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방귀 스토브는 적정기술의 하나인 우드가스 스토브를 임의로 번역한 용어로 나무는 타지 않고 나무가 품고 있는 가스 성분만 태우며 숯을 남기는 원리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워크숍은 <이글이글 스토브> <보글보글 스토브> <나무방귀 스토브로 라면과 달고나> 등의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알베르 카뮈 –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 알베르 카뮈 –
에피소드Ⅰ: 진짜 성냥의 공포
첫날, 스토브의 원리와 성능을 선보이기 위해서 성냥에 불을 붙였다. 순간 아이들(초5~중2)의 입에서 오! 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성냥불이 이처럼 놀랍고 신기해 보인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물며 내가 성냥을 손에 쥐고 스냅으로 불꽃을 피워내는 별것 없는 동작이 그렇게 감탄사를 자아낼 줄은 미처 몰랐다. 마치 마술 시연을 보기라도 한 듯이 부릅떠진 어린 눈동자들 때문에 나는 약장수가 된 듯한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이들이 성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성냥이 뭔지 알고는 있지만 성냥을 이해한 것이 아니고 사용해본 경험도 없었기에 눈앞의 작은 불꽃에 마음을 빼앗겼나 보다. 하긴 요즘에 누가 성냥을 사용하는가. 하물며 파는 곳도 별로 없다. 아이들에겐 근대의 발명품이 느닷없이 나타나 깜짝 쇼를 보여준 것이리라.
아무튼, 도구의 소멸과 시대 감각의 균열을 뒤로하고 나는 성냥 퍼포먼스를 수차례 선보여야만 했다. 성냥개비를 쥐는 법, 마찰력을 일으키는 스냅의 속도, 유황의 불꽃이 나뭇개비로 이동할 때까지의 기다림, 손가락 화상에 주의하는 성냥개비의 기울기와 후~ 불어서 꺼뜨려야 할 타이밍 등 의외로 가르칠 것이 많았다. 계획에 없던 일, 준비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사소한 일 하나가 하루의 전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아이들의 실습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성냥개비를 쥐고 불씨를 당기더니 불꽃이 커지기도 전에 놀라 그대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덩달아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악! 소리를 질러댔다. 고작 성냥불 1개의 파워였다. 이런 코미디를 보게 되다니!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 앞에서 웃으면 안 되는데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다섯 명의 아이들이 팔각 성냥 한 통을 몽땅 소비하고도 성냥불 미션을 소화하지 못한 기록적인 날이었다.
인류가 처음 불을 마주했을 때도 이러했을까. 그래서 불에 대한 원초적 공포심이 유전적으로 전이되어 무의식의 발동 기제를 타고 드러난 행동 패턴은 아닐까. 오늘날 성냥은 생활사박물관 유리 벽 너머로 들어선 물품 중 하나가 되어있고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불이라는 물질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불은 이제 먼 곳의 화재 뉴스를 축소된 화면으로 또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그림으로 만나는 볼거리일 뿐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리 진짜 같은 가상의 세계로 반복 학습되어도 진짜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몸이 훈련된 그대로 반응하고 움직일 수 있을까. 성냥불 사건은 놀람의 질문을 던진다.
에피소드 Ⅱ: 노동의 탄생과 죽음
고백하자면, 나는 교육할 때 가학적인 성향이 있다. 아이들을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으로 몰아넣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보는 악취미가 있는 것이다. 실례로, 좋은 공구를 주지 않는다. 기본 도구로 시작해서 익숙해지길 기다렸다가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심 쓰듯이 던져준다. 아이들은 배신감을 토로하며 화내기도 하지만, 도구의 생각을 내 몸에 맞게 쓸 줄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며 회피전략을 쓴다. 처음부터 쉽고 빠르고 정확한 공구를 접하면, 도구의 발전사와 발명의 이유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한, 신체 에너지를 통한 자기 몸의 감각과 근육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성장기 아이들뿐만 아니라 제작에 서툰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소위 연장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작업자의 균형감 있는 자세와 리드미컬한 연속 동작 그리고 박자감 있는 소리와 함께할 때 노동의 숭고함이 깃드는 법이다. 그런데 전동공구는 생각과 감정이 없을뿐더러 매우 시끄럽다. 내가 이끄는 교육관은 빠른 실행력이 아니라 도구와 몸의 불일치를 깨달으며, 마음먹은 대로 혹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아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작업 자세가 어정쩡해서 도구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도 한동안 못 본 척한다. 도구에 적응할 때까지 헤매는 시간을 겪도록 하는 것이다.
