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를 앞둔 초여름의 해 덕분에 저녁 7시가 되어도 하늘은 밝았다. 수원시 평생학습관(이하 ‘학습관’)을 방문한 날은 일 년에 한 번 학습관의 활동을 시민과 공유하는 ‘활짝 여는 날’ 행사 기간(6.13~15.)이었다. 마당에 조성된 숲에서는 학습자들이 모이는 ‘비밀의 숲’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비밀의 숲’은 평생학습관 학습모임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주제로 학습자들이 즐거움과 고민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이다. 행사장은 아파트와 빌라에 둘러싸인 곳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도 좋을 만큼 숲속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 숲에서 시민의 삶과 함께하는 자기 주도형 학습모임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만날 수 있었다. 먼저 학습모임 7개 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습자들은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함께 공부하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 즐거움은 다른 사람의 언어를 통해 생각이 넓어지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수원 하모니기타앙상블’은 산울림의 <너의 의미>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비밀의 숲을 열어주었다. 2012년부터 중년의 회원들이 더 나이 먹기 전에 악기 하나씩 다루고 싶은 로망을 함께 실현하며 공연을 할 정도로 꾸준히 실력을 쌓고 있다. 올해 생긴 모임 ‘흙흙흙’은 텃밭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들이 겨울에 농사를 멈춰야 하는 상황에서 씨앗을 공부하고 화덕을 만들면서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학습관 마당에다 화덕을 6개월간 함께 만들고 이번 ‘활짝 여는 날’ 행사에서 화덕에 피자를 구워 팔기도 했다. 학습자들은 ‘농사’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모여 함께 공부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학습관에는 모두를 위한 공공 공방인 ‘거북이공방’이 있다. 공방 운영 초기에는 목공 전문가인 강사를 중심으로 학습이 진행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3~5명으로 구성된 소모임들이 공간을 운영하는 구조가 되었다. 학습자들은 공방 사용자이면서 때로는 다른 학습자에게 기술을 전하는 강사이자 필요한 강좌를 유치하는 기획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양한 소모임 중 ‘두드림’의 학습자들은 매주 목요일마다 퇴직한 친구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소품을 만들고 ‘더느린시장’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실제 현장에서 판매되고 있던 작품들은 상당히 구매 욕구를 자극했다. 특히 6개의 나무토막을 끈으로 묶어 만든 냄비 받침대가 이미 팔렸다는 말에 무척 실망할 정도였다.
‘시집통째로읽기’ 모임은 3년 전부터 한 달에 1~2회 모여 시집 한권을 돌아가면서 읽고 감동을 나누고 있다. 시집 통째로 읽기를 통해 누구나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으며 짧은 시 한 편을 낭독했다. 학습모임을 통한 소통과 교감의 과정은 온전한 한 세상과 세상이 만나는 것이 아닐까? 짧은 시였지만 울림이 컸다.
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는
세상 전부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유투공’은 ‘유튜브(Youtube) + 유투(YOU TOO) + 공부’를 의미한다. 테드(TED),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등의 영상을 함께 보고 토론하며 공부한다. 2018년부터 ‘경제를 보는 눈’, 기획단 ‘유유자적’ ‘미술과 친해지기’ 등의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유유자적’에서 활동하는 학습자는 강의 후 같이 토론을 하면 학습효과가 더 커진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유튜브를 통해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습자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장욱진의 그림을 떠올리게 되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함께 공부하는 것이 매우 행복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우리의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다
지식을 나누고 새로운 실험을 하면서 배움이 깊어지면 사회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지구에 보탬이 되는 삶을 고민하는 ‘더 느린 삶’ 강좌에서 파생된 모임들이 있다. 그중 양봉 모임과 발효 모임의 학습자들은 후속 공부 모임을 지속하면서 꿀, 막걸리, 식초를 생산하고 ‘더느린시장’을 통해 판매하기도 한다. 양봉 모임의 학습자들은 벌이 멸종하면 4년 이내에 인류가 멸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양봉 활동이 지구를 살리는 실천으로 여겨졌다. 이내 학습자들은 자연스럽게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발효 과정에서 막걸리와 식초를 만들고 있는 ‘전사동’은 지역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인문분야의 학습모임인 ‘나침반’은 독서 토론 강좌의 후속 모임으로 활동하면서 공부 경험이 쌓이자 저자를 만나고 강의를 의뢰하다가 인문강연을 기획하며 운영하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여행, 감수성과 울림 등을 주제로 강연을 기획하여 더 많은 시민과 공유하고 이슈를 찾아 해결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학습관은 그동안 웹진 [와]를 통해 자기 주도적 학습이나 학습모임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 이유는 가급적 일상적인 학습 환경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가진 학습력을 스스로 깨닫고 발휘하게 하려는 데 있다.(‘더 일상적이고 다양한 학습 장면’, 웹진 [와], 2018.7) 벌을 키우거나 막걸리를 만들고 강좌를 기획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에 한 발을 내디디며 삶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어떤 변화를 위한 실천을 모색하는 것은 시민의 학습력이 향상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발휘의 과정이기도 하다.
