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감수성이 불어넣은 새로운 생명력

공연계 젠더 프리 캐스팅

지난해 공연계 결산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던 키워드는 미투(#Me too)와 위드유(#With you)였다. 공연계 곳곳에서 폭로된 미투에 관객들은 보이콧을 나서기도 했고, 공연계 종사자들은 이에 대한 자정의 움직임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공연계의 종사자들 사이의 위계나 성차별적 문화를 개선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 자체의 젠더 감수성을 높이고 여성 종사자들의 기회 확대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젠더 프리 캐스팅(gender-free casting)’ 역시 그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중 하나였다.
성별 구분을 넘어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성별 이분법적 기준에서 벗어나 배역을 캐스팅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 성 역할이나 성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으로, 성을 뒤바꾸거나 아예 구별 짓지 않는 모든 캐스팅을 포함한다. 지난해부터 유독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투 운동 이전에도 젠더 프리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5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김영주 배우가 헤롯왕 역을 맡았고, 2017년 뮤지컬 <광화문 연가>의 월화 역에 정성화 배우와 차지연 배우가 공동 캐스팅되는 등의 시도는 여러 화제를 낳았고 관객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한편 2018년 이후의 젠더 프리 캐스팅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을 다루는 방식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파격에서 오는 신선함
젠더 프리 캐스팅은 단순히 원작을 파괴하고 무대에 재미를 더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가져온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이야기를 보다 다층적으로 만들어주며 무엇보다 그로 인해 관객들에게 더욱 풍부한 감상의 여지를 주게 된다.
절대불변일 것만 같은 고전 작품에 젠더 프리 캐스팅을 더하면 모두 아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신선한 생명력이 생긴다. 오스카 와일드 소설 원작으로 유명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현대미술계로 배경을 옮겨 재해석한 최근 작품에서는 발레리나 김주원과 배우 이자람을 캐스팅하여 화제를 낳았다. 원작 속 배질, 도리안, 헨리 세 남자의 묘한 관계가 젠더 프리를 만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우정과 사랑의 결을 보여주며 그야말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됐다. 올해 5월 막을 내린 뮤지컬 <적벽>에서도 공명과 주유 이외에도 조자룡, 정욱 등 여러 군사의 역까지 여성 배우들이 캐스팅되어 무대에 올랐다. 전형적인 남성 서사를 여성이 연기함으로써 극에 색다른 생동감을 더하기도 했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 극찬을 받고 있는 연극 <오펀스>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온 고아 형제 역에 남성 배우와 여성 배우를 동시 캐스팅했다. 말하는 이의 성별이 달라졌을 뿐인데도 소외된 이들의 외로움과 압박감, 그리고 그들 사이의 연대와 위로가 자못 색다르게 다가온다. 극이 진행될수록 이야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성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점과 목소리를 내는 인물에 따라 그 영향과 공감대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극 중 형과 딸이라는 호칭이 연기하는 배우의 성별과 충돌할 때 생기는 낯섦은 어색함보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관객들의 선입견을 깨부순다.
아동극 최초로 젠더 프리 캐스팅을 시도한 사례도 있다. 올해 5월 막을 내린 가족뮤지컬 <로빈슨 크루소>의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해 제작진은 한 인터뷰에서 “모험의 상징인 로빈슨 크루소가 굳이 남자일 필요는 없다”며 “어린이들이 고정된 성 역할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인격과 개성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단순히 어린이들에게만 의미 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로빈슨 크루소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아닌 여성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어른들에겐 신선함을, 아이들에게는 가능성을 안겨준다.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콘텐츠에도 젠더 프리가 무리 없이 녹아들어 모두가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는 여기 와있다”
그간 극 중 스펙트럼이나 비중이 모두 제한적이었던 여성 역할이 경계를 넘어서 새롭게 조명될 때 그것은 단순히 무대 위 여성을 조명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젠더 프리 캐스팅 극을 보며 관객들이 느끼는 충격과 불편함까지 조명한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파격이 누군가에겐 어색하고 불필요한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런 불쾌감 역시 현실의 불균형과 불평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제 공연계는 어떤 것을 어떻게 조명할지 보다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문화예술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그들의 콘텐츠 해석 수준 역시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젠더 프리 캐스팅은 공연계를 이끌어갈 돌파구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공연계는 이제 “현실이 그렇다”는 말에 숨기보다 현실에 질문을 던지고 무대 위에 새로운 미래를 올리고 있다.
“미래는 여기 와있다. 단지 골고루 퍼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윌리엄 깁슨의 말처럼 젠더 프리의 바람은 더 이상 시기상조나 단순한 파격이 아니다. 이미 도착한 미래이다.
프로젝트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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