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컴퓨터 게임은 유저(user)에게 플레이(play) 경험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게임 개발사들은 게임엔진에 대해 접근 가능하도록 커맨드(명령어)를 개방하거나 각종 모드 제작이 가능한 툴(tool) 자체를 유저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게임엔진을 가지고 자기표현이 가능케 만든다. 표현의 매체로서 게임 이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머시니마(Machinima)’란 장르다.

  • 예술적으로 변용된 머시니마의 한 사례
    언리얼 토너먼트 게임엔진 기반 창작품 (2008, Friedrich Kirschner)
    [이미지 출처] www.vimeo.com/fiezi
머신(Machine)과 영화(Cinema) 그리고 애니메이션(Animation)의 합성어로 주조된 머시니마는 그 최초의 기원을 비디오 게임 <스턴트 아일랜드>(1992)에 두고 있다. 1) 영화제작을 위한 비행 스턴트라는 게임 내용덕분에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서 플레이어의 게임 장면을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었던 이 3D 게임은 플레이 중 가장 멋진 스턴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반복적인 플레이를 하도록 만들었고, 게이머는 플레이 장면을 담은 데이터를 기록사진처럼 남겼다. 이 게임은 자기 시스템 안에서 영상 제작 도구로서의 게임의 가능성을 일찍이 보여주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머시니마로 부를만한 작품은 게임 <퀘이크>(1996)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당시 <다이어리 오브 캠퍼(Diary of a Camper)>라는 제목의 1분 30초짜리 영상은 게임 플레이의 일부분을 녹화한 것이었지만, 나름의 스토리 라인을 가진 것이었다. 이후 ‘퀘이크 무비(Quake movie)’라고 불리는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고, 비록 조악하지만 게임 영상을 녹화하는 형태가 새로운 영상제작 방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처럼 처음에는 다소 소박하게 게임 속 기념품 제작으로 시작한 머시니마는 한정되지만 게임의 자원을 이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 기계(컴퓨터)에 의한 영화 제작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살려 나가기 시작했다.
머시니마는 초기에는 게임 팬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서 그저 재미를 위해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의 독립된 영상 장르로서 자리한다. 당장 유튜브에 ‘Machinima’라고 검색해보면 수만 개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완성도 높은 콘텐츠는 2차창작물만이 아닌 독자적인 작품으로 취급받는다. 넷플릭스는 게임 <헤일로>의 자원을 활용해 만든 머시니마 [Red vs. Blue]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머시니마가 영상 제작의 한 플랫폼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루기 어려운 장비와 배우들의 숙련된 연기, 예산이 드는 로케이션이 필요하다. 하지만 게임엔진에 기반해 제작된 머시니마는 게임 자원을 사용해 컴퓨팅 파워 안에서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언제든 얼마든지 쉽게 촬영할 수 있고 수정 또한 용이하다. 머시니마 작업은 표현의 제약과 텍스쳐의 조악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제작의 스피드와 간편성에 중점을 둔다. 이 같은 머시니마를 박용주는 “컴퓨터로 하는 인형극” 2)이라고 표현했다. 이 점에서 머시니마는 아마추어들이 TV나 영화 산업계에서 일하지 않고도, 그들이 원하는 규모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 우리는 머시니마를 미래세대의 새로운 자기표현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머시니마는 게임 기술의 발전과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은 한계가 있는 영상 제작 방식이다. 게임은 본질적으로 영상을 연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바탕으로 촬영된 머시니마는 캐릭터의 표정 연기나 카메라의 움직임 등이 실제 영화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게임 AI 등이 실제 촬영에서 정교하게 제어되기 어렵다는 점도 머시니마가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블리자드, 에픽 게임즈, 크라이텍,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한 게임 회사들과 머시니마 제작자들은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게임 개발사는 자신들의 게임엔진을 활용한 2차 창작물을 통해 팬 문화와 게임 브랜드에 대한 인식을 재고할 수 있기에 머시니마 제작에 도움을 주려 하고, 머시니마 제작자들은 좀 더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만년필을 요구한다. 