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의 황량한 시멘트 담장, 분주한 기차역 풍경, 아이템 일번지 전자상가, 대한외국인들의 고향, 핫플의 성지로 대변되는 용산. 서울의 중앙부에 자리한 만큼 크고 작은 소란이 끊이지 않는 용산의 한 가운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가 있다. 편의점보다 구멍가게가 익숙하고 집집마다 고무 양동이에 키운 상추며 고추가 골목의 풍경을 만드는 곳. 자동차 소리보다 바람 소리가 가깝고 60년 넘은 운동장에서 메아리치는 함성이 여전히 골목을 메우는 곳.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에는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 산다.
효창동의 느린 시간을 쫓아서
고백컨대, 효창동과의 첫 인연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다양한 이유로 도합 네 곳의 작업실을 전전했는데, 그중 나의 의지로 이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지없이 건물주의 요청으로 새로운 작업실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관심은 오로지 월세가 싼 동네, 월세가 오르지 않을 동네였다. 서울 시내에 이토록 비현실적인 미덕을 갖춘 동네가 어디 있으랴, 싶던 찰나 발견한 곳이 바로 효창동이었다. 낮은 월세를 쫓아 선택의 여지 없이 흘러들어온 곳이었으나, 재개발이 요원해 보이는 구옥 단지의 평온함은 불안감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효창동의 느린 시간은 각박한 마음에 여유를 찾아주었다. 사소한 풍경을 눈여겨보고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이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이곳의 느린 시간에 매료된 건 십년지기 작업실 메이트도 마찬가지였다. 효창동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그는 사무실에 딸린 10평 남짓의 공간에 동네를 위한 작은 문화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동네 건축가, 동네 예술가로서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건축가인 그는 효창동의 길과 나무와 바람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상상했고, 작가인 나는 효창동의 사람과 이야기가 모여드는 공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2021년 가을, 책(書)과 이야기(談)가 머무는 작은 도서관, 효창서담이 문을 열었다.
모여서 함께 읽어도, 은밀히 혼자 읽어도
효창서담은 효창동 주민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지향한다. 좋은 책과 소소한 이야기가 모이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서담(書談)이라 이름 지었다. 처음 열었을 때 가장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인근 중학교 학생들이었다. SNS에서 오픈 소식을 보고 찾아왔다던 그들은 이것저것 아무 소설이나 꺼내 읽거나 시험공부를 했다. 차츰 성인 이용자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부터 절로 발길을 끊었는데 나는 여전히 첫 단골 이용자였던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효창서담은 자유이용과 예약이용으로 나누어 운영된다. 자유이용 시에는 주로 산책하던 동네 주민이나 공원에서 데이트하던 커플들이 쉬었다 가곤 하는데, 무엇보다도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조용히 앉아 그 정취를 즐기기 좋아한다. 매주 꾸준히 방문하는 이용자들을 위해서는 도서관 카드를 마련했다. 이용자가 방문 일자와 읽은 책의 제목을 적어 넣는 옛 방식의 카드인데, 나만의 독서 기록으로 한 달 한 달 채워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효창서담은 현재 196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과 한국 시집만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뚜렷한 주제의식이나 세태 분석을 기반으로 한 선택이 아니라 소설만을 편독해 온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공유 공간을 목표하는 한편, 수줍은 독자를 위한 은밀한 서가, 나만의 사적인 책방을 지향하기도 한다. 때문에 시각적으로 거리와 연결되는 개방적인 공간 외에도 서가 안쪽으로 별도의 골방을 두어 폐쇄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을 확보했다. 서담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도 이러한 이중성을 담고 있다.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해 같은 책을 읽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여서담’이 만남과 공유를 위한 모임이라면, 약속된 시간에 각자의 독서만을 즐기다 헤어지는 ‘사적인 독서모임’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위한 것이다. 여러 이용자가 사적인 독서모임을 특히 흥미롭게 생각하는데, 스스로 행동을 강제해서라도 넷플릭스 대신 독서를 선택하고 싶다는 마음에 쉽게 공감하는 듯하다.
만들고 짓는 이들을 위한 응원과 존중
효창서담은 독자를 위한 공간을 넘어 창작자를 위한 플랫폼이 되기를 목표한다. 이는 나 또한 오랜 시간 창작자로 살아온 경험과 관련이 있다. 여전히 많은 창작자가 소수의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시스템하에서 상처받고, 예산과 마감에 밀려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 앞에서 좌절한다. 효창서담에서는 존중과 격려, 성실한 비판과 애정 어린 지원을 통해 창작자의 성장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 모임 ‘효창글담’은 새로운 창작문화를 위한 작은 실험이다. 효창글담에서는 소설과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는 창작자들이 모여 매일 글을 쓰고 이를 공유하고 있다. 참여자들은 모두 스스로 열정적인 창작자인 동시에 서로의 성실한 독자가 되어주며 함께 창작하고 같이 성장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창작문화실험은 이후 독립출판 모임, 영화제작 모임 등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창작자와 창작물을 존중하는 문화, 따뜻한 관점으로 더 나은 활동을 지지하는 문화가 더 많은 이들에게 확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효창서담의 추천 : 이승우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
“세상이 요동칠 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없다.” (작가의 말)
이승우는 유배하는 삶과 구원으로서의 죽음, 이곳과 저곳, 나약한 존재의 사랑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집요한 문장을 통해 사유하는 작가다. 그는 열 번째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문학동네, 2017)을 통해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관계, 보았다 확신했던 사실, 이해한다 여겼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고 의심한다. 이 과정에서 관계는 와해되고 세상은 낯설어지고 존재는 외로워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질문에 주목한다.
“쉽고 단순한 파악을 일삼아온 사람은 쉽고 단순하게 파악되지 않은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불확정의 상태로 내버려져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쉽게 결론 내리고 의심 없이 믿어야 편하기 때문에 쉽고 결론 내리고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럴 때 그에 의해 파악된 것은 그의 믿음 외에 무엇일까. 그가 믿고 싶은 것 말고 다른 무엇일 수 있을까.” (「모르는 사람」)
지난 몇 년간 전 세계를 공포와 절망으로 몰아넣은 코로나19로 우리는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과정을 목도했고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다시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 허구에 가까운 세상에서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 박유미
- 설치와 영상을 중심으로 작은 서사에 주목하는 미술작가. 2018년 개인전 《바다에서 만날까》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글과 영상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2018년 <찔레꽃>을 연출했다. 현재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 ‘효창서담’을 운영 중이다.
gomako19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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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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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화창한 오후 책방 모임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가는 기분이 드네요 😀
독자와 창작자가 함께하는 효창서담. 작은도서관의 미래같습니다. 저도 작은도서관 운영자로서, 서비스만 생각할 때는 흥이 나지 않았는데, 창작을 뒷받침하는 모임체가 가동되니, 기사를 읽기만 해도 힘이 나네요^^
천천히 걷는 골목, 이야기가 머무는 자리
예술가의 책방① 효창서담
정말 너무나도 공감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