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공간 구성이란 가능한 것일까? 공간에 대한 복잡하게 엉킨 고민들을 이진경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을 통해 풀어본다.
도봉구 초안산을 마주한 아파트로 이사를 온 후, 회색 빌딩 숲에 갇힌 듯한 불편하고 삭막했던 마음이 여유를 찾아간다. 베란다 너머로 어깨를 드러낸 산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18평의 작은 사각 공간이 창밖의 산과 하늘을 아우르는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파트의 생활은 외롭고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현관문이 굳게 닫힐 수밖에 없는 구조. 이웃과의 소통의 시도는 오히려 침범의 영역이 되어버리는 구조. 그래서 더욱 나의 가족 안에 머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구조. 주거공간에 대한 이러한 어색한 느낌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더 많은 고민으로 이어졌다.
공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미술교과모임의 <공간>에 대한 수업연구 중 공간의 여러 비밀에 대해 진행된 많은 연구들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주거공간이 어떠한 역사 속에 놓인 공간 구조인지, 공동체와 단절되고 일렬화(획일화) 되어가는 이 주거공간은 자생적인 내부적 변천과정일 뿐인지, 아니면 어떤 외부적 작동의 비밀이 있는 것인지… 이진경 씨의「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이라는 책은 복잡하게 엉켜있었던 공간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에 또 하나의 훌륭한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기초하고 있는 근대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존속할 수 있는 것일까를 서구에서의 주거공간의 변화과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우리의 현재적 삶이 우리의 가까운 과거보다는 서구의 먼 과거와 더 근접해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근대 주거공간에 대한 연구는 매우 유효한 연구일 것 같아 흥미로웠다.
19세기 노동자들의 주거공간의 변천, 그 다양한 얼굴
저자는 먼저 중세에서 19세기까지 주거공간의 변천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중세의 생활과 주거공간에는 ‘사생활’혹은‘프라이버시’가 없었다. 가족 내부에도 정서적인 내밀성이 없었던 중세의 혼성적인 삶의 공간은, 점차 분화가 진행되면서 사적이고 가정적인 19세기의 공간을 낳는다. 그 중에서도 19세기 노동자들의 주거공간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현재의 주거공간과 맥이 닿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19세기 노동자들의 주택
19세기 중반 이래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도시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노동자나 빈민, 부랑자들도 늘어났으며 도시 곳곳에 슬럼이 만들어졌다. 이 슬럼가의 열악한 주거 환경과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상태는 콜레라의 발생지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공중위생을 위해서는 이러한 끔찍한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발상이 확산된다. 그 결과 위생가들이나 코뮨주의자들, 그리고 박애주의자들 등은 다양한 관점에서 노동자 주거공간에 대한 방법들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 중 <팔랑스테르>는 대표적인 코뮨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푸리에가 서로가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존중하면서도 개인성향의 자유로운 만족을 보장하는 사회의 축소판으로 제시한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 <팔랑스테르>를 접하는 순간, 공간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얻은 듯 나의 가슴이 뜀박질 쳤다.
팔랑스테르, 그 꿈을 찾아서
<팔랑스테르>는 사회와 연계를 잃은 채 가족을 지향하는 도시나 농촌과 달리, 가족과 사회, 생활과 생산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건축적 기초로 푸리에가 구상한 것이다. 푸리에는 집합적인 주거형식을 취하는 건축, 그 중심에 자리 잡은 공공시설과 공적 건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집합적 공간, 나아가 사람들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동선을 통해, 그 건축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며 만나고 관련을 맺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나의 가슴을 뛰게 했던, 공동체적 주거공간 <팔랑스테르> 에 대한 푸리에의 구체적 구상을 들어보자.
“부지의 중심에는 식당과 회계실, 도서관, 연구실 등의 공공 목적을 갖는 시설이 할당되어야 하며, 그 중심 위치에는 전신국, 우체국, 회합을 알리는 종탑, 실험실, 온실 등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앞에는 퍼레이드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시끄러운 소음이 있는 작업장, 즉 목공소, 대장간 등은 건물의 한쪽 윙에 모으고, 아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곳 역시 그렇게 하며, 다른 쪽 윙에는 연회장이나 객실 등 외부와 소통하는 공간을 두어 건물의 중심부나 내부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개별적인 아파트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다수의 공공 홀을 두게 하고 복도는 유리로 채광과 환기를 하며, 벽체와 토지의 절약을 위해, 그리고 주민들의 교류를 증진시키기 위해 3층~4층으로 지어지며, 갤러리-통로를 이용해 건물 내부의 각 공간을 연결한다.”
