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소녀, 라이케의 어떤 여름날 하루

덴마크 소녀, 라이케의 어떤 여름날 하루

글_고민정(아르떼 덴마크 통신원)

라이케(Rikke)는 덴마크 코펜하겐 근교의 파럼(Farum)이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열 살 소녀다. 여름방학을 맞았지만 엄마, 아빠가 직장일로 바빠서 가족끼리의 특별한 여름 계획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외갓집도 먼 한국에 있다. 세 살 터울의 언니는 체조 요정을 꿈꾸는 덴마크의 국가대표 선수다. 가족과의 시간을 뺀 나머지 여름방학 시간을 라이케는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보낼까.
“우리 지역의 방과 후 교실인 푸워수고어(Furesogaard)에 보내요. 아이들이 활동을 아주 좋아하고, 직장을 가진 부모들이 마음 놓고 애들을 보낼 수 있어요.” 라이케 엄마는 그곳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한 말투다. 방과 후 교실에 대한 학부모의 신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특히 10살에서 15살까지 시기적으로 예민할 법한 성장기 아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자진해서 찾는 곳이라는 점은 더더욱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지난 6월 말, 라이케를 따라 방과 후 교실을 찾아갔다.

라이케와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숲속 오솔길을 지나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다


출발! 방과 후 교실로
파럼 기차역에서 15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럼 방과 후 교실(Farum Furesogaard). 주변에는 뮤직 하우스, 컬처 하우스, 학교, 도서관, 스포츠 센터, 유치원, 유아원 등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공공시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다.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스포츠 센터와 학교를 지나고 유치원을 지나면 방과 후 교실이 보인다. 들어서자마자 마당 중앙에 있는 미니 풀장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 라이케와 친구는 출석표에 스스로 이름을 적은 다음에 식당으로 향한다. 샌드위치, 과자, 과일 등을 맘껏 골라서 먹는다. 먹고 난 다음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는 곳으로 간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 팔찌 매듭을 짓는 아이들,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 아이들, 선생님 주변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 스칸디나비아는 여름 햇살이 귀한 지역이라 아이들이 실내 활동보다 실외 활동에 더욱 집중하도록 배려하는 것 같다. 내가 리더 선생님인 기트 수와트(Gitte Sort)와 인사하는 동안 라이케는 아이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이들은 이방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 자신들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자유로운 일상에서 배운다
방과 후 교실에는 본부 건물 및 여러 채의 단층 건물 외에 야외에 설치된 간이 공장 같은 건물들이 있다. 나는 우선 작은 요트들이 한쪽에 잔뜩 쌓여 있는 공방을 지나쳐 그 다음 건물로 향했다. 풀 냄새, 동물 냄새…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아주 어릴 적 일들이 그 냄새로 인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지붕만 있는 이 건물에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고, 아이들이 만든 알록달록한 접시들이 펼쳐져 있다. 다음 건물에는 전문적인 액세서리 공방처럼 온갖 공구들, 귀걸이, 팔찌, 구슬들을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물 사육장의 모습


액세서리 공방을 나와 다음 건물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많이 몰려 있다. 라이케의 얼굴도 보인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동물 사육장이다. 한 칸 한 칸에 각종 그림들이 붙어 있다. 한쪽에는 토끼와 산책을 갈 때 목에 매다는 줄이 이름별로 정리되어 있고, 먹이 주는 시간표, 토끼 사진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질서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건물 중앙의 테이블에는 토끼를 위한 미니 건물, 길, 미로까지 폐품을 활용해서 만들어놓았다.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은 하나둘씩 자기 토끼를 들고 나를 둘러싼다. “내 토끼 이름은 바니야. 이 토끼는 줄리아. 얘는 엘리. 한번 안아볼래?” 무척 자랑스러운 듯이 이방인에게 토끼를 소개한다. 아예 토끼 사육장 안에 들어가 있는 아이도 있다. 맨발로 걸어다니는 선생님 한 분은 아이인지 선생님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라이케는 친구와 토끼 사육장 안에서 갓난 토끼를 돌보고 있다.
한 소녀가 나의 팔을 끌며 토끼 패밀리 트리를 보여준다. 바니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 토끼들은 이곳에서 일가족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소녀는 나에게 자기가 맡고 있는 사육장의 아기 토끼 여덟 마리의 이름을 일일이 다 소개한다. 손님을 안내하는 데 신이 난 것 같다.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곳으로, 또 무언가를 태우는 냄새가 나는 건물로, 모래밭으로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닌다.
태우는 냄새의 진원지는 목공도구가 즐비하게 놓인 건물이다. 남자 아이들과 선생님 한 분이 모여서 바비큐를 하고 있다. 한 아이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다른 아이는 바비큐 꼬챙이로 기타 가락에 맞춰서 즉흥적인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북을 두드리는 아이와 선생님도 보인다. 한편에는 아이들이 모래밭 위에서 천장에 매달린 줄타기 놀이를 하고 있다. 이 목공소 밖에는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있는데, 지난달에 아이들이 직접 만든 거란다. <반지의 제왕> 세트를 직접 설계하고, 구조물을 짓고, 의상과 소품도 모두 만들어서 큰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파럼 방과 후 교실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활동들


