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명동이라 할 수 있는 광주 시내 중심에 ‘삶디’라는 별칭을 가진 청소년삶디자인센터가 있다. 청소년들이 자기 삶을 멋지게 가꾸는 디자이너(life-designer)이자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소셜 디자이너(social-designer)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진 진로특화시설이다. 이곳에는 청소년 농부요리사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이 있다. 참 용감한 이름이다. 이런 최상급 표현을 거침없이 넣었으니 말이다.
줄여서 ‘세가식’이라고 부르는 이 식당은 진짜 식당이 아니다. 삶디 음식공방에서 17세부터 24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1년 동안 운영하는 방과후 프로그램 이름이다. 2017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4년차가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세상에서 가장’이란 용감한 부사를 사용하게 됐을까? 그리고 왜 ‘식당’이라고 부를까? 씨앗부터 심기 때문이다.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면 세가식 멤버들은 주방이 아닌 텃밭으로 나간다. 손님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와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리고 그 열매가 수확되어 요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주문한 음식을 먹으려면 최소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좀 당황스러운가? 그래서 세가식은 한 학기에 한번, 팝업 레스토랑을 열어 직접 심고 기른 작물로 요리한 음식들을 선보인다.
우리들의 공통점은 ‘요리’를 좋아하는 것
세가식 멤버들은 많은 것이 다르다. 사는 동네도 다르고, 학교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되고 싶은 것도 다 다르다. 남구에 사는 고3 ‘주쓰’는 간호사가 되고 싶고, 서구 사는 고3 ‘두콩’은 소방관이 되고 싶고, 북구 사는 고1 ‘민트’는 아직 되고 싶은 것이 없다. 동구 사는, 이제 곧 대학교 2학년이 되는 ‘글동’은 조식이 맛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란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요리’를 좋아하는 것이다.
세가식은 매주 목·금·토요일에 운영된다. 목요일과 금요일 수업은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토요일 수업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누가 봐도 적지 않은 시간. 숙제하기 바쁘고, 학원가기 바쁘고, 과외받기 바쁠 텐데, 게다가 토요일엔 친구들과 놀기에도 바쁠 텐데 꼬박꼬박 주 3일을 나오는 세가식 멤버들. 그 많은 시간 동안 무얼 하냐고?
배움과정 1 : 농사짓고 요리하기_ 마음가짐과 태도
땅과 만난다. ‘요리’가 좋아서 모였지만 ‘앞치마’ 대신 ‘몸빼’를 입고 ‘칼’ 대신 ‘호미’를 든다. 삶디센터 뒤편에 40평의 텃밭을 돌보고 가꾼다. 에계, 40평이라고? 혼자서도 짓겠는걸? 하지만 정말로 작고도 무지 큰 텃밭이다. 계절 따라 적게는 스무 종, 많게는 서른 종이 넘는 다양한 작물이 자라나니 말이다. 봄에는 담배상추, 너브네상추, 개세빠닥상추 등의 잎채류와 홍감자, 자주감자, 청춘감자, 흰당근 등의 구근류, 옥밭 토마토, 진주가지, 흰가지, 개구리참외, 수박, 호박, 고추 등 과채류를 심고 기른다. 애플민트, 페퍼민트, 토종박하, 로즈마리, 딜, 실란트로, 바질 등 허브류도 많이 심는다. 여름에는 열심히 그것들을 수확해 상추쌈, 겉절이, 가지나물, 호박잎찜, 샐러드 등 수확한 것에 맞춰 점심상을 차려 먹고 남은 것들은 말려서 저장하거나 집으로 가져간다.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이거 내가 농사지은 거야!” 하면서 말이다.
가을에는 구억배추, 개성배추, 청방배추, 개걸무와 홍갓 등 월동작물을 심고 기르는데 그것으로 김장을 한다. 청소년들이 김장을 한다고? 텃밭에서 갓 수확한 배추를 그 자리에서 바로 갈라 절이고, 씻어 건진다. 물이 빠지는 사이 젓국을 끓이고, 풀죽을 쑤고, 각종 채소를 썰어 놓고, 우리가 직접 말린 태양초를 갈아서 양념을 만든다. 그리고 쓱싹쓱싹 비비는 것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세가식의 손길이 안 닿는 것이 없다. 사람들에게 대접하며 말한다. “우리가 배추벌레 잡아가면서 키운 배추야, 양념도 우리가 다 만든 거고. 진짜 힘들었으니까 남기면 안 돼!”
우리는 가끔, 아니 생각보다 자주 음식이 땅에서 나온다는 걸 잊어버린다. 도시에 사는 이상 시장과 마트에서 식재료를 구하지 텃밭에서 구하진 않으니 말이다. 세가식의 텃밭 활동은 우리의 먹을 것들이 땅에서 나온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씨앗이 자라 줄기와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해준 흙과 공기, 물 그리고 햇빛에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흘린 땀만큼, 그보다 더 고생했을 농부들의 수고로움과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게 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감사함을 키워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 프로그램이 청소년들과 농사지으며 요리하는 이유다.
