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 지역의 문화예술교육과 만나다

글_김주호(한국문화예술교육 진흥원장)
올해와 내년에 걸쳐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대표적인 국제교류사업이 될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World Conference on Arts Education)1)의 준비차, 지난 7월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에 다녀왔다. 이 지역의 활동가, 이론가, 정책 담당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활동사례와 이론적인 관점을 공유하는 가운데, 문화예술교육의 사회적 의미를 국제사회에 보다 폭넓게 인식시키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문화적 배경도 다르고 우리에게 그리 알려진 바가 없는 곳이었지만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경험과 열정은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겁고 강렬했다.

회의가 열렸던 웨스트인디즈 대학

위기의 사회 그리고 문화예술교육

아무리 지름길로 간다고 해도 이 동네에 가기 위해서는 꼬박 하루 이상이 걸린다. 멀기도 하지만 전혀 생소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의 관심사인 문화예술교육을 어떻게 접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자못 흥미로운 일이다. 주최측(University of West Indies)에서 보내온 프로그램의 제목들을 훑어보니 문화예술교육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관심사들을 거의 모두 망라하고 있다. 무엇보다 ‘위기에 놓인 사회를 향한 예술교육의 실천과 전망(The Practice & Prospects of Arts Education for Societies-In-Crisis)’2)이라는 심포지엄의 큰 주제가 거창하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을까?

심포지엄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이 지역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다른 참가자들을 통해 왜 이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사회적 대안으로 설득력을 얻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민족적인 다원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국가들이다.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렇듯 사회의 구성원들은 흑인과 백인 그리고 황인종과 혼혈인종이 공존하며 인종적 다수자가 경제적 소외자로 살아가는 현실을 안고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문화예술교육이 고착된 사회구조 속에서 억눌린 사람들의 정서적 해방(emancipation)을 위한 창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문화예술교육을 강도 높은 용어로 설명한다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답을 찾았다. 이 지역의 문화 속에는 유럽인들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유색인들이 수대에 걸쳐 형성한 정서적 결과물들이 투영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난제들이 위기를 부른다. 그러나 낙천적이고 포용력이 강한 민족들이 모여 살면서 억눌림을 해소할 수 있는 분출구를 문화 속에서 찾는다. 이것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카니발이다.

발표 및 토론과 함께 다양한 사례들이 선보였다.

모두가 참여하는 예술교육, 카니발

이 지역 카니발은 전 국민의 축제이자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다.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경우 매년 2월에 열리고 예술가는 물론 일반국민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예술의 모든 장르를 포괄하며 예술가와 일반인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작업이기도 하다. 카니발은 이들이 페스티벌 아트(Festival Art)라고 부르는 일종의 총체적인 예술장르를 탄생시켰다. 카니발에서는 창작자와 관객이 인위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누구나 참여하고 공동으로 준비하며 함께 호흡한다. 예술장르를 불문한 창조적인 발상이 공동의 작업으로 이어지면서 소통을 증진시킨다. 따라서 카니발을 준비하는 과정은 통합교육의 측면을 고루 갖춘 문화예술교육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카니발에 동원되는 예술적 요소와 양식은 그 자체가 독립된 예술이자 전통문화의 맥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칼립소(Calypso, 트리니다드 원주민의 재즈풍 민요)와 스틸 팬(Steel Pan,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민속악기인 팬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만든 악기)은 이 지역의 경쟁력 있는 전통음악 상품이다. 화려한 의상과 가면, 소도구 등은 신화와 서사의 표현양식이며 몸짓과 춤동작은 억눌린 감정의 정화작용인 셈이다. 심포지엄 사이사이 진행된 워크숍과 틈새 공연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짧게나마 참가자들이 직접 체험하게 함으로써 맛깔스런 양념이 되었다. 카니발은 분명 이 지역이 보유한 아주 개성 있는 문화예술교육의 교재이자 교육의 틀이라는 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 중간중간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전통음악장르인 스틸 팬과 칼립소 공연이 열렸다.

다양성을 매개하는 힘

다민족 혹은 다문화 사회는 어느 곳이나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한다. 카리브 지역 국가들은 이러한 고민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계, 유럽계, 인도계, 중국계의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차이와 혼융이 거듭되는 과정 속에서 별다른 교육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한 사회의 실질적인 대안으로 문화예술교육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도 여겨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소통의 기제를 제공하는 문화예술교육의 본질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예술교육과 다문화’를 다루는 섹션에서는 다양한 지역의 사례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이론적인 배경을 제시하는 발표자가 없었던 점이 아쉬운 점으로 기억된다.

강연자들

치유라는 새로운 화두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카리브해 이외 지역의 사례도 발표되었다. 그 중에도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예술치유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미국의 예술교육학자 D. 린더지가 6개월 전 쓰나미로 피해를 당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유엔의 지원으로 피해지역에 급파된 그녀는 이 지역의 아동들에게 당시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짧게 정리하자면 엄청난 피해로 공황상태였던 아동들이 그림을 통해 기억을 재생하고 스스로 현실세계의 감각을 되찾음으로써 정서적 장애를 극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주제는 그 결과의 신빙성을 차치하더라도 미술치유의 효과를 국제사회에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다른 하나의 사례는 영국의 E. 허치슨이 발표한 정신분열증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의 연극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 사회에서 유색인종의 정신분열증 판정 비율은 백인보다 월등히 높으며 이것은 인종적 문화적 편견이 상당히 개입된 결과로 볼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의학적 판단에 의한 약물 치료보다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연극의 역할놀이(role play)를 이용해서 훨씬 더 정교한 판정과 심리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반적으로 치유로서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신뢰도는 우리 사회보다 높은 편이었으며 좀 더 적극적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지역이나 사회를 불문하고 문화예술교육이 분명하게 사회문제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경직된 지식 중심의 공교육에 대한 보완을 의미하기도 하며 소통과 공존의 메커니즘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교육이 기량개발에 맞춰지는가 아니면 문화 해독력이나 창조성에 맞춰지는가의 문제는 깊이 논의되지 않았다. 전반적인 느낌은 분리적 접근보다는 양자의 긍정적 측면이 모두 강조되는 분위기였다고 판단된다. 비록 물질적인 기반이 충분하게 마련되지 않았지만 카리브해 지역의 문화예술교육은 학교와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올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우리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문화예술교육에 관해서 비슷한 방식과 내용으로 토론할 기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배경이 다른 이 지역에서는 과연 문화예술교육이 어떠한 사회적 의미와 기능을 담고 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저마다 어렵고 부족한 환경에 있겠지만 문화예술교육을 위해 고민하는 동료들을 만나는 일은 적잖은 기대를 갖게 한다.

1)이 대회의 본회의는 2006년 3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본회의에 앞서 지구를 4대 권역별로 나누어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각 지역의 권고안을 본회의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 11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45개국 국가들이 모여 권고안 채택과 함께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각 국의 현안과 사례를 발표할 예정이다.

2)주지하는 바와 같이 Arts Education이라는 영문 표기에는 문화교육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Arts는 미적인 극치로서의 창작물뿐 아니라 누구나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참여의 대상으로 넓게 해석되었다.

김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