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한 라디오 방송에서였다. 그는 자신을 가장 ‘무명한’ 시인으로 소개했고, 나중에는 그가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그림 화가로 활동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나와 함께 공연을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작사가로도 활동하게 된다. 그의 예술은 늘 끊임없이 변화를 꿈꾼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시를 쓰는 마음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늘도 시 한 줄을 새기고 있는 글마음조각가 김정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인이자 왼손 그림 화가 그리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계시다. 특히 ‘글마음조각가’라는 별칭이 가장 눈에 띄는데,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죽고 싶을 만큼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되지는 못했다. 소위 신춘문예와 같은 중앙문단의 등단 절차를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정배 교수는 2002년 사이버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문단 구조상 시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예술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나만의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글마음조각가’라는 이름을 자처했다. 이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 문학평론, 핑거포토그래퍼, 작사가 등의 활동을 통해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그리움을 마음에 새기며 살 수 있는 ‘글마음조각가’가 되었다.
부캐의 원조라는 소문이 있다. 다양한 부캐를 만들며 여러 활동을 지속해서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놀면 뭐하니?>가 처음 방송되었을 때, 지인이 나를 보면서 “<놀면 뭐하니?>의 원조가 여기에 있는데….”라고 농을 던졌다. 부캐 활동은 아일랜드 출신 경제학자이자 매니지먼트 사상가인 찰스 핸디(Charles Handy)가 『포트폴리오 인생』이라는 책에서 강조한 개념이다. 지금의 시대는 전문가처럼 한 가지 일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 활동과 취미의 영역을 다양하게 가꿔가는 사람을 원한다. 당연히 직장과 직업이 구분된다. 인간에게 입은 하나지만, 때로 음식을 먹는 입과 말을 하는 입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입 등으로 다양하게 변용될 수 있다. 삶의 풍경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생성되는 부캐는 실패의 가능성을 줄여준다. 부가적인 캐릭터가 많아지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변별점이 필요한 시대이다. 불안하고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일을 설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도전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그게 문화예술의 활동과 연결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왼손 그림 화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이와 관련하여 올해 두 권의 책이 나오는 거로 알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 활동이 완벽하길 기대한다. 때로 강박증에 가까운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예술은 ‘실패’해도 괜찮은 영역이다. 지금까지의 예술 활동은 늘 잘해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해왔다. 못하는 것도 실력이 될 수 있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 그릴 거야’ 왼손 그림 화가를 선언했다. 물론 손의 감각을 바꿔 그림을 그리던 방법은 이전에도 존재했다. 다만 그림에 아이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노자가 말한 ‘홀황(惚恍)’이다. 순우리말로 하면 ‘어리벙벙’을 뜻한다. 올 연말에는 그 기록을 담은 두 권의 책이 출간된다. 한 권은 왼손 그림 시화집이고, 또 한 권은 강윤미 시인, 오은하 재즈피아니스트와 함께 한 시그림 아트북이다.
복합문화지구 누에의 ‘채워가는 미술관’과 ‘꿈꾸는 놀이터’ ‘난나비아 캠프’ 등을 기획하셨다. 그 활동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언젠가 식당에서 만난 한 아이가 나에게 알은척 한 일이 있다. 아이는 나에게 “저 선생님 알아요. 선생님 멋있어요. 저도 선생님처럼 될래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언젠가 내 왼손 그림 전시회를 다녀간 아이 중 하나였다. 아이들이 무명한 예술가를 기억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어쩌면 그것이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유명한 작가를 만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자기 그리움을 마주하게 하는 일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인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원시성과 야생성을 회복하고 싶었다. 또한, 결과물을 함께 공유하며 많은 사람이 예술작품을 채워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복합문화지구 누에가 추구하는 기본 문화예술의 방향은 절대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야 하며, 실패해도 괜찮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 한 뼘 미술관 ‘월간 그리움’
  • 네 뼘 활동
전주의 작은 목욕탕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카페 기린토월에서 한 뼘 미술관 ‘월간 그리움’을 운영하고 계시다. 그 어떤 기관의 지원 없이 운영할 수 있는 비결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작가들과 예술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소통하면서, 그림을 전시하고 그림에 시를 붙이고, 그 시에 다시 노래를 만드는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한 뼘 미술관 ‘월간 그리움’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이 전시를 마친 후 행복해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진정한 의미를 말해준다. 특히 그림과 시 그리고 음악이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설렘을 공유한다는 점은 예술가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화가의 그림에는 시와 음악이 붙고, 시인의 시에는 그림과 음악이 함께 하며, 음악가의 음악에는 시와 그림이 함께 하는 과정에서 예술의 놀라움이 더욱 확장된다. 그 놀라운 경험은 목욕탕의 작은 물탱크 공간이라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여기에 더해 기린토월이 가진 상징성과 예술가의 호기심이 하나의 활동으로 잘 승화되었다고 본다. 익히 아는 이야기이지만, 작은 것은 아름답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예술가의 진정성과 마음만으로도 호혜로운 협업은 가능하다. 이 과정을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증명한 것이라고 본다. 요즘에는 그 행복한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와인 에디션을 제작했다. 예술가와 예술가가 만나 축제를 벌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좋은 매듭이 되어주고 있다.
자신에 대해 늘 실패의 아이콘이라고 이야기하시는데, 본인에게 실패란 어떤 의미인가. 또한, 예술가에게 실패가 주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말씀해달라.