다시 라이케가 있는 동물 사육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이들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 보인다. 선생님들도 모여 있다. 한 남자 선생님이 우는 여자아이 옆에서 상자를 들고 있다. 사랑하는 토끼가 죽은 것이다. 아이들은 토끼의 죽음을 통해 인생에서 매우 심각한 순간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살아가는 데 언제나 기쁜 일만 있지는 않은 법이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배운다.

선생님? 선생님!
아이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흥미유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약간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자유롭게 방임하는 듯한 이 유토피아적인 발상은 성공적일까. 본래 취재 계획상에서는 라이케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그런데 말로 하는 대화를 넘어선 다른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이 이곳에서는 이루어지고 있다. 이 역시 글로 묘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곳에선 선생님에 대한 정의도 조금은 남다르다. “선생님이라 불리기엔 좀 맞지 않는 점이 있어요. 선생님은 무언가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란 인식이 있는데, 우리는 학교 선생님하고는 다른 역할을 한답니다.”리더 선생님인 기트의 말이다. 여가 활동을 전담하는 이 직업은 페다고어(Paedagoger)라고 불린다. 3~4년에 걸쳐 아동심리학, 사회학, 연극, 음악, 미술 등으로 이루어진 전문 교과 과정을 이수하면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녀는 이들이 천성적으로 예술, 자연,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말했다. 보수는 여타 직업보다 휠씬 적지만, 문화교육에 관심이 있고, 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선생님으로 있는 것 같단다.

리더 선생님인 기트는 파럼 방과 후 교실이 시작될 때부터 근무했다

‘자율’이라는 키워드
파럼 방과 후 교실을 둘러보면서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기트 수와트 교사에게 물었다. 다음은 그녀와의 일문일답이다.

문: 방과 후 교실을 둘러보니 제가 생각하고 알고 있던 방과 후 교실과는 다소 다릅니다. 어찌보면 상당히 유토피아적인 발상을 구현하는 장소인 것 같기도 한데요. 덴마크에서 어떻게 이러한 문화예술공간이 형성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답: 덴마크는 대안 교육에 관한 한 오랜 전통이 있지요. 이는 코무운(Kommune)이라 불리우는 소규모 지방자치사회의 민주적인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의무 교육은 1849년에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정부는 부모가 종교적이건, 교육적이건, 정치적인 이유에서건 자녀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지요.
여타 서구사회의 공교육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윤리체계 형성을 위해 노력한 반면, 덴마크의 교육은 19세기 이래로 부모와 아이들이 전적으로 자율적으로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민주적으로 발전해왔습니다. 특히 그룬트비(Grundtvig)라는 교육자이자 종교개혁자가 19세기에 성적 위주, 교과 위주의 학교교육에 반기를 들어 보다 개인적인 자유와 자연 친화적인 인성교육을 설파했는데, 이 자유로운 사고와 실용적 기술을 강조하는 그룬트비 모델은 덴마크의 시골 코무운에서 특히 유행했습니다. 이 모델에 기반을 하고 있는 자유학교(Friskole, 프리스콜르)는 개개인의 성장, 개개인 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문 : 지나치게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 아닌가요? 체계도 목표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십니까?
답 : 모든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는 사명선언문(mission statement)에 의거하여 계획을 하고, 이를 실행한 후 평가합니다. 선언문은 1년마다 조금씩 수정되는데, 학부모의 참여와 선생님들의 의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면 지난해의 활동을 검토하면서 다음해에 진행할 굵직굵직한 활동계획을 세우고 어떻게 이를 예산 안에서 추진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활동 내용도 중요하지만 실용적인 면 즉 시설의 개보수 등도 이때 논의되곤 합니다. 양질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자율적인 참여방식에 대해서 학부모, 선생님, 지역 사회 간에 신뢰가 쌓여 있다고 자부합니다. 10~15세 사이의 400명의 아이들이 여기에 옵니다. 학교 교과교육과는 달리 우리는 사회성, 인성 교육에 신경을 쓰는데요, 어떻게 친구를 사귀는가, 어떻게 한 팀에서 개개인의 생각들을 잘 표현하고, 다른 친구들과 이를 조절해서 팀 활동을 하는가에 중점을 둡니다. 진리나 가치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통제하기 위한 법칙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은 군대에서 필요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그냥 ‘예’ 하면서 순순히 팀의 결정에 따르는 것 보다는 ‘아니오’ 라고 대답하면서 왜 자기 주장이 옳은지 타당하게 설득하는 방법을 더 격려하고 있습니다.