초여름 밤하늘은 저녁 8시가 되어도 푸르스름했고 학습자들과 학습관의 연구원들은 자리를 정돈하고 좀 더 편안하게 의견을 나눴다. 현장에 함께 있던 한 학습자는 학습 모임이 운영되는 과정과 의미가 압축된 것 같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학습관에 요가를 배우러 왔다가 인문학 강의를 듣게 되었고, 후속 공부 모임인 ‘들길’을 꾸려 7년째 독서 토론을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이에 학습관에서 상담사로 일하게 되었고 액티브시니어아카데미 ‘뭐라도학교’에서 자발적인 활동도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학습 모임은 한 사람의 제2의 성장을 도모하고 사회적인 역할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밀당의 고수들이 있다
학습관의 연구자들은 학습자들의 자기 주도형 활동 기회를 마련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자체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각자의 노하우를 공유해왔다. 강사 없이 활동하는 학습자들끼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지원자이자 동기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학습자들과 얼마나 많은 밀당을 주고받았을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럼에도 밝은 얼굴로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활동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거북이공방을 담당하는 연구원은 강좌 운영과 학습 모임을 지원하면서 공방의 활동 모임 중 하나인 ‘곰세마리’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녀는 학습자들과 함께 친밀감을 느끼고 교류하면서 학습자로서의 즐거움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당당한 삶’ 강좌를 담당하는 연구원은 학습관을 학생 때부터 이용한 학습자이자 자원활동가였는데 20대에는 학습관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20대 학습자들이 적은 편이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학습자들과 만나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듣거나 자료를 공유하면서 서로가 원동력이 되고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인문학 모임을 담당하는 연구원은 시민과 만나는 것이 부대끼고 피곤하고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것 같다고 한다. 연구원과 학습자들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 두고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편 학습모임들이 자발적으로 운영되도록 연구원들은 어느 정도의 거리 두기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강좌마다 가진 성격을 고려해서 개입의 수준과 방법을 달리했다. 일례로 인문 공부 모임의 학습자는 내부에 몇 가지 갈등이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해결되도록 믿고 기다려준 연구원의 역할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모임의 참가자는 학습자들이 하고 싶은 것은 하도록 자극하고 할 수 있게 이끌어주어 지속적인 모임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연구원들의 역할이었다고 했다. 다양한 변수 앞에서 최적의 결과를 위해 학습자들과 밀당을 주고받는 고수들(연구원)이 이곳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풀리는 비밀들
그렇다면 학습 모임이 계속 유지되고 활기를 갖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여러 학습자가 경험을 보탰다. 기획 활동으로 확장된 모임이나 양봉 모임을 통해 확인한 것처럼 학습 활동을 통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인식하고 사회적 변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모임에 활력을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비밀의 숲’에서 사례를 공유한 만큼 이러한 인식의 확장과 실천적인 활동들은 앞으로 여러 학습모임에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연령대의 학습자들과 바쁘면 바쁜 대로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만나는 다소 느슨한 모임 방식은 학습 모임이 계속 유지되는 비밀 중 하나이다. 회원들과 함께하는 공부의 경험이 좋은 만큼 회원이 빠져나가는 것도 두렵다면 부담스러운 약속보다 오히려 ‘느슨한 활동’을 권하는 경험담이 이어졌다. 모임 구성원들은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과 다른 일들로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서로 맞는 시간에 만나서 책 하나라도 꾸준히 읽으며 모임이 끊어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원시 평생학습관은 유네스코 국제성인교육회의에서 ‘학습권’을 “인류를 사건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객체적 존재로부터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는 주체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권”이라고 천명한 부분에 주목했다. 교육권이란 말에서 비롯되는 오해와 한계를 넘어서 학습자 스스로 교육을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한 것이다.(‘모두의 평생학습보다 각자의 평생학습’, 웹진 [와], 2019.6) 적어도 이곳의 학습모임은 교육의 선택을 넘어 학습자 스스로 일상적인 삶의 과정과 교육을 주체적으로 통합하며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학습자들의 긴 이야기 끝에 초여름 밤은 깊은 어두움으로 덮였다. 낮이 긴 만큼 대화의 여운도 긴 하루였다.
사진제공_수원시평생학습관
- 신미라
- 군포에 있는 수리산상상마을(前 군포책마을)에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사업을 하고 있다.
baobabatdau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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