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기에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영국의 자선단체 에이지 UK(Age UK)는 「노년기의 창의적이고 문화적인 활동과 웰빙(Creative and Cultural Activities and Wellbeing in Later Life)」 보고서를 통해 좋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질수록, 건강할수록, 재정 자원이 풍부할수록 인생의 후반기에 높은 수준의 웰빙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연구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노년에 주변 세계와 ‘의미 있는 참여’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이다. 일 또는 사회적·창의적·신체적 활동, 커뮤니티 활동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이러한 유형의 의미 있는 참여는 전체 웰빙지수의 5분의 1 이상을 차지할 만큼 기여도가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창의적이고 문화적인 참여가 웰빙에 기여하는 40가지 요소 중 가장 큰 단일 요소로 꼽혔다는 사실이다.
건강과 웰빙을 위한 예술 참여
영국의 극장과 영화관에 가보면 백발이 성성한 고령의 관객을 많이 볼 수 있다. 극장과 영화관의 주요 관객이 20~40대인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한편 잉글랜드 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주요 문화 향유층은 50~70대의 중장년층이다. 하지만 예술 활동 참여는 나이가 들수록 감소한다고 한다. 영국은 의회에서 실시한 두 가지 중요한 조사인 「창의적 보건: 건강과 웰빙을 위한 예술(Creative Health: The Arts for Health and Wellbeing, 2017)」과 「삶의 변화: 문화 및 스포츠 참여의 사회적 영향(Changing Lives: the social impact of participation in culture and sport, 2019)」을 계기로 예술의 ‘향유’와 함께 ‘참여’가 가져오는 사회적 혜택과 영향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두 보고서는 예술에 참여하는 사람이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예술계 전반에 뿌리내리게 했다.
노년의 예술 참여로 인한 신체적 건강 및 정신적 웰빙 향상도 많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다양한 예술 활동이 노인들의 낙상 방지, 운동량 증가, 호흡 능력 향상 등 신체 건강을 개선하고 치매나 파킨슨병 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노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또한 문화예술 활동 참여는 노인의 ‘사회적 고립’을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사회 문제 중 하나가 고립이다. 2018년 영국 정부가 사회적 고독 문제를 전담할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임명한 데 이어, 2021년에는 일본에서도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이와 같은 직책을 도입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고독사에 대한 뉴스가 들려오는데, 이런 현상은 인간의 고립에서 오는 사회적 문제들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고 긴급해졌음을 보여준다.
  • ‘칵테일 인 케어 홈즈(Cocktails in Care Homes)’
    [이미지출처] ⓒ Roxene Anderson for Magic Me
  • ‘올버니에서 만나요(Meet Me at the Albany)’
    [이미지출처] ⓒ Entelechy Arts
만남과 연결을 위한 예술
고립의 반대는 만남 또는 참여일 수 있다. 인종, 종교, 출생지, 계급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영국과 같은 다문화 국가에서 예술은 사회적 갈등을 잠시 뒤로하고 한곳에 모일 수 있는 만남과 참여의 장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춤을 배우고 싶어 등록한 무용 수업에서 세대와 피부색이 다른 이웃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만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세대들이, 또는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다.
영국 런던 동부에 위치한 매직 미(Magic Me)의 ‘칵테일 인 케어 홈즈(Cocktails in Care Homes)’나 남부에 위치한 올버니 아트센터(Albany Arts Centre)에서 진행되는 엔텔레키 아트(Entelechy Arts)의 ‘올버니에서 만나요(Meet Me at the Albany)’와 같은 프로그램은 노인들이 시, 공예, 노래, 서커스 등 창의적인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고 다른 세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삶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한다. 예술 활동에서 얻는 즐거움을 비롯해 자신감, 창의성, 유연함이 증가하여 일상의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이런 사회적 상호 작용의 기회는 이들을 커뮤니티와 더욱 강력하게 연결되도록 해준다.
영국에서는 노년의 예술 참여가 가져오는 개인적 사회적 혜택을 근거로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이 개발·운영되고 있다. 매직 미와 엔텔레키 아트처럼 커뮤니티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갤러리, 국립극장 등 유수의 예술기관에서도 앞장서고 있다. 잉글랜드 예술위원회는 2020~2030년 전략 ‘렛츠 크리에이트(Let’s Create)’를 발간하면서, 예술을 통한 건강과 웰빙을 중요한 목표로 삼는 문화예술 단체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창의적 나이듦’의 견인차 배링 재단
정부 차원의 지원을 넘어 민간의 후원으로 이 분야의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배링 재단(Baring Foundation)은 불이익과 차별을 겪는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국내외 시민 사회를 후원하는 영국의 독립 재단이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개인의 건강, 웰빙, 지역 사회 측면에서의 혜택을 근거로 노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창의적 예술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총 600만 파운드(한화 약 90억 원) 이상의 기금을 지원했다. 재단은, 모든 사람이 문화 활동에 참여할 기본 권리를 갖지만 노인은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 관심에 맞는 활동을 하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점 때문에 ‘창의적 나이듦’ 부문에 기금 지원을 집중했다. 영국에서는 배링 재단의 후원으로 많은 연구와 프로그램 개발이 진행되었고, 노인 대상 참여 예술에 대한 다양한 연구, 토론, 트레이닝이 있었다. 배링 재단은 축적된 경험과 전문가들의 기여로 ‘창의적 나이듦’에 관한 다수의 보고서를 발간하고, 현장 예술가와 예술교육자를 위한 유용한 정보를 툴킷으로 개발했다. 영국과 한국 간 이 분야의 전문가 교류를 주도해 온 영국문화원은 그중 두 권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발간했다.
