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복지센터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푸념했다. 오늘은 그저 주는 밥이나 먹고 쓸개 빠진 것처럼 우두커니 있다가 왔다고,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콩 고르기 했다던데요? 치매 예방 운동으로.”
내가 물었다.
“콩 고르라 해서 골랐더니 기껏 고른 걸 다시 자루에 쓸어 담더라고.”
그건 일이 아니라 한다. 밭에 풀을 매도 자리가 나고, 옥수수를 심어도 심은 자리가 나는데, 콩 고르기는 아무 자취가 없으니 할머니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한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안 했으니 아무 이야기가 없을 테고.
- 뻐꾹새 | 이옥남
- 아래 밭에 콩을 심었다. 콩을 심는데 바로 머리맡에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 가지에 뻐꾹새가 앉아서 운다. 쳐다봤더니 가만히 앉아서 우는 줄 알았더니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힘들게 운다. 일하는 것만 힘든 줄 알았더니 우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그렇게 힘들게 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사는 것이 다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5.19.)
콩을 심으면 콩 심는 이야기가 있고, 풀을 매면 매는 동안 어떤 새가 울고, 해는 얼마나 뜨겁고 흘러내리는 땀을 식혀주는 바람은 얼마나 고마운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음식을 차려서 손님을 대접했어도 이야기가 있고, 시장에 가서 친구를 만났어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치매 예방 콩 고르기 활동에는 이야기가 없다. 스스로 작정해서 밀고 나가 이루어낸 게 아니라 남이 정해준 틀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자기 말, 자기 이야기는 할머니가 아니라 콩 고르기 치매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한 강사분한테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
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은 하루 지내면서 자기만의 이야기가 생겨날까. 자기 말을 만들어 갈까. 콩을 자루에 쓸어 담듯 아무 이야기 없이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닐까. 이야기가 있다면 무슨 시간일까. 공부시간에? 쉬는 시간에? 방과 후 시간, 예술 시간에?
- 아침 | 6학년 전민성
- 울퉁불퉁 꾸불꾸불 / 학교 가는 길 / 동쪽은 바다 위에 해가 뜨고 / 서쪽은 든든한 설악산이 인사를 건넨다. / 그사이를 가는 나 / 내가 중심이다. (3.23.)
자기 말이 있는 시간은 자신과 단단하게 이어진 시간이다. 몸과 마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간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말을 거울삼아 새 뜻이 더해지는 순간이 되기도 할 것이고. 아이는 자기 이야기를 통해 저만큼 떨어진 밖에서 나를 보아주는 또 하나의 눈을 갖게 된다. ‘내가 사는 곳이 이런 곳이었구나. 나는 지금 세상의 여기에 서 있구나.’ 보게 된다. 이야기의 힘, 말의 힘 덕분이다.
- 바람 | 6학년 김빛나
- 자전거 타고 학교에 간다 / 휘이이이 후우 드르릉 / 세게 불어오는 바람 / 그래도 난 못 이기지 / 읏차읏차 자전거 페달 밟으며 / 나는 학교에 간다 / 자전거에서 내리면 내가 지는 거고 / 학교까지 타고 가면 내가 이기는 것 / 읏차읏차 더욱더 세게 밟으며 / 나는 학교에 간다 / 드디어 왔다 / 학교에 다 왔다 / 움하하하 바람, / 넌 나한테 졌어. (3.23.)
세게 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눈에 들어오는 모래를 참으며 읏차읏차 전진해서 아이가 가려는 곳은 학교다. 곧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우리 교실로 들어올 것이다. 이 하늘 같은 아이를 어떤 얼굴로 맞아야 할까. 누구의 틀에도 갇히지 않고, 자기 길을 뚫으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시간. 아침에 학교 오는 시간은 온전히 아이의 시간이다.
- 쉬는 시간 | 6학년 백소율
- 지금은 바야흐로 10시 40분 /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 / 시온이는 노래 부르고 / 빛나랑 지후는 수다 떨고 / 탁샘은 춤추고 / 유주는 책 읽고 / 누구는 액괴 만지고, 탁구 치고, 축구하고, / 누구는 거울 보고, 발가락 꼼지락거리고, 하품한다. / 겨울잠 자다 깨어난 개구리처럼 / 시끌벅적 살아난다. (3.30.)
아침에 학교 오는 시간, 수업 시간, 그리고 쉬는 시간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중간이 빠졌다. 수업 시간을 글감으로 잡아 자기 이야기를 쓴 아이가 없다. 생생하게 깨어나는 아이들의 시간이 되도록 하지 못한 교사 탓이 크다. 수업 시간은 자기 이야기가 없는 시간, 개구리가 겨울잠 자는 것과 같은 시간일 것 같다. 우두커니 쓸개 빠진 것과 같은 시간이기도 하고. 아이가 다시 펄떡 깨어난 것은 쉬는 시간, 그리고 공부 마치고 노는 시간이다.
- 딱지 결투 | 5학년 김성욱
- 이안이가 이안이가 / 야 김성욱 딱지 덤벼! / 오레! 덤벼! / 내가 먼저 쳤다. / 뒷면이 나왔다. / 내 마음이 쫄린다. / 아, 망했다. / 딱지는 뒷면이 나오면 / 따질 가능성이 70프론데. / 이안이가 동작을 괴상하고 하고 / 착 쳤다. / 안 넘어갔다. / 이안이 딱지가 뒷면이 나왔다. / 이번엔 내가 / 힘을 주고 하이얍! / 드디어 땄다 / 또 해서 두 개 더 땄다 / 오늘 운이 참 좋다. / 아침에 까치를 봐서 그런가? (6.2.)