팔랑스테르의 단면도
가족만의 공간으로 고립된 우리의 주거공간이, 가족의 배타적 경계가 완화되고 <팔랑스테르>와 같은 공동의 생활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그 모습을 달리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 것인가. 공동 세탁장과 목욕탕, 가족적 단위가 아닌 식당에서의 공동의 식사, 빈번하게 공연되는 연극이 올려지는 커다란 무대와 홀이 있는 극장, 이런 것에 굳이 욕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동적인 삶의 방식을 전달해 줄 수 있는 <팔랑스테르>의 주거공간의 구조는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사는 공간 구성하기
<공간>에 대한 연구는 시각문화 환경에 대한 연구에서 간과되기 쉬운 영역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배경이자 그를 구성하는 장치 중의 하나이기도 한 공간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미술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많은 고민과 연구를 집적해가고 있는 전국 미술교과모임의 선생님들이 공간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전국 미술교과모임은 시각문화 환경의 세계성을 담아 낼 <대안교과서>를 만드는데 열정을 쏟는 동시에, 3차원적인 물리적 공간의 연구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간이나 문화적, 사회적 공간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특히 학교 공간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공간의 환경을 미화하는 시각 디자인적인 접근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학교공간을 창출해보도록 하는 접근이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더불어 사는 공간 구성하기”라는 수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시도 중 하나였다. 이 수업은 학생들이 많은 시간 생활하는 학교 공간을 인간의 시각이 아닌 다른 생물의 시각으로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다시 다른 생물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하도록 하는 것으로, 총 4차시에 걸쳐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다른 생물로 변화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지내왔던 교실 공간이 너무도 삭막하고 자유롭지 못한 인간만의 공간이었다고 토로했다. 학교공간의 기본 성격과 기능을 폐쇄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생물들이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해보고 토론하는 수업에서 아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물을 살게 해 주는 공간이 아닌, 사람과 생물이 함께 더불어 잘 지낼 수 있도록, 서로의 설계에 대해 지적해주고 토론하며 스스로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설계된 작품들이 미니어처로 발표되는 시간. “교장실에 보아뱀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간 구성하기” 같은 미션에 아이들은 유연하게 운동장 쪽의 교장실 벽을 무너뜨리고 날아온 새들을 보아뱀이 잡아먹을 수 있도록 나무를 빼곡히 심어 두었고, “화장실에 소나무와 더불어 살기”라는 미션에는 소나무가 햇빛을 보고 자랄 수 있도록 층마다 구멍을 뚫고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모둠별 작품과 함께 자신들의 생각을 발표하하는 시간, 고정관념적인 틀과 그 영역을 벗어났을 때 위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수업의 목표는 인간중심적이고 고정관념화 된 공간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창의적이고 유연하게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 자신을 다른 것과 분리된 개체로 인식하는 인간, 주위와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가고 경쟁하는 개인으로서의 인간, 이익 추구가 기본적인 삶의 동기가 되는 인간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감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하는데 수업의 의의가 있다. 이 ‘더불어 살아감’의 중요성이야말로 <팔랑스테르>의 정신과 근원적으로 맞닿아있는 지점이다. <팔랑스테르>처럼, 교육의 장인 학교공간이 학생들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동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만나고 관련 맺는 공동의 삶의 장으로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 것인가.
팔랑스테르는 진행형
이 책을 읽은 후 어느 즈음에 우연히 인사동을 지나는 길에 쌈지길에 들렀다. 공동체적 주거공간인 <팔랑스테르>와 상업공간의 유사성을 언급하는 것에 약간의 조심스러움이 없지 않지만, 인사동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쌈지 길의 건축구조는 나에게 매력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공간은 우리를 잠재적 소비자로만 파악하는 다른 상업 공간과는 다른 식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고, 기존의 분절된 상업공간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적 상업공간의 효율성을 살리면서도 공간과 공간이 열려있어, 장터에서와 같이 함께 어울리고 즐기는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죽이기를 강요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사람들과 작품들이 낯설지 않게 어울려 있는 구조, 골목골목이 서로 연결되고 마침내는 모두 닿아 있는 구조. 물론 나선형 구조가 발생시키는, 상품을 향한 시선의 강제성 등이 아쉽기는 하지만, 상업건축물이 이처럼 사람들이 순환되고 소통되는 즐거운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게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더불어 사는 공간 구성하기” 수업에서 상상한 학교 공간과는 달리, 지금의 학교 공간은 삭막하고 획일화되어있다. 이러한 학교의 모습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여러 가지 작은 시도들은 학교 건축예산만 더 늘이는 변형된 사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지나칠 정도의 규제적인 공간으로 탄생된 학교공간의 구조 안에서 과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혹은 더불어 살 수 있을까? 교육의 터전인 학교공간이 순환적 동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만나고 관계 맺는 <팔랑스테르>의 정신과 같이 공동 삶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이는 얼마나 멋진 일일까.
책 말미에,“인간이 모든 사유의 중심에 서고 그것이 모든 판단의 유일한 척도가 되던 사유의 이미지가 동요하고, 그에 따라 ‘인간’이라는 이름이 뜻밖에 낯선 것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때, 우리의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주거공간의 이러한 배치 또한 극히 낯설고 어색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라고 쓴 저자 이진경씨의 글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팔랑스테르>의 정신은 결국 좌절되어버린 꿈이긴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어쩌면 매트릭스 속의 삶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한, <팔랑스테르>의 그 정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구체화되어야할 모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진경 씨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미술교육은 어떤 수업으로 거듭나야 할 것인가’라는 나의 오래된 질문에 대해 설레는 희망을 갖게 한, 하나의 답이 되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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