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제주에 발을 디딘 지 12~13년이 넘어가고 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 그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서울에선 이젠 없어진 줄 알았던 봄과 가을을 제주에선 충분히 즐길 수 있고, 봄의 하늘은 회색과 누런색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이곳 제주의 봄 하늘은 맑디맑은 푸른색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제주의 봄과 가을은 서울과 같이 스치듯 지나가며 사라지고 급기야 공기청정기까지 틀게 되었다.
  • 하도리 굴동 해녀와 작업한 《2019 바다 사람 예술 展》 (왼쪽부터) <떼> <여자>
유리조각, 공룡인형, 냄비, 주사기
바다는 어떨까? 바다의 변화를 직접 몸으로 느끼는 이들이라 하면 제주에선 바로 해녀가 떠오른다. 이런 이유로 해녀들과 여러 콜라보 작업을 하다 보니 10여 년 전과 달리 이제는 바다에 물건(소라, 전복 등 채취 가능한 해산물)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많은 이들이 ‘해녀’ 하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옛날이야기다. 물질만으로 아이들 공부시키고 집 사고 땅 사는 이야기는 이젠 불가능하다.
나에게 자연의 유토피아로 여겨졌던 제주는 이제 여러 고민에 싸인 섬이 되었다. 바닷가에 나가면 유리 조각들이 파도에 마모되어 작은 보석과 같이 반짝거린다. 너무 예뻐 미술 작업에 쓰기 시작했던 재료일 뿐이었는데 엄청난 양의 유리를 보며 의아함을 갖기 시작했다. 이 많은 유리가 왜 여기 있을까? 어디에서 온 거지? 마모된 유릿가루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파도에 쓸린 유리, 유목을 줍고 있으면 해변과 어울릴 리 없는 장난감, 슬리퍼, 공룡인형, 각종 캔, 냄비, 심지어 주사기까지 발견하게 된다. 태풍이 지나간 바닷가는 더욱 심각하다. 바다에 저 많은 쓰레기가 떠다니고 있었구나. 해안 마을 주민들은 태풍이 지나간 뒤 해안청소가 하나의 큰일이 되었다. 해안에 떠밀려온 쓰레기더미를 보면 그 누구더라도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얘기하고 보여주는 쓰레기보다 내 눈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는 쓰레기는 더 충격적이고 머리와 가슴을 깊이 있게 ‘쿵’ 친다.
처음 아이들과 수업하며 놀란 것 중 하나가 작은 색종이 하나도 흠집이 있으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찢어진 것, 부분을 사용한 것 등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음에도 아이들은 버린 후 새것을 꺼내 들었다. 아이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인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정말 물자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구나.
  • 업사이클링 미술수업
쓰레기에서 쓰임으로
업사이클링 미술수업을 중점적으로 한 지 7~8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다시 사용 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기 시작했고, 어른들도 집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와 어떤 작업을 할지 함께 고민한다. 때론 전문적으로 작업하고 있는 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며 작업하는 참여자들을 보며 많은 사람의 생각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좋은 방법들이 나올 수 있겠구나!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만들기 작품은 사실상 이후 다시 쓰레기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잘 재활용될 수 있는 쓰레기를 오히려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 수업을 계속하며 이런 고민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조금 수그러졌다. 더럽다며 쓰레기 재료를 만지기 꺼리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쓰임을 찾고 재료로 인식하고 받아들였다. 인식이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만으로도 큰 발걸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계속 고민이 든다.
‘쉽게 생각하자. 단순하게 생각하자. 어마어마한 활동을 해야 하고 대단한 아이디어를 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생각으로 시작해본다. 만들기에서 마분지는 일반 과자상자를 사용할 수 있고, 귀여운 인형을 만들 땐 안에 넣을 솜 대신 자투리 원단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록달록 색종이는 다양한 비닐과 포장재, 전단, 잡지 등에서 더 풍부하고 다양한 색을 찾아낼 수 있다. 물감, 페인트 등 채색재료와 접착, 연결을 위한 재료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재활용해 만들어보자.
가능하였다. 여러 과자 상자, 찢어진 잡지, 포장 종이 만으로도 아이들은 멋진 도시락, 햄버거 세트 등을 만들어내었고, 바다에서 주운 유리 조각, 병뚜껑, 스티로폼 조각 등을 이용해 훌륭한 해변의 모습을 표현해내었다. 여러 현수막을 모아 아늑한 아지트를 만들 수 있었고, 버려지는 홑이불은 몽골 텐트가 되었다. 위의 모든 것들이 무리 없이 만들기, 표현하기의 재료가 될 수 있음에도 새 재료를 사고 이를 이용해 또다시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다시 새 재료를 사고 반복해서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느려도 단순해도 괜찮아
수업 기간 중에 한 번은 꼭 해안정화 활동을 함께한다. 아이들과 쓰레기를 줍고 주운 쓰레기를 해안에 펼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아이들은 주운 재료로 재미있는 형상을, 때론 의미 있는 형상을, 어떤 경우엔 어른들은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낸다. 만들어졌던 형상들과 이야기들은 분해되어 다시 쓰레기수거 마대에 담긴다. 요즘은 아이들과 함께 플로깅(plogging)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쓰레기를 줍기만 하기보다 그것들을 이용해 한 번 더 예술놀이를 해보는 건 어떨까.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하고자 한다면 시작이 어렵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걸 해도 될까, 이건 부족한 거 같은데, 생각만 하다 무수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다. 엄청난 부담감까지 생기게 된다. 단순하게! 쉽게! 느리게 가도 된다. 조금 느린 속도의 걸음이라도 찬찬히 그것들이 쌓이면 우리는 어느새 훌쩍 나아가 있고, 가는 방법, 속도 모든 것이 조금씩 조금씩 더 좋아지지 않을까. 남의 속도가 아닌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고 그것에 맞게 하나씩 나아갔으면 좋겠다.
정희선
정희선
프로젝트그룹씨앗(sea art) 대표. 바다에서 놀다가 바다에 버려진 유리조각, 나무조각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현재 업사이클링아트 작업과 교육, 비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업사이클링아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함께 하고 있다.
sunnyro6@hanmail.net
유튜브 프로젝트그룹씨앗
인스타그램 @waterheat
사진 제공_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