어른의 간섭 없는 시간은 맘껏 자기 이야기가 피어나는 시간이다. 따질 가능성이 70%라니,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날카롭고 정확하게 살아있는 순간들인가. 이어지는 시간, 방과후 예술 교육 시간은 어떨까.
- 집중 | 5학년 김성욱
- 방과후 서예시간. / “붓 내려놔!” / 붓 내려놨다. / “왜 집중을 못 해!” / 나는 움직일 때는 집중이 되는데 / 가만히 있을 때는 집중이 안 된다. / 소리치고 뛸 때는 뇌가 움직이는데 / 가만히 있으면 뇌가 안 움직여서 / 바보가 되는 것 같다. / 나는 움직여야 산다. / 내 몸은 땀을 빼야 한다. / 나는 그걸 인정하며 / 벌을 받는다. (4.28.)
방과후 수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는 했다. 자기 길을 뚫어내기는 했다. 예술 교사의 처지에서 보면 씁쓸하겠지.
- 기마자세 | 6학년 신성빈
- 방과후 바이올린 시간 / “준비를 하면 떠들지 말아야지!” / “…….” / “바이올린 들고 일어나!” / “기마 자세!” // 우리는 말을 타고 달린다 / 허벅지 뜨겁게 달린다 / 소리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 아득히 들린다. // 으어~ / 상상의 말을 타고 / 고통을 향해 달려간다. (9.28.)
역시 교사의 틀을 벗어나는 것으로 자기 이야기가 있을 뿐, 방과후 예술 활동 자체에 관해서는 아무 이야기가 없다. 피아노를 치고 바이올린을 켜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지만 온통 남의 시간이다. 남의 틀 안에서 아이들은 겨울잠 자는 개구리의 시간, 쓸개 빠진 것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닐지.
그저 가리킬 뿐, 가르치지 않기
놀이 선생 고무신을 만나는 아이들은 다르다. 끝없이 자기 이야기가 나온다. 고무신이 쓴 책 『자연에서 노는 아이』에서 한 부분을 옮기면 이렇다.
“바람이 만져져요.”
“누가 발을 잡아당기는 거 같아.”
“물이 너무 힘들어 보여.”
“나뭇가지 사이에는 하얀 구름이 떠가. 새가 앉았다가 날아가. 꼬물꼬물 애벌레가 기어가.”
“나뭇잎이 땅에서 말라 버리기엔 너무 예뻐.”
“누가 발을 잡아당기는 거 같아.”
“물이 너무 힘들어 보여.”
“나뭇가지 사이에는 하얀 구름이 떠가. 새가 앉았다가 날아가. 꼬물꼬물 애벌레가 기어가.”
“나뭇잎이 땅에서 말라 버리기엔 너무 예뻐.”
아이들은 자기가 작정한 대로 자기 길을 밀어가고, 자기 세계를 쌓아간다. 고무신은 자신의 틀이 닿지 않을 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툭 던져둘 뿐이다. 아이들이 마주하면 좋겠다 싶어 마음 졸이는 것, 진정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고무신은 어른이나 선생이 아닌 만만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서 부추길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세계가 얼마나 즐겁고 자유로운지 떠올리며 다가가도록.
동네 아저씨 고무신은 가르치지 않는다. 가리킬 뿐이다. “저기!” 하며. 아이 스스로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놀 수 있도록. 특별한 놀잇감도 없다. 원시 그대로, 자연 그대로, 흙에서 놀고 물에서 놀고 나무와 놀고 바람과 논다. 단순할수록 상상력이 피어날 공간이 생길 테니까. 단순하고 더 단순해야 지금 이 순간을 자기 시간으로 채우고, 자기 이야기 자리로 만들 테니까.
흙과 물과 바람과 돌과 나무와 만나는 아이들은 각자의 시간으로, 각자의 몸으로, 각자의 흐름으로 움직이며 어른이 예측하지 않은 도착점에 이르고 있다. 1센티를 가는 아이는 그 아이대로, 언덕 넘어 다른 골짜기에 도달하는 아이는 그 아이대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한 아이가 지금 이 순간의 사물과 대상, 그리고 그것과 마주한 나에게서 울려 나오는 자기 말을 갖는 것은 바로 이곳의 주인, 놀이의 주인, 세계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일이다.
- 탁동철
- 양양 조산초등학교 교사. 한글글쓰기교육연구회, 글과그림 동인, 팟캐스트 <학교종이 땡땡땡> 공동진행자 등 학교, 시, 글쓰기 관련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오색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쓴 시를 엮은 『까만손』 『얘들아 모여라 동시가 왔다』 『달려라 탁샘』 『하느님의 입김』 『아이는 혼자 울러 갔다』 등이 있으며, 최근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읽는 교실 동화 『배추 선생과 열네 아이들』을 출간했다.
tak2120@hanmail.net
이미지제공_고래뱃속
썸네일 사진제공_필자
썸네일 사진제공_필자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