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카이브’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다. 대체로 유용한 자료, 문서, 사진, 영상, 파일 등과 같은 기록을 모아서 정리하고 활용하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기록을 활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카이브를 기록물의 차원으로만 좁혀서 이해하면, 아카이브가 19세기 이래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 장치로 발달해왔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국가아카이브에는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들어 있다. ‘정부는 기록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공공기관에 아카이브를 만들어 업무수행의 과정과 결과를 말이 아니라 기록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직자에게 행위의 증거는 기록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 아카이브가 필요한 이유이다’. 기록학은 이런 원리를 설명책임성(accountability)이라 말한다. 국가아카이브는 선거제도처럼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회제도이다. 아카이브는 고유한 법률체계, 영역, 전문지식, 국제표준, 국내외 기록전문가 협회, 직업윤리를 갖춘 전문분야이다. 현재 20여 개 대학에서 기록학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99년을 기점으로 국가아카이브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마을아카이브
마을아카이브의 의미도 민주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광주, 여성』이라는 5.18 구술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화는 최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회이다.’ 이 말은 5.18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 씨의 말이다. 민주주의가 듣기에 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다.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 말에 공감하며 자기 생각을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의 산실이 된다.
마을아카이브는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 이런 마을아카이브의 의미는 지역을 기록한다는 측면보다는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상실한 ‘마을-공동체성’을 찾는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것은 지역아카이브이다. 지역아카이브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려고 하는 마을아카이브는 ‘공동체성-관계성을 고민하면서 여기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아카이브 실천’을 말한다. 마을아카이브는 상대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는 아카이브 실천이다. 물론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듣기는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제도화해서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듣는 과정
한국에서 마을아카이브의 역사는 10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국가아카이브의 기록화 방법론도 시도되었으나 그것의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마을아카이브가 대중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구술의 힘이었다. 구술은 마을아카이브를 형성한 힘이었다. 마을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 또는 마을아카이브의 범위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직접적 만남과 대화, 그리고 기록화’라는 패턴을 만들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구,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의 쾌감, 그리고 기록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소통에 대한 열망을 구술은 충족시켰다. 지난 10년의 마을아카이브 역사는 구술과 아카이브의 만남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마을기록학교 → 현장구술 → 전시 → 출판’의 표준모델이 생기고 있다. 예를 들어, 지역의 한 공공도서관이 마을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수행하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이 진행할 수 있다. ① 마을기록학교를 열어서 마을아카이브는 무엇인지, 구술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에 관한 공부를 시작한다. ② 이렇게 교육을 받은 후에는 ‘시민기록자’ 등의 새로운 이름으로 마을로 들어간다. 사람들을 만나서 배운 것과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섞어서 재량껏 구술을 한다. ③ 각자 흩어져 마을아카이브 활동(구술활동)을 하던 시민기록자들은 다시 모여서 각자의 아카이브 활동을 공유하면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배운다. ④ 기록한 것을 토대로 전시를 기획한다. 전시회를 오픈할 때쯤이면 구술 당사자들과 마을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관람하고 대화를 나눈다. ⑤ 구술한 것과 전시회에서 생긴 것, 그간의 진행 상황을 묶어서 책으로 간행을 한다. 그리고 매년 이것을 반복한다. 이런 반복에서 마을아카이브는 기반을 더 탄탄히 다질 수 있다. 마을아카이브를 하는 각자의 이유와 지향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방법론은 이런 표준모델이 시사점을 준다.
물론 이런 점은 있다. 첫째, 표준모델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 순서대로 기계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하나하나 별개로 나눠서 보면, 전혀 새롭거나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마을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모여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로 재탄생했다는 점에서는 새로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공동체에 대한 이해에는 ‘배움과 돌봄의 공동체’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돌보는 관계에서 공동체 감각이 나온다는 말일 것이다. ‘마을아카이브’라는 사회적 유기체는 듣기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는 기록
최근 경제전망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국내총생산량(GDP)이 세계 10위가 될 것이라고 한다. 경제적 풍요 속의 빈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풍요롭게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빈곤은 빈부격차의 경제적 빈곤은 아니다. 마을아카이브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빈곤은 ‘관계의 빈곤’이다. 한국 사회는 관계성이 상당히 취약한 사회이다. UN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 해법 네트워크(UN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SDSN)는 2012년부터 전 세계 156개국의 국민행복도를 조사해서 발표하고 있다. 인류가 취할 수 있는 공공정책의 목표를 행복에 두자는 취지이다. 2019년 현재 조사되는 행복지수 항목으로는, 정서(affect), 사회적 지원(social support), 자유(freedom), 부정부패(corruption), 관용(generosity), 1인당 국민소득(GNP), 건강 기대수명(health life expectation)이 있다. 한국은 행복지수별 순위에서 정서 101위, 사회적 지원 91위, 부정부패 100위, 관용 40위, 1인당 국민소득 27위, 건강 기대수명 9위를 각각 차지했다. 이를 종합한 전체 순위는 54위를 차지했다(2019년 세계행복보고서(WHR)). 연도별 흐름을 보면, 2015년에는 47위, 2016년 58위, 2017년 56위, 2018년 57위, 2019년 54위로 최근 5년 큰 변동은 없었다.
이 중 ‘정서, 사회적 지원, 자유, 관용’은 관계성(공동체성) 지수로 이해할 수 있는 행복지수이다. 정서는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긍정적 감정을 경험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와 성향이다. 사회적 지원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관계(친척, 친구, 또는 이웃)이다. 자유는 개인이 삶의 제반 영역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이다. 직업 세계와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발휘하며 사는가, 자기 특유의 개성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관용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정과 포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관계성 지수가 경제지수보다 현격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와 개인적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관계성이 매우 취약한 사회이다. 무언가가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도 한국인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는 사회적 유대감이 약화하거나 끊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마을아카이브의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을아카이브가 구술 또는 이야기 작업을 매개로 발달해왔다는 것은 기록의 중요성보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간파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마을아카이브는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고 서비스하는 기록물 차원의 의미도 갖는다. 그러나 관계성이 취약한 사회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의 차원으로 마을아카이브의 중요성과 의미를 찾는 것이 마을아카이브의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닐까.
이영남
이영남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기록학과 역사학을 강의하고 있다. 작은 모임에서 ‘자기역사’를 쓰는 임상역사 워크숍을 하고 있다. 또한 기록향연 워크숍도 진행하고 있는데, 친밀한 사람들 또는 일상적인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그밖에 마을아카이브와 공공기관 기록관리에 참여하고 있다.
durtkrk@gmail.com
썸네일 사진 _ 골목잡지 사이다 www.facebook.com/suwonsa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