나무방귀 스토브는 나무 연료를 수직으로 길게 넣어 사용해야 버닝타임(burning time, 연소 시간)이 길어진다. 사이 공간을 줄여서 더 많은 연료를 채우기 위함인데, 보통은 나무젓가락을 사용한다. 아이들에게는 각목을 나무젓가락으로 만드는 미션을 주었다. 처음엔 아주 신나게 진행되었다. 손도끼로 각목의 중심을 쪼개는 파괴력은 색다른 쾌감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들여 쪼갠 나무 연료가 한 번의 연소실험으로 너무 빠르게 없어지자 땔감 만들기는 힘들고 지루한 일로 바뀌어 아이들로부터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일주일 후, 한 아이가 뭔가 꿍꿍이가 가득하고 자신감에 찬 얼굴로 다가와서는 새로운 연료를 발견했다며 의기양양해했다. 그리곤 비밀을 알려준다는 투로 은근슬쩍 톱밥 한 줌을 내미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톱밥은 불타오르진 않는다. 알갱이 입자가 작아서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쉽사리 꺼지거나 불씨가 붙어도 연기만 피워대는 부적합한 재료다. 안 되는 이유를 듣고도 믿을 수 없어 직접 실험까지 해본 아이의 눈빛엔 다시 노동현장으로 끌려가는 절망감이 감도는 듯 보였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노동 개혁이 될 뻔한 대안이 이대로 허물어졌다면, 아마도 이 아이는 프로그램의 동력을 잃어버려 한동안 겉돌게 되었을 것이다. 문제적 아이 한 명 때문에 선생님들은 골머리를 싸매게 되었다. 관계의 역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해결책은 톱밥을 뭉쳐 다시 나무화 하는 방법에 있었다. 점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친환경 소재는 우습게도 햇반이었다. 만리장성에 쌀과 석회가 혼합된 반죽이 쓰였다는 축조술이 우리의 프로그램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게 되었다. 아이는 신나서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수업 풍경 아니 무대가 바뀌었다. 절구통에서는 햇반을 찧는다. 아이들은 둘러앉아 톱밥 동그랑땡을 빚는다. 톱밥 동그랑땡은 전자레인지로 굽고, 햇볕에서 건조한다. 새로운 연료라는 깃발 아래 아이들은 가내수공업과 분업화의 세계를 자발적으로 만들어냈다.
일의 즐거움, 땀의 보람, 접촉의 사유
물론, 이 상황이 오래 간 것은 아니다. 생각만큼 그렇게 재미난 놀이가 아니며 노동을 피하려다 더 큰 노동에 빠진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나마 창조적인 노동을 맛보면서 설계되지 않은 프로그램의 바깥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개발된 적정기술의 답습이 아니라 우리만의 적정기술을 만들게 되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그 과정을 되짚어 보자면, 아이 스스로 반복 노동의 문제를 발견하고, 우리가 가진 지능과 주변의 자원을 이용하여 새로운 기술과 일자리를 만들어냈으며, 구성원 간의 협력을 이끌어냈고, 공동체의 규모에 맞는 생산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냈다.
반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문제는 ‘노동은 적게 할수록 좋다’는 뿌리 깊은 생각이다. 어느 순간 아이들의 각목 도끼질은 노동을 재미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그리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들의 노동, 특히 육체노동은 생산성을 높이고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있다. 왜 우리는 일하는 모습에서 멋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을까. 왜 나는 아이들에게 도끼질이 얼마나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인지 설득하지 못했을까. 도끼와 몸의 일체화를 이뤄 정확히 각목의 절반을 쪼개는 기술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왜 말해주지 못했을까. 각목의 중심에서 어긋난 삑사리가 실패를 되돌아보며 자아의 완성을 다듬어가는 훈련이라고 왜 말해주지 못했을까. 언제부턴가 노동은 품위 없고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저급한 것으로 추락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산업주의의 노예가 되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노동이 달갑지 않고 기피하고 싶은 영역이라면, 노동이 불쾌하고 나쁜 것이라면, 우리는 점점 노동을 덜어내기 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동화 시스템은 몸의 정지가 편리하다고 부추기며 길들이고 있지만, 인간의 몸이 멈춤을 추구하면 자아도 자유의지도 해방감도 심지어 존재감도 함께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는 일하는 즐거움과 땀 흘리는 보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어쩌면 프로그램은 중요한 뭔가를 건너뛴 듯싶다. 연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성 때문에 나무를 만난다는 접촉의 과정이 등한시된 것이다. 각목의 뽀얀 나무 속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면 ‘소나무’라는 종을 유추할 수 있게 되며, 쓰담쓰담 하면 따뜻한 보드라움이 전달된다. 길게 뻗어 나간 줄무늬 나뭇결의 간격에서는 생장 주기와 방위를, 옹이는 새알의 단면을 닮아서 나뭇가지에 지은 새둥지를 연상시키고, 끈적끈적한 송진은 상처 입은 나무의 눈물 덩어리이지만 반투명한 광택 때문에 호박 같은 광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썩은 부분에서 갑작스레 뛰쳐나오는 개미를 발견하면 문득 디아스포라의 삶을 떠올릴 때도 있다. 이런 사유는 비록 반짝 떠올랐다 사그라지는 상념들일 뿐이지만, 나무를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세계’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검색창에서 관찰할 수 없는 공감각적 심상들을 맛보고 그려볼 수 있도록 천천히 이끌어야 했던 것이다.
사진 출처 _ FUTURE LAB
- 임체스(임상빈)
-
체스말의 상징과 행마법으로 개인의 미적 취향과 행동 패턴을 읽어보려는 오브제-텍스트 작업을 하고 있으며, 출간물 「체스 초보자를 위한 귀띔」 &「체스 철학자를 위한 귀띔」이 있다. 교육예술연구팀 ‘잔꾀’로 활동하며 ‘개똥수거 캠페인’ ‘닭에서 알까지’ ‘프로메테우스 변신술’ 등의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작업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12길 20
홈페이지 zanque.modoo.at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2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우와!!!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몽켐 독자님,
기사를 준비하면서 저희도 참 즐겁고 흥미롭게 바라본 활동이었는데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