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에 소개된 덕분에 많은 분이 책방에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주로 좋은 책을 알아보는 분들이지요. 고서를 수집하는 분, 좋은 시집을 찾아오신 분, 그리고 시집을 팔고 있는 시인이 안타까워 찾아오신 원로 시인.
고서를 수집하는 분이 찾아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분이 책방 문을 여셨지요. 고서를 수집하는 분이 그분을 알아보시더군요. “아, 용혜원 시인 아니신가요!” 처음에 저는 몰랐습니다. 사진으로도 뵌 적이 없었으니까요. “어떤 시인이 자기 전 재산을 내다 파나 싶어 하도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오자마자 책장을 보면서 여러 권의 시집을 바로 뽑아내시더군요. 다 구하기 어려운 시집들이지요. 내가 모르는 시집을 더 많이 갖고 있겠지만, 그에게 없는 시집이 내게도 조금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1만 권의 시집을 갖고 있어요. 올 한 해 동안 그 1만 권의 시집을 다시 읽으려고요.”
“제가 살아오면서 읽은 책들이라 그저 보잘것없는 책장입니다.”
“나도 젊어서 여기처럼 똑같이 내 책 다 내다 팔았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 대체 어떤 시인인가 얼굴 한번 보러 왔어요.”
“제가 살아오면서 읽은 책들이라 그저 보잘것없는 책장입니다.”
“나도 젊어서 여기처럼 똑같이 내 책 다 내다 팔았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 대체 어떤 시인인가 얼굴 한번 보러 왔어요.”
사람들과 어우러질 공간
처음에는 책방을 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 책을 직접 만들기 시작하면서 작은 사무실 정도를 얻을 셈이었지요. 문득 임대료가 저렴한 곳이 떠올랐습니다. 화가가 많이 모여 있다는 말도 들었고요.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찾아줄 것 같았습니다. 옥탑방에서 시작했다는 몇몇 출판사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옥탑방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가을 저녁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을 나 혼자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요. 구석에 작은 화단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의자와 작은 테이블을 내놓고 고요한 볕살을 즐기리라 잠시 꿈을 꾸었지요. 누군가 이 높고 고요한 곳까지 찾아오면 직접 끓인 짜이 한 잔을 내놓으리라.
그러나 옥탑방은 더 비쌌습니다. 하나 나온 게 있었는데, 아예 볼 엄두도 못 냈지요. 큰 철공소가 밀집한 구석쯤에 2층 구석방을 보았습니다. 동네 구경이라도 하자고 따라나섰다가 골목 한가운데 빈 공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들어갔더니 비좁은 골목에서 바라본 것과 달리 천장이 높았습니다. 목조 지붕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운치까지 있었지요. 이렇게 문래동의 다 쓰러져가는 주택 한구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책방을 하기로 생각이 바뀌었지요. “그 구석진 사무실에 누가 오겠어. 혼자 컴퓨터만 바라보며 팔리지도 않는 책이나 만들고 있겠지. 여기라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오면 책도 팔릴 것이고. 이 공간에서 강좌도 여는 거야. 독서모임도 하고.”
공간이었습니다. 책방을 하게 된 것은 우연히 공간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지나가는 이들이 예쁜 간판을 사진에 담아가서 여기저기 인터넷에 올려줄 것이고,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 모이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생길 것이라 여겼습니다.
시인이 읽은 책
책방이니 당연히 서가를 꾸며야 하지요. 알아보니 상당한 보증금을 내야 신간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보증금이라는 것은 폐업해야만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문 닫으려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는 돈에 임대보증금을 조금 더 보태서 겨우 마련한 자리인데, 신간 위탁판매를 위한 보증금이 따로 더 있을 리가 없지요. 그 큰돈을 묻어두고 갈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뭐하러 신간을 가져와. 네가 가진 책 가져다가 놓으면 되잖아. 시인이 읽은 책!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미 출판사를 해서 수백 종을 낸 아는 형에게 물어보았더니 내가 가진 책을 내놓으라고 하네요. 달리 방법도 없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책을 두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뭐하러 신간을 가져와. 네가 가진 책 가져다가 놓으면 되잖아. 시인이 읽은 책!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미 출판사를 해서 수백 종을 낸 아는 형에게 물어보았더니 내가 가진 책을 내놓으라고 하네요. 달리 방법도 없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책을 두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몇 번 이사하며 책장 네 개 정도는 버렸던 것 같습니다. 조금 아까운 책은 택배 상자에 싸서 지인들에게 보내곤 했는데, 그것도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폐휴지로 버려졌지요. 그래도 책은 차고 넘쳤습니다. 거실과 서재에 가득한 먼지 쌓인 책들을 하나하나 책방으로 옮겼습니다. 가난한 처지에도 좋은 책을 갖고 싶은 욕망이 컸어요. 한 권 두 권 모은 책이 꽤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귀한 책이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앞으로 나에게 김소월과 백석의 초간본을 소장할 기회가 찾아오지는 않겠지요. 어떤 경우든 수집에 빠지게 되면, 그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심할 것입니다.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이 크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경험을 오래 했습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책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책방이 여기저기 조금씩 생길 무렵이었습니다. 내가 운영하는 ‘청색종이’도 언론에 보도되면서 희귀본이 많은 곳으로 알려지고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책방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고서 수집가, 예술가 등 여러분이 찾아오셨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대선방송 촬영을 위해 찾아왔고, 그렇게 나의 서가는 언제나 바빴습니다. 책마다 담겨 있는 이야기들로 시간이 흐르는 줄 몰랐지요.
