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사상의 근간이 되어온 것은 인간중심의 이분법적 사고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이분법적 잣대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성과 위기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의 지구적 전염병 확산도 그 예가 될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중 하나로 주목받는 것이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 왔고, 그 이질적 연결망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역사와 문화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질적 연결망 속에서 각 개체의 지속적인 상호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느 하나가 너무 튀지 않게 알맞은 높낮이로 어울리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생태예술네트워크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조율’은 자연으로 대표되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일깨우고, 그와의 연결을 통한 편안한 공명의 상태로 사람들을 이끌고자 한다.
조율 소리워크숍, 동백동산(2016)
사진_황일수
사진_황일수
자연과 연결된 생명으로서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첫 단계는 그것이 ‘위기’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시작은 무엇보다 먼저 자연과의 관계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기후변화 시대, 우리는 자연과 연결된 생명으로서 우리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두고 탐험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 「2018 우리 몸의 자연 감각 회복을 위한 조율 워크북」 중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진행된 ‘조율’은 생태미학을 전공한 환경운동가 윤상훈, 환경운동가이자 예술가 황일수, 생태예술가이자 미술치료사 정은혜, 미학연구자 임지연이 함께한 작업이다. 녹색연합의 내부 프로젝트 ‘미적 경험아, 반갑다’를 통해 만난 이들은 정은혜 작가가 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의 생태워크숍에 멤버들을 초대하면서 생태와 예술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두고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어졌다. 각자의 활동 분야를 넘어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은 공동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조율’은 “기후변화 시대, 자연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태도 변화를 어떤 방법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환경문제에 대해 이성과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몸과 감각을 일깨우는 비언어적이자 예술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다양한 실천 방안을 모색하며 대표적인 두 가지 활동을 진행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활동으로 감각을 통해 자연의 존재들과 조율하는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는 워크숍을 열었으며, 기후변화와 생태 문제를 다루는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을 소개하는 <2018 생태예술네트워크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그 과정과 결과를 담은 워크북과 자료집을 발간했다.
생태적 감각을 되찾는 실험과 연대
워크숍은 보고, 듣고, 속삭이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자연의 소리를 내거나, 동물이나 나무가 되어보기도 하고, 가만히 지구의 진동을 느껴보기도 한다. 인간이 처음 태어나 타인과의 조율 경험을 통해 감각을 갖게 되는 것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자연과의 조율을 시도함으로써 사람들이 잃어버린 생태적인 감각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중 ‘작게 말하기’는 제주 선흘리 동백동산 먼물깍이라는 습지에서 야간에 진행되었다. 마을주민과 지역예술가들이 함께 했는데, 참가자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소리에 대한 감각을 인상 깊게 불러일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은 감겼지만 다른 감각들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주 곶자왈의 생명들이 내는 소리도 처음에는 작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숲 전체가 울어대는 것처럼 몸 전체로 와 닿았다. 큰 소리로 개굴개굴하던 개구리들은 참가자들이 가까이 접근하니 일시에 소리를 멈췄다가, 이내 한 마리부터 시작해서 다시 합창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니 다시 조용해졌다. 다시 참가자들은 풀벌레 소리나 개구리울음처럼 리듬감 있게, 산새들처럼 좁은 주파수로 목소리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구리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잘 조율된 하나의 악기처럼 조화를 이뤘다. 소리를 그래프로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스펙트로그램(Spectrogram)이라는 앱(app)을 사용해서 다양한 생명이 내는 각자의 고유한 주파수를 시각적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과정을 통해 자연이 전달하는 진동과 파동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자연의 한 생명체로서 자신의 존재성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자연 속에서 상호관계를 통해 조화를 이루었을 때 발생하는 나만의 힘과 생명력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2018년 11월에 서울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렸던 <2018 생태예술네트워크 컨퍼런스>는 ‘기후변화 시대, 생태와 예술’을 주제로 기후변화의 위기에서 다양한 주체들 간의 상호 협력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보이스퍼포머 김진영, 시각예술가 이다슬, 그린디자이너 그린씨, 동물보호와 함께 하는 패션잡지 편집인 김현성, 해양쓰레기로 작업하는 설치예술가 양쿠라, 미디어아티스트 이준, 싱어송라이터 솔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초대했다. 생태예술네트워크가 컨퍼런스를 통한 네트워킹 대상으로 예술가 그룹을 선정한 이유는 ‘확산성’이다. 작가 한 명을 알게 되면 기획자, 비평가, 관객 등 작가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최소 10명과 네트워크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컨퍼런스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사례를 공유하고 고민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활동을 지지했다. 이는 혼자만의 문제 인식이나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을 시작하는 기회가 되었다.
