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사람이 없다, 청년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한참이다. 저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문화 불모지라 부르기도 한다. 한달살이, 청년창업, 로컬크리에이터 육성 등 지역 활성화 정책이 진행 중이지만, 정작 어떤 실효성을 갖는지는 미지수다. 어디까지나 서울을 기준점에 두고 지역을 지방화시켜온 오랜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줄 세우기 방식이 붙여넣기 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누군가의 성공이 모두의 성공이 될 수 없는 까닭은 저마다의 다른 사정과 속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그 와중에 경남 함양에서 만난 빈둥협동조합(이하 ‘빈둥’)의 행보에는 잔잔한 울림이 있다. 지역에서 자기다움의 항해를 하면서도 마치 부표처럼, 다른 이들의 항해를 돕는 항로 표지 같은 느낌을 준다. 너무 뚜렷한 선을 긋게 되면 그 안에 갇힐 위험도 있기 마련인데, 빈둥에는 진지하되 가벼운 태도로, 지역에 존재하되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새로운 부표가 나타나면 밀려나는 것도 기꺼워하는 마음을 미리 느껴보기 위해 빈둥을 찾았다.
빈둥대는 시간 속에 싹트는 것들
김찬두 빈둥협동조합 대표와 만나기 위해 카페빈둥에 들어서려던 순간 유리창에 새겨진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MY TIME IS MINE’ 당연한 말 같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화예술 현장을 지원하는 행정전문가로 일하던 그가 2012년 귀촌을 결심하며 내건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귀촌을 고민하던 시기에 『게으름을 떳떳하게 즐기는 법』(톰 호지킨슨)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거기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게으름의 반대가 뭘까? 근면성실은 언제부터 이렇게 중요하게 된 걸까? 그리고 누가 원하는 걸까?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용어이고 지배자의 용어예요. 서울에서 하던 일도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내 일은 아닌 것 같았어요. 이제는 내 일을 내가 설계하고 내 시간은 내가 컨트롤하자는 생각이 들면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함양에 오게 됐죠.”
– 김찬두 빈둥협동조합 대표
‘빈둥’이란 이름도 그렇게 탄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근면성실’에 저항하고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자본시장에 의존하는 삶 말고 조금 덜 소비하되 좀 더 창의적인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는 빈둥대는 시간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며 재미난 일로 연결될 가능성을 믿었다. 같은 해 오픈한 ‘카페빈둥’은 그런 가능성이 개인의 삶에서 나아가 마을 공동체 안에서 피어나도록 다양한 일들을 실험해보는 공간이다. 크고 작은 문화공연과 영화제, 장날, 모임 등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했고, 뭔가 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공간을 내어 주기도 했다. 자연스레 이곳을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느슨한 관심 그리고 연결
빈둥협동조합도 거창한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이왕 귀촌했으니 농사로 자립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2015년부터 몇몇 사람들이 모여 밭을 빌리고 유튜브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농땡이농장이라 이름 붙였다. 물론 시장경제시스템에서 승부를 볼 만한 소득을 얻진 못했다. 애초에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농땡이 농부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동료가 되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농땡이밴드도 만들었다. 귀촌 후 1~2년이 지날 무렵 자주 오던 도시 친구들의 발길이 끊길 즈음, 소소하지만 마늘, 당근, 사과 등 수확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반응이 좋았다. 직접 농사지은 것과 지역 농부의 과일이나 채소, 주전부리 등을 보내면서 당시 지역살이의 고민도 함께 적어 보냈다. 그렇게 ‘이곳’과 ‘저곳’의 소통 고리를 놓치지 않고자 했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밴드(Band)’라는 말은 문화인류학 용어로 ‘생계와 안전을 위해 느슨하게 조직된 소수의 핵가족 집단’이라는 뜻이 있었다. ‘부족’보다 작은 개념으로 작고 느슨하다는 의미가 좋았다. 다시 말해 농땡이밴드는 농사와 문화를 매개로 도시와 농촌 간의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는 집단이었다. 농사를 짓는 동시에 문화를 짓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열린 지역의 판, 모이는 문화
자연스레 농사에서 문화로 영역이 확장되면서 2019년 문화가있는날-지역문화콘텐츠특성화 사업에 참여했다. 한 달에 한 번, 누구나 문화를 담을 수 있는 판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세련된 문화행사를 하는 건 재미없었다.