“학교에서는 나물 같은 건 안 배우죠. 발효 음식 이런 거 안 배우고. 좋은 음식 이런 거 한번도 생각 안하죠. 요리사로서 어떤 길 갈지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텃밭활동도 안 하잖아요. 화분 같은거에 바질인가만 길러보고. 근데 여기선 밭부터 갈고 쌀도 기르고. 그러면서 재료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식재료가 어떻게 생긴 지도 알게 되고. 진짜 신선한 경험 많이 하는 것 같아요.”
– 세가식 멤버 심층인터뷰, 2019.1.8.
배움과정 2 : 여행하기 _ “어떤 삶을 살고 싶지?”
세가식에서는 여행을 다닌다. ‘요리’가 좋아서 모였지만 여행 가방도 자주 싼다. 장흥으로, 대전으로, 화순으로, 서울로. 꽤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매개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가꿔나가는 제3의 어른을 찾아 떠난다. 생명 에너지 가득 찬 식재료로 평화가 깃든 밥상을 만드는 선생님, 마이크로 비오틱 요리를 선보이는 부부,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통하는 양계장에서 행복한 닭을 키우는 농부님, 신세대 사찰음식을 선보이는 신세대 셰프, 토종 장콩을 농사지어 메주 빚고 발효시켜 장을 만드는 농부님, 2,000평의 텃밭을 채종밭으로 가꿔 전국에 토종 씨앗을 보급하는 토종씨앗 운동가 등 자신만의 철학을 세워 일하는 많은 어른을 만나고 돌아온다.
[사진 출처] 채종밭으로 떠난 씨앗 여행
어른들을 찾아가 농사일도 배우고 요리도 배우지만 세가식 멤버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농사일이 끝나고, 요리 워크숍이 끝나면 우리는 이야기 자리를 펼친다. 어른들은 지금의 길을 걷기까지의 개인의 역사를 들려주고 자신이 일할 때에 어떤 마음인지, 이 일을 왜 하는지 등을 들려준다. 그리고 세가식 멤버 한 명 한 명에게 그들의 이야기도 묻는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요즘 고민은 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꿈꾸는지 묻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 같지만 모두가 잘 말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속내를 술술 풀어내고 혼자서 끙끙 앓았던 자기만의 질문들을 어른들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었죠?” “저에게도 이 일을 꼭 해야겠어! 라고 확신이 드는 순간이 올까요? 헷갈려 죽겠어요.”
“20대에 딱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걸 찾는 건 엄청난 운이고 대부분 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자신의 감각, 그리고 촉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찾아가야 기회가 생기는 거라고 하셨다. 살아가면서 겪어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건데 나는 경험하지도 않고 확실한 답을 찾아 가려고 하는 생각이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 세가식 멤버의 여행 회고, 2018.8.4.
세가식에서는 이런 여행을 ‘배움여행’이라 부른다. 배움여행이 끝난 후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속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의문이었던 질문들을 질문해본 것만으로도 부쩍 성장해 왔음을 느낄 수 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어른에게 어떻게 그리도 진솔하게 말하고 질문할 수 있었을까? 멤버들을 대하는 어른들의 진심 어린 기운이 잘 전해져서 일 것이고, 누군가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고 싶다고 바랐던 멤버들의 마음이 열렸기 때문일 수 있겠다. 어쨌든 좋은 어른의 힘이고, 여행의 힘이다.
삶디 안에만 머물렀다면, 세가식 안에만 머물렀다면 만나지 못하고, 듣지 못했을 것이다. 질문할 수 없었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고민의 방향이 될 수 없었던 다른 차원의 것을 이야기해주는 어른들과의 소통은 멤버들의 사고를 확장하고 미래에 대한 상상의 범위를 넓혀주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느끼며 자기 삶의 모습을 그려나갈 힘을 키우게 했다. 그래서 세가식이 자꾸 여행을 다닌다. 앞으로도 열심히 다닐 것이다. 삶의 질문을 안고, 좋은 어른을 찾아서.