「노인과 함께하는 예술 활동 모음집(Treasury of arts activities for older people)」은 현장에서 예술 활동을 이끄는 예술강사가 활용할 수 있는 핸드북으로, 참여적 예술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와 단체들이 시간과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공유한다. 예술 활동이 익숙하지 않은 참가자의 경우, 참여 역량을 고려하여 그들에게 맞는 활동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데, 특히 15분 내외의 맛보기 활동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생소한 예술 장르를 낯설어하는 참가자들에게 좀 더 편안한 환경을 제공한다. 창작과 창조의 과정에 집중하는 활동은 음악, 문학, 시각예술, 연극 등 세분화된 예술 장르를 통해 창작의 과정을 맛보게 하는 데 유용하다. 또한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창작 활동은 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치매 친화적인 활동, 소규모 활동, 대규모 활동, 창조적인 활동 등을 구분해서 찾아볼 수 있는 주제별 메뉴도 수록되어 있다. 이 모음집은 노인의 예술 활동을 위해 개발된 툴킷이지만, 활동 예시 중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활동들도 있어 다양한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세대 간 교류를 위한 활동에도 활용할 수 있다.
「80개의 창의적 나이듦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세계 일주(Around the world in 80 creative ageing projects」는 배링 재단의 디렉터 데이비드 커틀러가 전 세계에서 경험한 다양한 ‘창의적 나이듦’ 프로젝트를 요약해 놓은 자료집이다. 가속화되는 고령화 사회에서 세계 여러 나라가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각 나라의 특수성과 세계적인 보편성을 한 번에 엿볼 수 있다. 같은 유럽권에서도 복지 차원의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국가와 전문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국가를 비교해 볼 수 있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참고해 새로운 창의적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거나,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좀 더 깊이 있는 리서치를 해보는 데 유용하다. 또한 유럽, 미국 등 서구 사례를 넘어 고령화를 먼저 겪고 그 사회적 영향을 가장 먼저 인지한 아시아의 사례도 다루고 있다. 글쓴이는 한국에서 방문했던 부산의 예술공동체 이마고를 천국에 비유하기도 했다.
  • 미국 영@하트 코러스(Young@Heart Chorus)
    [이미지출처] 「80개의 창의적 나이듦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세계일주」 ⓒ Lucienne van der Mijle
  • 공동체 예술 프로젝트 이마고
    [이미지출처] 「80개의 창의적 나이듦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세계일주」 ⓒ 이마고
영국문화원의 한-영 교류와 네트워킹
좋은 아이디어와 모범 사례를 공유하기 위한 네트워크 역시 ‘창의적 나이듦’ 분야의 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영국문화원은 2017년 ‘한·영 창의적 나이듦 컨퍼런스’ 개최를 시작으로 다양한 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전문가 초청 강연, 워크숍, 해외 연수 프로그램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영국문화원의 초청으로 매직 미, 맨체스터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 휘트워스 갤러리, 왕립음악원의 전문가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였고, UCL 대학의 세바스찬 크러치 교수는 예술 참여가 치매 환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2년간의 레지던시 ‘크리에이티드 아웃 오브 마인드(Created Out of Mind)’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커뮤니티 댄스 전문가 다이앤 애먼스를 초청하여 경상북도 예천의 노인들과 함께 진행했던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은 현장의 즐거움을 직접 보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다이앤 애먼스는 경북 지역 예술강사를 위한 워크숍도 이끌었는데, 영국문화원에서 이후 유용한 정보들을 모아 편집한 ‘노인들을 위한 커뮤니티 댄스 가이드’ 영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문화원에서 2020년에 발간한 「한영 참여 예술 자료집」에는 영국 참여 예술의 흐름과 지난 3년의 교류작업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외에도 여러 참고 자료가 영국문화원 웹사이트에서 게재되어 있다.
인생 후반전, 예술과 함께
나이듦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다. 은퇴와 동시에 휴식기를 가졌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은퇴 후에 새로운 일에 몰두하는 중장년층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소위 100세 시대, 초고령화 시대를 앞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퇴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어 50세 즈음이 되면 인생의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점차 고민하게 된다. 결국 행복이란 개인적인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생의 후반기 예술 참여 활동은 ‘나’를 재발견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고, 웰빙을 위해서도 권장되지만,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고립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행복하고 통합된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서미선
서미선
10년간 문화예술 기획, 마케팅, 운영의 일을 하였다. 2014년부터 6년간 주한영국문화원 아트 매니저로 일하면서 한국과 영국을 연결하는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한·영 창의적 나이듦 컨퍼런스’를 진행한 바 있다. 현재는 영국에서 예술 관련 글을 쓰고 있다.
misun.seo@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