협업과 조율로 증폭하고 확장하기
생태예술네트워크 구성원들은 각자의 활동 영역에서 자연과 생명, 관계성의 근원적 회복이라는 큰 주제 아래 기후변화의 시대를 대처해 나갈 새로운 방법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미학자 임지연은 이론을 넘어 일상의 미적 경험 속에서 인간과 자연을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고, 정은혜 작가는 자연이라는 품 안에서 생태적이고 치유적인 작업을 진행해 왔다. 황일수 작가는 살아있음의 파동을 자연에서 배우고 예술적으로 재현했으며, 윤상훈 환경운동가는 기후변화 시대의 피폐해지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현장에 서 있었다.
이들은 한 달에서 한 달 반 사이에 한 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다른 성향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니 네트워크 안에서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뉘었고 활동 분야가 다른 만큼 사용하는 언어도, 사고방식도 조금씩 달랐지만 같은 뜻에 다다르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며 네트워크를 통해 ‘너와 나’ ‘자연과 인간’ ‘살아감과 죽어감’ ‘언어와 비언어’ ‘제도와 삶’ 사이의 단절된 관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우리 안의 공감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기후변화 시대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성찰적이고 지속 가능한 삶의 형태를 시민과 나눌 방법들을 고민했다.
현재 생태예술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활동을 통해 연결되었던 예술가들과는 환경문제를 주제로 전시를 함께 개최하는 등 긴밀한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기도 하고, 뜻있는 사람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정은혜 작가는 양쿠라 작가와 함께 2019년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국제생태미술전 《오션-뉴 메신저스(Ocean-new messengers)》에 참여했다. 작품을 통해 해양쓰레기의 심각성과 새로운 대안,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 이 전시에서 이들은 해변에 밀려든 쓰레기를 이용한 작품을 각각 선보였다. 바다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로 작품을 설치하는 정은혜의 ‘플라스틱 만다라’ 프로젝트는 2020년에도 이어져서, 올해 여름에는 네트워크 멤버들이 참여하는 미세 플라스틱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보이스퍼포머 김진영, 제주도의 생태예술운동 그룹인 ‘재주도좋아’의 김승환, 사운드 작업과 공연 활동을 하는 ‘노드트리’의 정강현, 이화영과 함께 ‘조율’이 동백동산에서 진행했던 스펙트로그램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또 다른 소리 작업을 제주 제2공항 예정지에서 준비 중이다.
녹색연합 활동가로도 활동 중인 황일수 작가는 2019년 11월 열린 <제1회 그린 컨퍼런스 – 기후 변화의 증인들>에 참여한 ‘증인’이 등장하는 환경 다큐멘터리 <그 섬>을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2020 서울환경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학교 안팎에서 미학을 강의하는 임지연은 생태예술네트워크의 활동과 그 결과물을 기반으로 예술학과, 시각디자인학과, 공간디자인학과 학생들에게 기후위기 시대의 예술의 역할에 대해 강의했으며, 순수예술가들과 이론가들이 기후위기 시대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내는 영감과 계기를 만들었다. 생태철학자 신승철 교수와 함께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심포지엄과 토론을 진행했으며, 청소년을 대상으로 ‘생태적 감수성’ 강좌를 열기도 했다.
윤상훈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이 모든 활동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이자 협조자이다. 조율의 활동 기반 중의 하나인 환경운동이 다른 창조적인 활동과 결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 생태예술네트워크는 비교적 짧은 기간 진행되었던 프로젝트 그룹이지만, 이처럼 협업과 조율을 통해 더 넓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공존,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볼 여유가 없다. 생태문화예술교육은 인간과 자연 간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생태적인 관점에서 출발한다. 자연을 살린다거나 활용하는 것처럼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의도가 아니라 생태의 순환과 연결을 회복하는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인간이 자연을 자원으로 보고 이용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우리와 자연의 궁극적인 연결을 체험하게 할 수 있다면 생태적인 관계의 회복과 지속하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공명하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조율’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몸으로 소통하는 법을 망각하고 단절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대신 욕구에 빠지고, 기뻐하는 대신 흥분하고, 슬퍼하는 대신 절망에 빠진다. 상대와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고립 속에서 감정을 소모해버리는 것이다.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모두 함께 손잡는다면 서성대는 외로운 그림자들 편안한 마음 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어느 노랫말처럼, 인간과 자연이 손잡고 서로에게 ‘조율’된 상태를 이어갈 수 있다면 다양한 존재들이 편안하게 공명하는 세상이 오리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사진제공 _ 생태예술네트워크
- 강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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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지원 및 지역혁신 공공기관 등에서 10년간 근무했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현장으로 돌아왔다. 제주에서 현대미술전시 및 커뮤니티 공간 ‘새탕라움’과 지역문화콘텐츠를 연구 개발하는 ‘문화발전소 제비’를 운영 중이다.
museum10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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