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책방 문을 여는 남편에게 나는 20년째 묻는다. “그렇게 일찍 책 사러 오는 사람이 있나?” 그럼 남편은 어김없이 대답한다. “아버지는 6시에 책방 문 열었다아이가!” 그렇게 아버지가 걷던 길을 따라 남편은 26년째 책방을 지키고 있고, 아버지의 일생과 아들의 청춘을 오롯이 담은 청학서점은 올해로 환갑을 맞이했다.
1961년 8월 18일 밀양 내일동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밀양 시민의 사랑을 받아온 책방이건만 세상의 긴박한 변화를 거스를 순 없었다. 사람이 넘쳐나던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밀양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청학서점의 위상도 순식간에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다음 내리실 곳은 청학서점 앞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는 정거장 이름이었고, 밀양 사람들의 약속장소였고, 시내와 전통시장 나들이를 하는 사람들이 들리는 사랑방이었던 청학서점 역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3년 전 현재의 삼문동으로 서점을 옮길 때 사람들은 번듯한 건물을 지어서 이사했음을 축하해 주었지만, 나와 남편은 예전 서점 앞을 지나다닐 수도 없을 만큼 상실감과 비통함이 컸다. 밀양 사람들의 뇌리에도 청학서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내일동 그곳이었기에, 밀양시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 청학서점을 ‘경상남도 교육지원청 햇살학교’로 변신시켜 서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공연, 전시가 함께하는 입체적인 독후활동
‘책과 문화가 있는 공간’은 문화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청학서점의 또 다른 이름이다. 10년째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다락방’을 필두로 ‘멜로디’ ‘불특정다수’ ‘북센스’ ‘막독’ ‘고독’까지 6개의 독서모임이 꾸려지고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펼쳐지는 동네책방! 청학서점에서 독서의 정의는 그저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책을 매개로 하여 음악, 미술, 전시, 강연 등의 영역으로 확대된 예술적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함께 읽고, 함께 연극을 보고, 햄릿을 연기한 배우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학생 곽명주는 잘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 지역민과 재능을 나누고, 밀양의 농부 손별은 직접 농사지은 차로 다도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도 책방에서는 슈만이 작곡한 <카니발>을 사진으로 표현한 구본숙 작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음악을 사진으로 형상화한 만큼 8명의 저명한 피아니스트들이 모델로 참여하였다. 그중 정지원 피아니스트는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직접 슈만의 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작가가 도슨트가 되어 직접 안내하는 사진전을 관람하고 사진 속 모델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 것과 같은 입체적인 독후활동이 청학서점에서는 매달 넉넉하게 준비된다.
작은 진심들이 모이는 문화사랑방
밀양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 책방에서 어떻게 이런 행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단연코 ‘사심 없는 열정’과 ‘진심 어린 관심’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의 과정을 통해 끈끈하게 이어 온 인적 네트워크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밀양의 아이들과 합주하는 공간, 빅밴드 볼케이노의 재즈 공연이 펼쳐지다가 명무 김지립의 우리춤이 공연되는 변화무상한 공간. 책방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는 피아니스트 박상욱과 첼리스트 이호찬의 리사이틀로 채워지는 등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책방에서 벌어졌다. 책방은 사심 없는 열정으로 기획하고, 밀양의 관객들은 진심 어린 관심을 쏟아내었다. 연주자와 관객은 숨소리를 공유하며 서로에게 감동받는 아름다운 기적을 줄기차게 탄생시키고 있다.
작은 기적은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지고 책방은 진정한 동네 문화사랑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체적인 문화행사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의 관심이 닿아 더욱 풍성해졌다. 아르코 작은미술관 지원사업으로 탄생한 ‘누루미술관’은 2년째 책방에서 작가와의 만남을 진행하고 있고, 밀양문화재단 또한 책방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책방을 방문했던 예술가들은 청학서점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설파하며 또 다른 예술가들의 방문을 이어주는 숨은 조력자가 되었고, 밀양 사람들은 든든한 책방 서포터즈로 버티고 있다. 책방지기의 작은 진심에 다양한 사람과의 따뜻한 연대가 녹아들어 변화무상한 세상 속에서도 청학서점의 굳건한 존재감은 지속되고 있다.
청학서점의 추천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독서모임을 10년째 이끌어 가는 나에게 많은 사람이 질문한다. 여섯 개나 되는 모임을 꾸려나가기 힘들지 않으냐, 책을 어떻게 다 읽느냐, 도대체 무슨 책을 읽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늘 한결같이 “재밌어서 힘들지 않다”로 귀결된다. 특히,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지면서 반복독서의 특별함을 깊게 의식하게 된다. 최근 다시 읽은 『데미안』은 성장소설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나의 삶에 큰 응원이 되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
세상 유명한 이 구절이 참으로 간절하게 다가왔다. 책방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깨고 문화공간으로 인식되기까지 노력한 지난 10년의 투쟁은 나에겐 알을 깨는 과정이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아브락삭스는 정형화되지 않고 개성 넘치는 책방을 지향하는 청학서점의 방향성을 뜻하는 듯하다.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거예요.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에바부인이 싱클레어에게 말하듯 간절히 부르고 갈구하면 그 부름은 응답되어진다. 특별한 선물은 행운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되는 것이다. 앞으로 동네책방의 미래는 또 다른 알 속에 던져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투쟁하고 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날아가면 된다. 간절함에 응답해 주는 기적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동네책방도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는 이유이다.
이미라
이미라
청학서점의 고객이었으나 책방 아줌마가 되었고, 벌써 20년이 흘렀다. 성실한 남편이 서점 운영에 매진하는 동안 책방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일 찾기에 몰두하고 있어 청학서점 매니저로 불린다. 문화잡지 PAPER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간간이 지역의 문화행사를 기획하면서 비전문적인 다양한 방면에서 신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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