“문화놀이장날(문놀장)은 사실 거창한 게 아니에요. 공연이나 문화적 행위들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놀이터처럼 펼치는 거죠. 비록 엉성할지라도 빗자루 하나, 줄넘기 하나만 가지고도 몇 시간씩 노는 그런 곳이요. 주변에 보니 그런 작업하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그저 마켓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좋은 문화 콘텐츠로 보였어요. 그래서 저희는 판만 깔아놓고 여럿이 와서 채우는 형식으로 ‘한 달에 한 번 그곳에 가면 문화가 있다’ ‘문화가 있는 날이 별건가’ 이렇게 접근한 거죠. 농자재로 수영장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시골에서 쓰는 그늘막 같은 걸로 장식하기도 했어요. ‘이 장소가 이렇게 될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함이랄까, 그런 재해석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어떤 공간을 해석하고 우리가 직접 만들고 설치하는 거죠. 물론 힘들긴 하지만 여전히 계속해나가는 큰 힘은 많은 사람이 즐거워한다는 사실이에요.”
올해로 벌써 4년 차에 접어든 ‘문놀장’은 해를 거듭하면서 참가자들이 주축이 된 마켓 기획단, 놀이 기획단 등을 꾸려졌고 김 대표는 발로 뛰며 지자체 부담금도 매칭해 냈다. 5년 차 종료 후에도 지속할 수 있도록 주민 주체를 발굴하고 커뮤니티 안정성을 기를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전문기획자나 특정 그룹에 의한 행사가 아닌, 좀 덜 세련되고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며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 중요하기에. 공연, 마켓, 놀이터라는 플랫폼에서 어떻게 하면 주민이 더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계속 있길 바라요. 누구든 지속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판만 열어놓으면 누군가 벼룩시장도 열고, 버스킹도 하고, 팝업 놀이터를 열 수도 있어요. 그게 다 지역의 문화콘텐츠인 거죠. 그 판만 지속적으로 유지되면 계속해서 또 다른 것도 담을 수 있는 거죠.”
작은 변화들, 지역이 주는 경험과 용기
처음 이주했을 때는 함양이 그저 ‘서울 아닌 곳’이었다면, 점차 자신의 삶터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으며 지역의 문제를 발견하거나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카페빈둥을 거점으로 한 커뮤니티와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나 ‘경남지역문제해결플랫폼’ 등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해답을 찾기보다는 누구나 주체가 되어 목소리를 내고 실천해볼 수 있는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지역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스스로 작게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 작은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육아모임이나 마을학교 사업, 군민원탁토론회를 열기도 했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지역의 누구든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함양 작은변화네크워크’를 만들게 되었다. 결국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작은 변화를 만드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변화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서울에 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을 너무도 많이 했다. 카페를 만들고 농사 베이스의 협동조합을 만들어보고 내 땅 하나 없이 임대로 농사를 지어 판매하고 활동을 지지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잇기 위한 밴드를 해 보기도 했다. 카페를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고 지역 문제들을 발굴하고 캠페인을 하거나 조사를 하기도 하고, 언론에 알리거나 지역 의원이나 군 관계자들을 찾는 등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뛰어다녔다. 다 처음 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애들이 지역의 작은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육상대회를 하는데,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학생이 별로 없다 보니 100m, 50m 달리기도 출전하고 높이뛰기 나갔다가 심지어 투포환도 해요. 누군가는 그게 싫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게 다 기회거든요. 저는 그런 걸 기회로 보는 사람이에요. 안 해 봤던 일들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해요.”
