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거운 노년의 아티스트

대전광역시노인복지관 연극반 김윤진, 김광순, 김복순, 이복순

2019년 1월의 이른 아침, 대전광역시노인복지관에 들어설 때 받은 첫인상은 뜻밖에도 ‘활기’였다. 왁자지껄 주고받는 새해 인사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지나다니는 분들, 웅성웅성 수다 소리. 그곳은 노인복지관이라기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중·고등학교의 풍경 같았다.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활기가 감도는 대전광역시노인복지관에서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노인분야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 참여하여 11년째 연극반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노년의 참여자를 대상으로 연극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연말에는 연극 한 편을 발표했는데, 작년에는 처음으로 소극장을 대관해 공연하기도 했다. 연극반 활동과 함께 최근 TV 드라마 출연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계시는 김윤진(85), 김광순(78), 김복순(76), 이복순(73) 할머니를 만났다. 개성 강한 할머니들과 유쾌한 수다 속에서 연극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연극은 다른 인생을 사는 것
할머니들이 처음 연극반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각기 달랐지만, 연극반에서 느꼈던 첫 느낌은 비슷한 듯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 이것은 연극이, 구체적으로는 연기가 다른 예술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다른 인물이 되어서 갈등을 겪고 행동을 하고 감정을 느끼는 과정은 연기해본 배우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이다.
김광순 : 내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살잖아. 그래서 재미가 있는 거야. 그래서 ‘아, 연극부를 해야겄다.’
이복순 : 우리가, 예를 들어서 기생 역할을 어떻게 해봐. 내 인생 아닌 남의 인생을 살아보니까 좋잖아. 기생 인생을 어떻게 경험하고, 사또 역할을 어떻게 해봐. 그러니까 그 마음이, 그걸 허면 그 기생이 돼야 되고, 사또가 돼야 하니까. 아, 이런 게 있구나 싶고. 사또의 몸가짐이라든지 뭐라든지, 또 기생은 또 슬프기도 허고.
김복순 : 젤로 예뻤어~, 사진에 젤로 예뻐.
이복순 : 사는 그런 삶의 모습이 다른 거 아녀. 아주 유교적인 가정에서 꼭 틀에 백힌 교육에서 맨날 이렇게 허다가 그걸 해보니까 신기허고 부끄럽기도 허고. 그런 거를 그 사람들도 먹고살기 위해서 이렇게 막 얼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했었나 이해도 되고. 사또는 또 이렇게 (자신을) 지켜야 하고 유혹하는 것도 많고. 권위도 있어야 허고.
‘여자는 목소리도 크게 내기 어려웠던’ 시절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은 관객 앞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연극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즐겁다고 하셨다. 연극은 할머니들을 특정 시대와 공간에서, 하나의 인물로 존재하며 타인의 삶을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할머니들은 이 신기한 경험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아서 연극반에 참가하게 되셨다.
‘함께’ 만드는 연극
네 분의 할머니 중 가장 연세가 많으신 김윤진 할머니는 20대 때부터 성당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봐주고 시신을 닦고 장례를 돕고 살아온 자신의 삶 자체가 연극이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들은 이미 삶으로 연극을 이해하고 계신 듯했다.
김윤진 : 그러니까 노인들한테 가면 제가 며느리 노릇을 하는 거야. 그게 연극이에요. 그분들은 정신이 없으니까 이제 며느리인 줄 알고 “어디 갔다 이제 와 이X” 그러면, 어머니 저 이제 왔어요, 그러고 가서 시중들어주고. 그러니까 저는 그게 연극이었어요, 맨날. 젊은 애들한테 가면 “에휴, 너 또 왜이랬니” 그러면서 어머니 노릇 하고. 그러니까 저는 생활이 연극이에요.
김윤진 할머니는 연극을 할 때도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를 생각한다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연극을 만들 때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연기(acting)도 중요하지만 리액션(reaction)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한다. 연극은 함께 만드는 공동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른 할머니들도 연극반의 매력을 ‘함께’ 하는 활동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복순 : 다른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 살아도 괜찮은디, 연극반은 다 단체가 열정을 가지고 똑같이 움직여야 되는 거니까. 다른 수업은 다른 이가 없어도 괜찮아. 자기 수업 자기만 하면 되지. 연극은 가입을 하면 한마음 한뜻이 돼야 하는 거니까는. 허다가 마음이 안 맞으면 못하고 열정이 없으면 못 허는 거지.
연극 연습을 하면서 함께하는 활동은 서로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을 함께 먹고 아픈 사람을 챙기면서 연대감을 느끼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 김복순
  • 김윤진
  • 이복순
  • 김광순
배우의 자존심
대전광역시노인복지관의 연극반은 3월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연극 놀이와 미술 활동, 정서적 감각을 열어주는 활동 등이 주를 이루게 되고 6월이 되면 연말 공연을 위해 작품을 선정하고 연습을 시작한다. 장장 5개월간의 연습 기간을 거쳐 준비된 연극은 종강 발표회 날 공연하게 된다. 그동안은 복지관에서 발표회를 했었는데 작년에는 소극장을 대관하고 관객을 초대해 정식으로 공연을 했다. 할머니들은 공연 얘기가 시작되자 실수담이 쏟아졌다.
