관을 순례하는 교사연수 일정은, 이처럼 교사들의 요구와 미술관의 의도가 만나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양구지역 미술교사모임과 박수근미술관
7월 25일, 새벽에 양구를 출발하여 오전에 서울에 도착한 후 예술의 전당에서 인상파 거장들의 전시를 보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동하여 북한에서 온 유산 특별전을 관람한다. 그리고 다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동하여 피카소 특별전을 감상하는, 만만치 않은 일정. 양구지역 미술교사모임의 26명의 교사들과 박수근미술관의 학예사 2명, 그리고 방산 자기박물관 학예사 1명이 동행한 교사 연수 일정이었다.
교사연수에 참가한 양구지역 미술교사들
작년에는 두 개 학교가 미술관의 학교 연계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올해는 참여 규모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26명의 교사가 단지 올해의 연계 프로그램 때문에 이날의 연수에 참석한 것은 아니다. 이벤트성의 문화예술교육을 지양하겠다는 의지대로, 양구 지역의 미술교사모임과 박수근미술관의 관계는 일상적으로 긴밀했다. 바로 이 점이 미술관측과 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양구 지역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한 달에 한번 열리는 교사모임에 미술관에서도 매번 참여하고 있으며,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느끼는 미술 교육의 현주소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눈다. 미술관이 기획하는 프로그램에는 교사들이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양구지역의 미술교사모임에서는 전공에 따라 서로서로 교육하는 방식을 예전부터 도입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공예, 회화, 혹은 미술치료 등 교사들이 각자 전공 분야에 따라 비전공자들에게 간단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미술관의 교사 연수 프로그램은 이런 기본적인 틀에 전문성과 협력 시스템을 가미하여 만들어졌다. 더구나 박수근미술관뿐만 아니라 부근의 방산 자기박물관과 선사박물관에서도 올해 사업에 동참하기로 합의하고 이번 교사연수에 동행했다. 양구 지역의 미술 교사들과 박수근미술관, 그리고 지역 미술인들의 네트워크가 생긴 것은 지난해 시범 사업의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 네트워크에 대한 여러 기대들
“향후 모든 프로그램을 사업 당사자들 간에 연결 고리를 계속 만들어나가는 측면에 주력할 것이다. 우선 방산자기박물관과 선사박물관 등의 지역 문화시설이 잘 묶이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도 연속성을 가지게끔 하는 것이 중점 내용이다.” 박수근미술관 하수봉 학예사의 이야기다. 이 말은 양구 지역의 학교-지역사회연계 문화예술교육의 가장 큰 특징을 대변한다. 프로그램 내용상의 변화나 다양화보다는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지역 내에서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방향을 중시하는 것. 따라서 작년에 했던 벽화 그리기와 애니메이션을 올해 변함없이 시행한다고 해서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양구 지역의 이런 네트워크는 비단 미술교사들과 미술관 및 박물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역의 교육청과 지역 문화원은 앞으로 문화예술교육의 전망을 공유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 또 다른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미술관과 미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문화원과 교육청이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재 박수근미술관의 프로그램에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예술교육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 각 주체들 간의 이해가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일상화된 네트워크는 바로 이러한 이해의 차이를 조정해 줄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미술교과는 국영수에 비해 비중이 매우 작다. 그래서 미술교과의 교육적 효과에 비해 소홀한 취급을 받기 쉽다. 미술과목은 다른 과목보다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활동이 많은데, 수업 시간에 뭔가를 좀 해보려고 하면 항상 시간이 부족하기 일쑤다. 그러나 미술교육은 아이들의 감수성과 창의력을 키움으로써 모든 교육의 기초가 되는 바탕을 형성해준다. 말하자면 수능 공부를 열심히 잘 하기 위해서라도 미술교육이 더 필요한 것이다. 단, 관성적으로 진행되던 미술 교육이 아니라 미술 교사들의 현재 고민과 외부 문화 시설의 교육적 마인드가 결합해서 시도되는 미술 교육 말이다.
지난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
수학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던 한 학생이 수학 교사에게 물었단다. “전 수학과에도 가지 않을 것이고, 경제학과에도 가지 않을 것이고, 공대에도 가지 않을 것인데, 왜 삼각함수와 미적분을 배워야 하나요? 시장에 가서 계산만 할 줄 알면 사는데 불편 없을 텐데요.” 그러자 “삼각함수와 미적분이 시장에서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너에게 논리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에 공부해야 한다.”고 수학 교사는 답했다.
“나는 화가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미술관에서 일하지도 않을 것이고, 미술 선생님이 되지도 않을 것인데 왜 귀찮은 미술을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미술 교육은 미술이 삶에 들어오게 하는 교육이다. 미술관에 가는 것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박수근미술관에서나 양구의 미술 교사들이,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누차 언급하는 것은 이런 미술 교육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박수근미술관의 하수봉 학예사는 이런 제안을 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학교-지역사회 연계 사업을 발굴해서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바라건대 교육행정가 및 지역 행정기관들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의 특수성을 이해시키고 다양하게 시행될 사업에 협조를 요청하기 위한 설명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현재는 행정 기관과 행정 담당자들을 직접 대면하는 진행 주체들이 설명을 해나가면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진흥원에서 그런 부분에 큰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뿐만 아니라, 교사들이 교장과 교감 등 행정보직의 관리자들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겪게 되는 어려움은 적지 않다. 문화예술교육의 진흥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야 할 곳은 다름 아닌 학교이며,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권한은 교장 등의 관리자들에게 있다. 이것도 진흥원이 주목해서 역할을 고민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의 에너지, 배움의 열정
서울시립미술관의 피카소 전시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번 미술관 순례에는 뮤지엄 컨설턴트이며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박물관학과의 김정화 교수가 동행하여 전시에 도움말을 주었다. 첫 번째 전시실의 첫 번째 전시작인 커다란 <슐레르씨 가족> 앞에 김정화 교수를 중심으로 작고 단단하게 반원이 만들어졌다. 새벽잠을 누르며 달려온 양구의 미술교사들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열렬히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바람직한 교육의 핵심적인 모습이다.
지난해 미술관 연계 수업에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아이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걸어가면서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양구가 시골이라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이라고 말들 하지만, 오히려 서울이 아니라 양구 같은 지방에서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만들어내기 더 쉬운 것 같다. 오늘은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데다가 설명까지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에너지를 얻어 가는 느낌이다.” 학생들에게 체험의 중요성과 미술관을 즐기는 방법을 얘기하려는 교사가 미술관에서 즐겨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교육이다. 김정화 교수의 목소리를 놓칠 세라 목을 뺀 교사들의 모습을 보니 그들이 얻어갈 에너지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그 에너지는 미술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교과목의 하나가 아니라 문화예술의 감성과 소양을 키우는 열정적 태도의 하나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뿜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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