책방은 사람이 만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책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가는 곳입니다. 비록 책 한 권 팔지 못하는 날도 많았지만, 찾아온 사람들과 몇 시간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책방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이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서가가 있는 예술가 살롱
저는 책에 조금 미쳐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가난하지만 시인이기 때문에 가진 걸 다 털어서 시집을 사는 것이겠지요. 보통은 소장가치를 따져서 고가의 책을 구입하겠지만, 소장가치라는 것은 다분히 상업적인 이해 속에서 나오지요. 저는 그와 달리 제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책을 가장 주요한 구입 목록에 올려놓습니다. 가령 임화 시인의 『현해탄』, 서정주 시인의 『화사집』, 구상 시인의 『구상시집』과 『초토의 시』, 박인환의 『박인환 선시집』,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 그리고 『청록집』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시인의 첫 시집 등이지요. 저에게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시집 말입니다. 이 가운데 몇 권은 소장하고 있습니다. 또 이 시집들이 제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책방을 열고 제가 가진 책들을 내다 판 이유 중 하나는 더는 책을 소유할 능력이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다 놓자. 이런 심정이었을까요.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도 없겠지요. 그렇게 다 내놓고 나니 제 영혼이 탈탈 털린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그 옛날 오장환 시인이 운영했던 ‘남만서방’이라는 서점에는 시인이 소장했던 호화양장본 등 진귀한 책들이 가득했다고 하지요. 이 서점을 이어받은 박인환 시인의 ‘마리서사’에도 폴 엘뤼아르의 호화판 시집, 일본 모더니즘 잡지 등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 서가를 메웠다고 합니다. 그 귀한 책들을 내놓은 오장환, 박인환 시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아마도 저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한 번 내놓으면 다시 구하기 어려운 책일 텐데, 왜 서점을 열고 다 내놓았을까.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였을 것 같아요. 일종의 살롱이겠네요. 판을 벌이는 일이겠어요. 뭔가 도모해보려는 것이지요. 오장환 시인은 ‘남만서고’라는 출판사를 함께 운영했잖아요. 서정주 시인의 『화사집』을 초호화판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박인환 시인은 서점 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소질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드나드는 문인, 예술인 등과 교류하며 자신의 문학적 토양을 다져간 것은 분명하지요.
나는 등단한 지 오래되었고 시집도 여러 권 출간했으니 굳이 세간의 이목을 끌어서 뭔가 도모해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책방에서 책을 앞에 두고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게 어떤 형식을 갖추게 될지는 지금도 잘 모릅니다. 제가 아직 모르는 저자가 올 수도 있습니다. 책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오기도 하고요. 화가들과 협업을 하게도 되더군요. 이런 일들이 흥미롭습니다. 책을 만들고 내놓고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니까요.
이야기가 태어나는 ‘공유지’에서
출판사 겸 책방을 열고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강좌를 개설하는 것이었어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지요. 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해를 넘겨 강좌를 이어갔지요. 내가 맡은 <목요詩회>는 시 읽기 모임으로 꾸려갔습니다. 시를 창작하는 이들에게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함께하면서 시의 깊이를 만나게 되리라 기대했지요. 현대시가 난해합니다.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시의 이해불가능성 때문에 시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시의 깊이를 경험하게 하는 일은 꽤 즐겁고 흥미로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읽을 줄 알아야 비로소 쓸 수 있다는 게 제 오랜 생각이었으니까요.
월요일에 모이는 <인문독회>는 이성혁 문학평론가를 중심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에로스와 사랑을 주제로 관련된 인문학 도서를 읽었지요. 세미나 형식이지만, 자유로운 토론이 매력적입니다. 전공도 나이도 다른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인문학을 일상생활에서 다시 해석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요일에는 책방연희 대표인 구선아 씨가 진행을 맡아서 독서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책방모임>이라는 가장 단순한 이름으로 모였는데, 점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서 한때는 자리가 꽉 찰 정도였지요.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하고 선정해서 함께 읽는 모임이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곳은 ‘공유지’라고요. 시를 쓰는 사람에게 공유지는 자멸의 장소가 아닐까요. 꿈을 꾸고 문장을 쳐서 시를 올려놓아야 하는데,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공유지에서 창작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바로 경험이에요. 이야기지요. 꿈꾸는 것만으로는 안 되지요. 젊은 나이라면 추상에 기댈 텐데, 이젠 그게 어려워요. 사람과 만나야 해요. 상황이 만들어지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이지요. 도정일 선생은 “이야기가 없으면 원숭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게 제 문학의 근원입니다. 그러니 이 공간에서 사람들과 만나야지요. 만나고 섞이고 흘러가면서 또 다른 시간이 탄생할 거예요.
추천 도서 : 이태준 『무서록』
- 김태형
- 1992년 [현대시세계]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고백이라는 장르』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시선집 『염소와 나와 구름의 문장』, 산문집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아름다움에 병든 자』 『하루 맑음』 『초능력 소년』 등이 있다.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
theotherk@naver.com
인스타그램 @bluepape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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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섞이고 흐르는 푸른 공유지
예술가의 책방⑨ 청색종이
정말 너무나도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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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책방⑨ 청색종이
정말 가대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