마치 집주인인양 기트 선생님이 자랑스럽게 서 있는
이 저택은 지방의 부호, 철강무역상, 부유한 농부 등의 주인을
거쳐 파럼 코무운의 소유가 되어 방과 후 교실로 다시 태어났다

지역사회, 학부모, 교사의 삼위일체
문 : 때로는 선천적으로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들도 있고, 그룹에서 소외되는 아이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이 개입해서 해결되지 않는 아이들만의 세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답: 예, 맞습니다. 그룹에서 소외당하는 경험은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경험이지요. 우리는 1, 2등 우열을 가리는 방법을 배제하고, 가능하면 손이나 촉각을 이용한 경험을 제공하려 애를 씁니다. 손을 이용한 활동은 협동을 필요로 하고, 자연스럽게 소외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적인 재능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개개인 아이들이 최고 스타이며, 각자의 재능이 있다고 격려하는 언어를 씁니다.

문 :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더 잘하고, 선생님이 잘 봐주었으면 하는 게 모든 부모의 마음일 텐데, 선생님과 학부모와의 문제는 없습니까. 예를 들면 학교교육이 아니고 자유롭게 출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 같은 종류 말입니다. 선생님의 권위라고 하면 좀 뭣하지만, 학부모가 만족하지 않는 경우 학교 운영이 아이들을 위한 여타 경쟁 요소들에 의해 위협받을 수도 있을 텐데요?
답: 저는 8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서 리더 선생님으로 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계속 같은 길을 걸어왔죠. 놀랄지도 모르지만 여태까지 불평 없이 잘 운영해왔습니다. 학부모들은 매월 1일 이곳으로 와서 모임을 갖습니다. 일년에 네 번 포럼 형식의 뉴스레터를 발간합니다. 파티, 크리스마스 등의 연간행사는 온 가족의 축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만난 학부모끼리의 사교 모임도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죠. 선생님의 자율권은 제 생각에는 운영 자금 및 월급이 어디서 나오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 월급을 포함한 운영비는 코무운에서 3분의 2를 부담하고 나머지 3분의 1을 학부모가 부담하는데, 시설 및 활동에 비하면 학부모의 부담이 무척 적은 편입니다. 서무나 자금관리 등은 코무운의 분과에서 전적으로 관리하고, 콘텐츠 기획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상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의 자율권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제가 소위 선생님 사이에 리더로 일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는 데 소질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 선생님들 간에도 사람 사이의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법한데, 저는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끼 있고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일해서 정작 일인지 노는 것인지 딱히 구별할 수가 없어요. 저는 낙관론자거든요.

문 : 정리하자면 이곳 방과 후 교실은 지역사회의 경제적 후원, 학부모의 참여, 선생님들의 창조적인 열정들이 어우러져서 아이들에게 건강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지역의 방과 후 교실도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특히 파럼 방과 후 교실의 장점을 소개하신다면요?
답: 파럼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건 모르지만 점심 재료만큼은 우리가 아마 덴마크에서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간단한 샌드위치나 빵 조각이 아니라 따뜻하고 넉넉한, 정성껏 준비된 음식을 아이들에게 제공하자는 것은 우리의 신념입니다. 그것도 인근 농부들이 정성껏 가꾼 무공해 야채, 과일을 영양에 맞춰서 늘 신선하게 공급하자는 것이 우리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이고, 여기에 비용을 아끼지 않습니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 이웃, 지구 환경을 염려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체득해 어른이 되서도 변치 않는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방과 후 교실을 나오며
덴마크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아이들을 하늘로부터 잠깐 빌려서 수년간 같이 지내고 스스로 자립하도록 사회로 돌려보낸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결과 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정 지향적인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일례로 덴마크는 국제수학경시대회 등 국제영재대회에 출전하지 않는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힌다. 오랫동안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조정하면서 느릿느릿하게 발전해온 민주주의와 사회복지정책이 오늘날 아이들을 위한 자연스러운 공간을 형성하게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물론 파럼 방과 후 교실에 이상적인 모습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왜 토끼 사육장에는 죄다 여자 아이들 뿐이고, 목수실에는 남자아이들이 주로 찾고 있을까. 이처럼 어디선가 학습된 성역할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은 채 그냥 방관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 이점에 대한 토론을 기대한다.

홈페이지:www.furesoegaard.dk
주소 : stavnsholtvej 177
3520 Farum
Denmark
Tel: +45 44341360 fax : +45 44341361

Email: furesoegaard@frie.dk

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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