최근의 게임들은 머시니마 촬영을 위한 녹화 기능과 카메라 시점 조절 기능 등을 기본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게임 속 캐릭터나 건물에 대한 데이터를 개방하고 3) 이를 창작자들 간에 상호 참조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열어주고 있다. 게임회사와 유저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머시니마는 현재의 기술적 제약을 극복하며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게임개발자 노치(Notch)가 2009년에 출시해 엄청난 흥행을 거둔 게임 <마인크래프트>는 머시니마 제작에 자주 활용되고 있는 대표적 게임이다. 블록화된 게임 속 세상에선 블록의 조합에 따라 도끼나 나이프, 곡괭이, 벽돌, 창살, 문, 집, 각종의 탈 것 등 그 무엇으로든 제조가 가능하다. 반대로 재분해도 가능하다. 이 게임은 언제 어디서든지 분해와 재조립이 가능한 세계를 담고 있으며, 유저가 특정한 게임의 룰을 따를 것이 아니라 게임의 룰을 스스로 만드는 행위를 게임 내에서 유도한다. 이 같은 자유도는 곧 표현 매체로서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머시니마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진짜 중요한 질문은 게임엔진의 소스를 이용해 만든 아마추어들의 머시니마가 기존 영화와 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머시니마와 같은 방식의 컴퓨팅 파워와 데이터베이스 기반 창작이 우리들의 창작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해야 한다. 컴퓨터를 이용한 창작방식은 ‘현존과 부재’라는 도식 대신에 ‘코드화된 패턴과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끝없는 상호 참조와 임의적 사용’을 강조한다. 생산된 콘텐츠나 문서는 디지털화된 코드로서 저장되고 표현되므로, 완벽히 상호 텍스트적인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상호 참조는 점점 더 간편화되었고, 누구나 그 원소스의 출처를 간편하게 밝혀낼 수 있으므로 더 이상 원본의 출처를 숨기거나 변형하는 일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머시니마는 이러한 창작환경이 만들어낸 한 경향인 것이다.
게임학자 곤살로 프라스카 4)는 플랫폼 기반의 제품군, 오픈 소스 코드(open source code), 유저 공동체의 자발성, 개방형 혁신 체계 등을 요구한다. 그는 디지털 게임 기반의 보알 연극을 기획하면서 게임 개발사가 독점적 위치에서 내려와 플레이어들의 개조 행위를 허락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스테이지를 만들고, 캐릭터를 수정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머시니마와 같이 1인 체제의 스토리텔링 표현이 가능하게 되거나 모드 제작 같이 기성품 게임의 디자인을 유저가 직접 수정할 수 있게 된 것은 ‘개방되어 있는 게임엔진’ 덕분이다. 오늘날 게임엔진은 놀이의 흔적을 표현과 생산의 차원으로 적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게임 안에 감추어진 긍정적 요소(자기표현과 공감)를 강화하여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매체로 나아갈 것인지, 부정적 요소(감정착취와 놀이노동자)를 강화하여 누구나 뜯어먹기 쉬운 매체로 추락하고 말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1) https://en.m.wikipedia.org/wiki/Machinima
2) 박용주, 「MMORPG의 머시니마를 통한 영상미디어의 확장성 연구」, 『한국컴퓨터게임학회논문지』 25, 2012, p. 107.
3) https://www.unrealengine.com/ko/blog/epic-games-releases-12-million-worth-of-paragon-assets-for-free
4) 곤살로 프라사카, 『억압받은 자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0.
오영진
오영진
문화평론가. 2012년 이후부터 문학과 문화의 영역을 오가는 강의를 하고 글을 발표하고 있다. 주요 평론으로 ‘컴퓨터 게임과 유희자본주의’ ‘인디의 추억’ 등이 있고, 「거울신경세포와 서정의 원리」 「공감장치로서의 가상현실」 등의 논문을 썼다. 한양대 ERICA 융복합 교과목 ‘기계비평’의 기획자 겸 주관교수이기도 하다. 현재 인문학협동조합 총괄이사이자 수유너머 104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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