누군가의 비빌 언덕, 다음 동료를 기다리며
함양에 온 지 10년이 채워질 즈음,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빈둥을 찾았다. 서하면에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청년 플랫폼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에 관한 의견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지역에 둥지를 틀 무렵 이런 도움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이야기를 풀어내다 어느새 사업 주체로 참여해 청년레시던시 플랫폼인 ‘서하다움’을 올 초 오픈하게 되었다. 공유 하우스, 공유 오피스, 스마트팜, 목공작업실, 카페 등 건물은 조성됐지만 운영 예산은 없는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어촌상생협력기금과 경남지역문제해결플랫폼, 함양군 등과 사업비를 만들어 공간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워 넣는 동시에 운영프로그램인 ‘삶·일·놀이 캠프’를 꾸릴 수 있었다.
‘삶·일·놀이 캠프’는 3주+α 동안 전국 각지에서 온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지역 탐색, 지역문화 활동, 로컬 삶기술 배우기, 농사 일손 돕기 등 지역민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시간을 통해 지역에서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탐색하면서 한편으로 예술 워크숍, 질문 워크숍, 글쓰기 워크숍 등 나와 서로를 알아가고 지역에서의 문화적 일을 상상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지역을 시골이라는 이미지로만 보거나 TV 예능에서 소비되는 방식이 아닌 지역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게 핵심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그렇듯 이곳에도 다양한 삶이 있고, 처해 있는 여러 상황과 문제가 있다. 이는 구경꾼이 아니라 살러 온 사람들에게야 보이는 진짜 모습들이다. ‘삶·일·놀이 캠프’를 통해 조금이나마 지역의 삶을 경험해보고 이를 통해 지역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이를 통한 삶의 선택지가 넓어지길 바란다.
“여기가 아니어도,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그런 대안 하나가 생기는 거, 로컬을 좀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기는 거 그런 걸 바라요.”
앞으로는 한달살이 프로그램이 아니라 1~2년 이상 이곳에 살아보고자 하는 청년들을 위한 장기적인 방안도 필요한 상황이다. 아무래도 캠프는 체험형의 단발성 고비용 프로그램이기에 지속가능성이 작다. 이보다는 지역에서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삶과 문화를 그리는 이들의 안정적인 주거를 위해 필요한 빈집을 찾고 지역자원을 활용한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우선은 지역민과 관계 자본을 형성하고 청년들과 연결하는 역할을 하려 한다. 지역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완충재이자 쿠션이고 싶다. 그렇게 다음 동료들을 만나길 고대한다.
“‘빈둥’과 ‘서하다움’이 누군가에게 비빌 언덕이 되면 좋겠어요. 지역에 오고 싶어도 비빌 데가 없으면 더 어렵거든요. 저희가 누군가에게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 되면, 잠시든 오래든, 와서 배우기도 하고, 거들기도 하고, 머물기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좀 높지 않을까 해요. 그렇게 지역에서 이런 일을 해 나갈 다음 동료들이 나타나길 바라요. 나이가 들면 좀 더 젊은 세대들이 이 일도 맡아서 하길 바라고, 나는 누군가를 따르는 뒷방 노인네가 되면 좋겠고요. 하하. 그렇게 계속되면 좋겠어요.”
자기다움의 삶을 찾아 둥지를 튼 지역, 그곳에서 얻은 경험과 용기 그리고 관계 자본을 독식하지 않고 다음 동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빈둥의 모습에서 지역과 문화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계속가능성의 수식을 본다. 그들의 남다른 빈둥거림이 계속되길 응원한다.
- 안진나
- 도시의 다양한 레이어를 파고들며, 잊혀진 기억을 불러들이고 사라져가는 문화를 기록하고 현재와 이어 나가는 일을 한다. 이를 통해 지역이 총체적으로 읽히고 해석되며 다시 이야기되길 바라고 있다. 현재 대구 북성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도시야생보호구역 훌라HOOLA’의 디렉터를 맡고 있다.
인스타그램 @rageyen - 사진제공_빈둥협동조합 www.bindo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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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성실에 저항하고 거부한다
멋진 구호입니다 ^^
다른 삶의 메타포이자 넉넉한 비빌 언덕
빈둥협동조합이 추구하는 지역살이의 계속가능성
잘 보고 갑니다
다른 삶의 메타포이자 넉넉한 비빌 언덕
빈둥협동조합이 추구하는 지역살이의 계속가능성
기대만점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제 속의 행복을 찾아 용기를 내야겠어요.
정말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