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에 파국을 맞이하지 않은 분야를 찾는 게 더 어려웠겠지만 학교 수업, 그중에서도 미술 수업은 정말로 망가짐 그 자체였다. 언제든 교실 구성원 모두가 자택에서 격리될 준비를 해야 했다. 원격 수업으로 진행했던 미술 수업은, 그걸 미술 수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2020년과 2021년의 미술 수업은 색칠 공부와 조립하기로 이루어졌다. 밑그림이 그려있는 도화지를 수채색연필로 채운 그림들은 완성도만 놓고 보면 크게 나쁘지 않았다. 교실 뒤에 걸어둬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동물이나 건축물이 그려져 있는 도안을 오리고 붙여 만든 페이퍼 크래프트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 내에 만들어라.”하고 던져주면 어린이들이 알아서 완성해온다는 측면에서 몸이 편하기도 했다. 미술 수업은 목을 쓰지 않아도 되는 쉬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런 방식의 수업은 아이들이 미술 교과를 덜 중요한 과목으로 느껴지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술 시간에 만든 자기 창작물을 ‘과제물’ 차원에서 인식하고 이것을 ‘작품’으로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 미술 수업
  • 챗봇 제작
휴식 끝, 수업 시작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무언가 근사한 예술 수업을 하고 싶었다. 전면등교 수업 시작과 함께 창의성과 영감을 북돋워 주는 수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하려니 자신이 없어졌다. 교육부가 제시하는 성취기준 도달을 위해 수업을 진행해 온 내가 자유로운 창의성을 길러줄 수 있을까?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수채용구 사용법, 조각칼 쥐는 법 같은 도구 활용 방법뿐이지 않을까?
‘예술로 탐구생활’에는 그래서 지원했다. 예술가에게 창의성을 키워줄 수 있는 독창적인 수업을 부탁한다면, 나는 이 수업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진정성 있는 예술의 정신을 담는 것은 찐 예술가 선생님이 해줄 테니까 나는 일단 겉으로 보기에 멋있어 보이는 프로젝트 기획에 심혈을 기울였다. ‘백설 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왕비의 거울이 ‘시리’나 ‘빅스비’ 같은 인공지능 음성인식 챗봇이라면?’을 시작으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주제로 미술 교과를 프로젝트의 핵심에 놓고 인공지능과 윤리를 얹어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던져야 할지 머리를 싸맸다.
· 어떤 사람을 ‘아름답다’고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 평가 기준을 객관적으로 정량화된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지우개는 써도 되나요?”
학교에 예술가 선생님이 도착하기 전, 아이들의 회화 표현 능력을 어떻게든 한 단계 상승시켜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교실 앞에 사과와 각기둥을 세워놓고 연필을 사용하여 최대한 실제와 비슷하게 그려보라는 요구를 했다. 우리가 진행할 수업에서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는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감이나 색연필 쓰지 말고 연필만 써야 한다고 안내하고 도화지를 나누어주었고, 그리기 시작한 지 5분 만에 나는 도화지 위에서 반죽처럼 뭉개져 있는 흑연의 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종이와 연필이 싸워서 종이가 진 것처럼 보였다.
총체적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이는데 한 명의 어린이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선생님, 지우개는 써도 되나요?’ 뭔가 알 수 없는 기분이 몰려들었다. 그건 부끄러움 같기도 했고, 막막함 같기도 했다. 내가 해온 수업 때문에 어린이들의 창의성이나 독창성 그런 것들이 모두 말라버렸으면 어떡하지? 나는 내가 어린이들에게 백지상태의 도화지를 나눠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교실 어린이들의 소묘 표현 능력에 나 홀로 부끄러워하며 예술가 선생님께서 자화상 그리기를 지도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 그림들을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부끄러워하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어린이들은 정말 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내 고상한 미적 취향으로는 절대 저런 그림을 교실에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근사해 보이는,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 작품을 고수했다. 하지만 안 걸면 뭐 어쩌겠는가. 창작자가 이토록 뿌듯해하는 것을.
  • 자화상 그리기
거울은 무엇을 비출까
거울을 만드는, 이 프로젝트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수업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정말 괴상한 형태(내 취향은 절대 아닌)의 다양한 거울이 나왔다. 내가 수업을 쥐고 진행했으면 이런 거울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수학 교과의 각기둥과 각뿔 단원에서 시수를 빼 왔기 때문에, 완벽하게 그린 전개도를 칼같이 잘라서(실제로 칼을 이용했다. 이건 초등학교 교실에서 쉽게 사용하지 않는 도구다. 큰마음 먹고 가장 믿음직스러운 한두 명에게나 쥐여줄 수 있는 위험천만한 도구이기 때문에) 정확한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게 하기 위해 얼마나 잔소리해댔을까?
아마도 나는 아크릴 거울에 청테이프를 붙였다 뗐다를 반복하는 모둠에서 내는 찍- 찍- 소리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붙일 부분을 정하고 붙이라고! 다른 애들도 듣기 싫어하잖아!”라고 핑계를 대며 내가 듣기 싫어 미치겠으니 당장 깔끔한 작업환경을 되돌려놓으라고 종용했을 것이다. 내가 진행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교사로서의 자아는 어린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 부족한 행동을 반복하는 어린이를 교정하는 것이 국가가 나에게 월급을 주는 이유이기에. 나는 거울 제작 수업에서 관찰자의 역할만 맡았기 때문에 간섭할 수 없었고, 내버려 두었기에 발생하는 소음을 참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청테이프의 부착, 탈착 흔적이 지저분하게 남은 그 거울은 창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표현 방식이었다. 어린이들은 그 지저분한 거울 밑에 작은 설명서를 붙여두었다. ‘이 거울은 실제를 그대로 비추지 않습니다. 꼭 테이프 자국 때문만은 아니에요.’ 나는 억, 하는 탄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참을 수 있었겠는가? (내 기준에서) 조금도 아름답지 않은 창작물이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는 점이 예술 그 자체로 느껴졌다.
  • 거울 만들기
예술을 가르칠 수 있나
프로젝트를 끝내고 상쾌하고 뿌듯한 마음에 사로잡힐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예술 ‘교육’이란 무엇일까? 정해진 성취기준의 도달을 목표로 하는 교사가 ‘예술’을 교육할 수 있을까? 표현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예술 교육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예술’ 그 자체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프로젝트는 시작하기 전보다, 끝나고 나서 더 큰 고민거리를 짊어지게 했다. 나는 이 단출한 글의 끝을 단원평가의 답지 해설과 같은 명쾌한 문장으로 맺을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스무 시간 정도의 수업과 고뇌로 간단하게 답을 찾을 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예술적인 상황에 어린이들을 데려다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처에 데려다 놓으면 느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는 가르치지 않아도 어린이들은 배울 수도 있다. 어쩌면 예술이란 그런 것일지도!
이신애
이신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대학원에서 사회과교육 박사과정을 전공 중이며, 예술, 인권과 미디어 교육의 융합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수업하는 게 재미있고, 재미있는 수업을 하고 싶다. 어린이들이 학교에 오는 게 재밌었으면 하는 마음에 교실 학급문고 책꽂이에 만화책만 500권을 꽂아두었다. 교사는 여러모로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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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