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신나게 춤출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내가’ 여자들을 춤추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지난해 7월 여성주의문화운동단체 ‘줌마네’의 한 워크숍에 참여하면서였다. 평균 연령 40대 중반쯤은 될 듯한 스무 명 남짓의 여자들이 아름다운 풍광의 강원도 모처에 모여들었다. 원래 워크숍의 콘셉트는 템플스테이였다. 고요히 자신의 일상을 점검하고, 조금씩 걸으며 주변의 자연과 교감하는 느리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 주변에는 구멍가게 하나, 편의점 하나가 없었기에 술도 마실 수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에서 돌아온 여자들은 산골의 풍광이 한눈에 보이는 홀에 모여들었다. 처음엔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소박한 여흥을 즐겼다. 슬며시 등장한 와인 몇 병과 맥주 몇 캔. 그러다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 <바위처럼>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흥에 겨운 엉덩이와 다리는 이 여자들을 일어서게 했고, 어디선가 나타난 앰프와 디스코 플레이리스트는 본격적인 춤의 시간으로 이들을 끌어들였다. 조용한 행사를 진행하려던 주최 측은 곤란한 표정이었지만, 이미 춤추기 시작한 여자들을 멈출 수는 없었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여자들의 얼굴은 환희로 빛났고, 몸은 더없이 자유로웠다. 그 어떤 외부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흥에 취해 마음껏 몸을 흔드는 시간과 공간. 우리는 서로의 몸을 평가하지도, 판단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축하하며 공존했다. 한껏 달아오른 얼굴들이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다. ‘아, 이 여자들이 자주 이렇게 온몸으로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흥겹게 맘껏 춤출 공간
2,30대에 갔던 클럽들은 마흔이 넘은 내게는 불편한 장소가 되어있었다. 그곳을 가득 채운 젊음과 성적 긴장은 마음 편하게 막춤을 추어대는 중년의 나에게 열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 스스로 그런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춤출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런 음악을 찾아 들려주는 방법도 있었다. 디제이(DJ)가 되기로 했다. 일본의 82세 디제이 스미코의 소식(‘여든 둘 스미코의 낮이밤이…세계 최고령(?) 클럽 DJ’, 2017.02.17., 경향신문) 도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디제이가 되기 위해 레슨을 받고 간단한 장비를 구입했다. 레슨 시작 두 달 후 (주로) 여자들(만)의 연말 파티에 디제이로 섰다. 초보 디제이. 디제잉(DJing) 선생님의 걱정과는 별개로 반응은 제법 좋았다. 청년, 중년, 장년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추억의 춤곡들을 골랐고, 그중에서도 여성 아티스트의 곡들을 선곡했다. 춤추고 싶었지만 적당한 장소도, 시간도, 기회도 없었던 여자들은 신나게 춤을 췄다. 나의 디제잉으로 이들을 춤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기뻤다.
그러던 지난해 말, 클럽 ‘버닝썬’ 사건이 온라인에 회자되고 뉴스화되기 시작했다. 폭행 사건으로 시작된 클럽 버닝썬에 대한 관심은 그곳에서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성추행, 성착취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까지 이어졌다. 소셜미디어에서 청년 여성들은 여성 혐오, 강간 문화를 조장하는 클럽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한편에서는 이러한 운동이 이 와중에도 여전히 클럽에 가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격이 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러다가 여성들의 춤이 완전히 금지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의 흥을 발산하기 위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에게 춤을 허락하는 여성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걱정이 되었다. 때마침 여성의 자립을 도모하는 한 단체에서 ‘페미니즘X몸’을 주제로 수업을 의뢰해왔다. 그 단체의 지원을 받고 있는 여성들이 몸을 통해 페미니즘을 익히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막춤을 추는 수업 어떨까요?” 나의 제안을 센터 대표님은 흔쾌히 수락했다.