배움과정 3 : 팝업레스토랑 _ 해보고 싶은 걸 해보면서 찾는거지
멤버들에게 세가식 커리큘럼 중 가장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단연 팝업레스토랑이 1위를 차지한다. 뭔가 로망이 있었나 보다. 직접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로망 말이다. 한 학기를 마치는 세레모니로 세가식은 팝업레스토랑을 연다. 멤버들의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을 초대해 직접 키운 텃밭 작물로 차근차근 개발해 낸 요리들을 선보인다. 세 가지 소스를 곁들인 ‘채소 구이와 채소 스틱’, 호박잎과 된장 소스를 이용해 ‘호박잎 쌈 웃음 한쌈’, 가지와 토마토의 꿀조합으로 ‘가지가지 토마토’, 고추로 매콤하게 ‘오이냉국’, 수박과 민트의 조합으로 ‘이름도 예쁜 수민샤벳’, 여행을 하며 영감을 받은 ‘평화가 깃든 밥상으로부터: 조선간장 떡볶이’ 등 메뉴도 다양하다. 다채로운 가지각색 채소들로 가득 찬 테이블. 상상만 해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정도 메뉴라면 3개월을 기다린 보람 있지 않은가? 게다가 메뉴마다 얽혀있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농부요리사들이 직접 들려주니 그 이야기만으로도 모든 요리가 맛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테이블 위 요리들은 아름다웠을지언정, 멤버들의 발표가 요리의 맛을 빛내주었을지언정, 준비는 전쟁 같았다. ‘요리’가 좋아서 왔을 뿐, 요리를 잘해서 모인 건 아니었고 로망만 있을 뿐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매주 실습을 해왔지만 레스토랑을 열 만큼 숙련될 시간은 없었고, 많은 이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부끄럽고 익숙지 않았다. 바짝 긴장한 상태로 요리하니 순서는 다 잊어버리고, 느린 손은 더 느려졌다. 기본 중의 기본 간 보는 것도 깜빡해 ‘조선간장 떡볶이’에 간장을 안 넣은 채 나간 적도 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발표할 땐 큐시트를 잡고 벌벌 떨고 거의 울 듯 말 듯 간신히 발표를 마쳤다.
아슬아슬하고 실수투성이인 청소년 농부요리사들의 팝업레스토랑. 그래도 해보고 싶었던 것을 상상이 아닌 실제로 해볼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세가식의 중요한 배움과정이다. 아침 일찍 나와 요리를 준비하고 손님들이 식사하는 동안엔 부엌을 정리하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는 홀과 부엌을 정리한다. 하루 종일 서 있어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 피곤이 밀려오지만 모든 것이 정리되기 전까진 일은 끝나지 않는다. 해 뜰 때 나왔건만 창밖은 어둑어둑.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마지막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조리대가 깨끗해지고 바닥 청소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요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요리 후의 설거지와 청소가 더 많은 것이 현장의 현실.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진짜 도망가고 싶었는데 할 수밖에 없었다. 주방을 청소하는 게 진짜 너무 대박 허리가 아프고 힘들고 진이 빠지고 멍해졌다. 집에서도 이렇게까지 청소 안 해봤는데 정말 힘들다는 거를 알게 되었다. 청소 다 끝내고 보니 뭔가 마음이 시원해지는 거 같았고 다 같이 열심히 한 세가식 식구들이랑 반짝반짝한 주방에서 열심히 해보고 싶다. 힘든 만큼 꿀잼ㅋㅋㅋ!! 예~~”
– 세가식 멤버 회고, 2018.8.26.
경험하며 깨닫는 것이다. 일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고 쉽지만은 않다는 것, 밖에서 보았을 때 멋있어 보이고 재밌어 보여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막상 그 속으로 들어가면 피하고 싶었던 일들이 분명 그 속에도 존재할 것이란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하기로 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매듭지으면 자신에게 만족감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잘했든 못 했든 실수를 했든 안 했든 말이다.
“학교에서도 발표하잖아요. 소리가 엄청 작단 말이에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크게 크게 말하라고 맨날 말하거든요. 세가식 마지막 팝업 때, 시 읽을 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제가 직접 쓴 걸 읽으니깐 뜻깊었어요. 떨려가지고 후끈후끈 몸에서 열이 났어요. 그래도 잘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발표 준비할 때 마음은) 뭔가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발전한 모습을요.”
– 세가식 멤버, 2018.1.5.
농사짓고 요리하는 농부요리사로 시작해 삶의 질문을 안고 떠나는 여행으로. 아슬아슬하고 실수투성이지만 삶의 로망을 실현해 나가며 바라는 삶을 살아내는 힘을 이야기하는 이상한 식당. 진로를 탐색하기에 딱 좋은 식당.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이다.
사진제공_광주광역시청소년삶디자인센터 www.samdi.or.kr
- 김진아(라라)
- 요리와 문화학을 공부했다. 광주광역시청소년삶디자인센터 음식공방 벼리로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을 기획하고 운영 중이다.
페이스북 www.facebook.com/lara.kim.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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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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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디의 다양한 활동도 너무 멋지고
세상 가장 멋진 요리가 탄생하는 과정이
너무 멋지네요^^ㅎㅎ
함께하는 라라님도 멋진분이시네요
모범이 되는 청소년 기관인것같습니다~~
참 좋은글 잘 봤습니다. 댓글남겨봅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 마음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빠른 게 미덕이 되는 세상에서 스스로 농사를 지은 재료로 요리를 해먹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식당’의 활동은 제게도 많은 감상을 주었어요.
계속해서 다양하고 의미있는 현장 소식을 전달하겠습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