2002년 사이버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화려한 중앙문단을 통해 데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근 20년 동안 정식(?) 시인이 되기 위해 밤낮없이 투고했던 것 같다. 1년에 10군데, 총 20년 동안 투고했다. 200번 떨어졌다. 최종심에도 12번 올랐지만, 결과는 모두 낙선했다. 어느 날 내 원고를 심사한 후배의 전화를 받고 정신이 바짝 났다. 이후 예술가란 실패를 통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019년에는 신춘문예에 200번 떨어졌다는 이유로 <실패박람회>의 상징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참고로, 작가의 등단작은 그 사람의 인생을 대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2002년 당선되었던 내 작품의 제목이 <무명 가수는 누군가를 닮아있다>이다. (웃음) 무명한 예술가일수록 어쩌면 가장 자기다운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지역 청년예술가들이 교수님과 다양한 협업을 하고 싶어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울러 2019년에는 전북 청년예술가 100명이 선정한 제1회 백인청춘예술대상을 받았다. 이 상이 주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내 예술 활동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예술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내 가치관이 통한 것은 아닐까 싶다. 크게 돈을 벌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 그리고 스스로 재미있게 예술 활동을 유지하다 보면 그 재미를 알아주고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사실 어깨에 힘만 빼면 재미도 있고, 소위 예술로도 먹고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증명한 대가가 바로 백인청춘예술대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제1회 수상자인데, 이후 너무나도 좋은 분들이 뒤이어 수상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커지고 있다.
2021 전주독서대전 <너는 신발을 신니? 난 독서대전을 신어!>
현재 전주 남노송동에서 공간, 축제, 문화예술교육 등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 그중에서 올해 아르떼에서 선정된 <인문학×예술 문화자람 야무>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린다.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식으로든 그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주 남노송동에서 진행하는 ‘사회를 마주하는 N개의 문화예술교육’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인문학×예술 문화자람 야무>는 이러한 의미를 함의하는 ‘야무(野蕪)의 정신’을 강조한다. 보통 ‘야무’하면 ‘야무지다’를 떠올린다. ‘야무지다’는 사람의 성질이나 행동이 빈틈없음을 뜻한다. 야무지려면 서로 이물 없이 어울려야 한다. 인공적으로 프로그램이 설계되고 재단되는 게 아니라, 마치 야생의 풀들처럼 서로 엉키고 어울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문화예술의 야생성과 원시성은 회복되고 유지된다. 야무진 곳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들풀 하나하나에 모두 존재가치가 있듯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문화예술교육이 실현되어야 한다. 마을 어르신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습득되는 배움이 있다. 그게 <인문학×예술 문화자람 야무>에서 추구하는 문화예술교육이라 생각한다.
‘당신의 삶이 예술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못하는 것도 실력입니다’ ‘잽,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등의 모토를 청년예술가에게 자주 이야기하신다. 앞으로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문화예술의 방향성이 있다면, 이것들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예술과 삶을 별개로 떼어서 생각한다. 잠을 자는 것도 예술이다. 의자에 앉아 사색하는 것도 예술이다. 골목을 걷는 것도 예술이다. 밥을 먹는 행위도 예술이다. ‘전문가’라는 단어만 떼어놓고 보면, 모든 활동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삶 자체가 예술이다. 잠이 많은 사람이 그 감정을 담아 그림이나 글 그리고 음악으로 표현하는 순간 멋진 예술이 된다.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누구나 하지 않는다. 한 가지 당부를 더 덧붙이자면, 모든 예술은 복싱 선수가 잽(jab)을 날리듯이 하면 좋겠다. 잽은 복싱 용어로 상대를 툭툭 건드려보는 것을 뜻한다. 모든 예술 활동은 처음부터 강력한 펀치를 원하는 게 아니다. 지속해서 나와 경쟁하면서 잽을 날리는 것이 예술이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될 수 있다. 서로를 위협하지 않고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청년예술가라면 결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자신만의 잽을 날렸으면 좋겠다. 반드시 내 영혼을 다 바쳐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날릴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오죽하면 내 영어식 이름이 잽킴(JAB KIM)이겠는가.
김정배
김정배

‘글마음조각가’라는 별칭으로 시인, 문학평론가,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그림’ 작가로 활동 중이다. 정책거점 누에연구소 전문위원, 한 뼘 미술관 ‘월간 그리움’ 운영자, 인문밴드레이(블랙)와 인트로트 인문학 ‘혜니와 남매들’의 프로젝트 멤버이기도 하다. 원광대학교 HK+지역인문학센터 부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융합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포트폴리오 독립생활자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고 있다. ‘가장 무명한 예술가와 작독자의 삶’을 여전히 지향한다. 2020년 제1회 백인청년예술대상을 수상했다. 시평집 『나는 시를 모른다』, 핑거포토포엠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하루』를 썼으며, 전주 MBC 라디오 등에서 페르케스트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blog.naver.com/grigo7
유튜브 www.youtube.com/c/글마음조각가
김지훈
김지훈
문화통신사협동조합 대표. 대금 연주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2016년 전주에서 지역 문화예술 분야 공연자와 공간, 관객을 연결하는 문화통신사를 설립하고 지역문화를 비즈니스 모델로 정립하고 고유예술을 혁신자원으로 탈바꿈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www.cttelecom.co.kr
사진_송재한 사진작가 leaf032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