흥겨운 막춤의 자유를 허하라
여성들은 가부장제 구조에서 남성의 시선, 혹은 외부의 시선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게 될지 신경 쓰고 길들여지기 때문에 ‘막춤’을 추기가 쉽지 않다. 자유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체화한 해방된 여성이나 나이가 지긋한 장년, 노년의 (도시에 살지 않는) 여성이 되어야 비로소 흥에 겨운 막춤을 출 수 있게 되니, 그때나 되어야 스스로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다. 막춤을 출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내면에서 저절로 나오는 흥과 리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이 수업은 우리가 속한 문화적 환경을 살피고, 그 안에서 어떻게 길들여져 왔는지 비판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보고 여성인 자신의 몸과 존재 자체를 긍정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페미니즘 입문과 예술 매개 워크숍, 파티 준비와 개최 등 총 8회로 구성하여 올 3월부터 진행했다.
페미니즘 입문 강의는 우리가 속한 사회가 여성을, 몸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자 여자 클럽 춤 배우기-같은 춤 다른 느낌’이라는 제목의 클럽 댄스 관련 동영상을 보며 클럽에서 권장되는 여성과 남성의 동작과 태도의 차이를 파악하고, 최근 페미니즘 물결의 영향으로 등장한 새로운 광고(위스퍼, 나이키 등)에서는 여성 신체 이미지의 변화를 확인했다. 입문 강의 참여자들의 질문과 의견을 반영해 ‘일상의 페미니즘’으로 심화과정을 진행했다. 일단 머리로 여성인 나에게 ‘막춤’이 가능한지 질문하고 고민한다.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것. 내면의 소리와 리듬에 귀를 기울일 것. 이 두 가지가 가능하지 않다면 막춤은 불가능하다.
예술 매개 워크숍으로는 자화상 콜라주와 내 몸 그리기, 동작 치유를 진행했다. 콜라주와 내 몸 그리기에서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판단이나 평가, 비판이 아닌 느낌을 말한다(느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를 통해서 나의 상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 각자의 느낌은 존중되고, 작업에 대한 판단, 평가가 없으므로 안전하다고 느끼게 된다. 동작 치유 시간에는 몸의 경계심을 풀고, 몸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연결되는 연습을 한다. 음악과 함께 간단한 몸 움직임을 연습하며 막춤추기의 첫발을 내디딘다.
시선에 자유롭게, 내면에 귀 기울이며
파티를 위해 나를 변신시키는 것은 이 강의 과정에서 중요한 과제이다. 대개의 여성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나에게 적당한 것’을 선택하는 데 익숙하다. 때문에 파티를 위해 일상적이지 않은 의상이나 ‘완전히 다른 나’로 변신하기 위해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떻게 꾸밀지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자료를 찾는 과정을 서로 도와야 한다. 파티에 적절한 치장이 어떤 것인지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입고 싶었던 동물 모양의 옷을 준비하기도 하고, 마블 시리즈의 주인공 복장을 선택하기도 한다. 서로 권하고 돕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더욱더 단단해진다. 이 강의의 하이라이트는 파티이다. 오로지 여성들로만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 어떤 공포도 없이 춤추고 즐긴다. 술을 마셔도, 취해도 안전하다. 감추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입는 옷. 단점을 커버하려고, 진짜 나를 가리려고 하는 화장이 아니라 숨겨놓았던 나를 표현하기 위해 하는 화장. 그렇게 두려움 없이 뜨거운 파티를 즐긴다.
8회의 수업은 무사히, 아니 성황리에 끝났다. 진행이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취약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립 지원이 필요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참여자 중에는 폭력이나 심각한 차별과 착취의 경험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수업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거부하고 싶어 했다. 정성 들여 준비한 수업보다 개인적인 관심과 소통에 더 집중하기도 했다. 의도한 대로 수업이 진행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막춤으로 페미니즘-몸의 해방’ 수업은 마치 한 편의 공연처럼, 드라마처럼 극적인 엔딩을 맞았다. 파티를 통해 우리는 작은 해방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었고 마음을 활짝 열게 했다.
‘버닝썬’이 여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움츠러들지 말자. 그들이 만들어놓은 장소는 버리고 새 장소를 마련하자. 여자들이 안전한 공간, 여자들이 신나는 공간을 만들자. 거기서 우리 해방되고, 충분히 강해지자.
- 지현
- 1997년 페미니스트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공감과 환대, 치유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페미니스트 가수로 20여 년간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페미니즘교육연구소 연지원 대표, 여성문화생산자협동조합 무지개공방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기획자로도 활동 중이다.
www.ziihii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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