김윤진 : 인제 자기가 출연을 해야 하는데 출연 안 해서 나와~ 나와~ 소리 질러야 되고.
김광순 : 앞 사람 대사를 못 받으니까 이게 엉망이 될 수밖에. 그러니까 선생님이 (부르러) 막 뛰어가지.
공연이 끝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공연에서 생긴 작은 실수들에 대해 아쉬움은 여전하신 것 같았다. 문제점을 지적하고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목소리를 높이셨다. 관객들에게 더 나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할머니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연극을 해 오신 할머니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새로운 도전
연극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네 분의 할머니들은 곧 방영될 <눈이 부시게>(JTBC, 2월 방영 예정)라는 TV 드라마에 출연하신다. 전국 노인복지관의 연극반 회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오디션에서 30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셨다.
김광순 : 이 나이에 내 인생에 보람을 느꼈고, 또 가서 여러 배우도 보고 만나니까 즐겁고 추억도 냄기고. 나이 먹으면 무서울 게 없어.
김복순 : 처음에 우리는 뭣도 모르고 갔지, 다.
모두 함께 : 맞아. 무서울 게 없어.
김윤진 : 누구 말마따나 용기는 내가 줬어요. 처음에 못한다고, 못한다고, 그럴 때 이왕 시작한 거니까 용기 내서 해봐 (그랬지).
이복순 : 형님이 그러시더라고. 늙어서 이거 언제 또 해보냐? 해봐, 혀. 노인이, 나보다 선배가 이렇게 말씀을 허니까, 또 같이 이렇게 허는 거니까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안 되것더라고.
할머니들은 ‘옆집 할머니’ ‘할머니 1,2,3’의 역할을 맡아서 3개월 동안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촬영을 하셨다. 낯선 환경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유쾌하게 촬영담을 이야기하셨다.
김복순 : 뭐를 배웠냐면, 거기서(촬영장에서) 이 옷을 입고 한 카트를 찍었잖어. 그러면 이 카트는 열 칸 중에 한 칸이야. 근데 다른 것을 할 때 또 다른 것을 입었어. 근디 이전에 찍은 거랑 세트로 들어가는 거를 며칠이 지나서 (의상을) 똑같은 거로 가져오라는 거야. (이복순 : 연결, 씬(scene)이 연결돼야 허니까.) 그걸 대전에다 갔다 뒀는디. 그래갔고 서울에서 대전을 와서 이걸 또 손질을 해갔고 밤중에 밤 두 시 돼서 가고.
김광순: (이복순을 가리키며) 여기는 신발을 대전에다 놓고 가고, (김복순을 가리키며) 여기는 옷을 놓고 갔어. 그랬더니 아들을 시켰어. 그리고 나한테 열차표 시간을 알려줘서 내가 그리로 전달해주고.
이복순 : 시청자들이 그렇게 정확허대요, 보는 게. 화장이고 뭐고 한번 한 그대로 해야지, 일절도 틀리면 안 돼요.
다음에도 기회가 생기면 도전하시겠냐는 질문에 “다 할 거여. 할 수 있을 거 같아.”라고 말씀하시는 이복순 할머니의 차분한 목소리에서 작은 도전이 할머니들에게 큰 성취감과 자부심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극을 통해 용기를 얻다
할머니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할 힘을 연극을 통하여 얻었다고 하셨다. 연극반에 참가하는 것은 할머니들의 삶에 활기를 주고 연극을 하면서 느낀 성취감은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는 자신감이 된다.
김복순 : 연극을 허고, 연습을 하러 가고 그럴 때는 내가 단장을 허고 일찍 시간 맞춰서 일어나야 되고 활력이 저절로 나오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이틀 집에 있다 그러면 아무런 의욕이 없어져 버려. 마음이랑 몸이 다 풀려서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나, 막 그런 생각이 들고. (연극을 하면) 즐겁지. 몸이 아픈 줄도 몰랐어.
김광순 : (김복순 할머니를 가리키며) 촬영장에서도 20년도 더 할 수 있다고 불러 달라고 그래서 웃고 왔잖여. 아직도 20년은 할 수 있다고 또 불러달래.
김복순 할머니는 재미있다는 듯 손사래 치며 웃으시다가 진지하게 의지를 담아서 “내가 손발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연극반을 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연극반에서의 활기는 할머니들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다음 주자들에게
할머니들의 새로운 도전을 가능하게 하고 삶에 활기를 준 연극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다른 분들을 응원하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김윤진 : 아마 올해에는 몇 명이 들어올 거 같아요. 이 늙은이가 하니까. 자기들이 나보다 쪼금 아래거든. 그러니까 용기를 갖는 거여. 그래서 내가 죽으면 안 돼요. 죽는다는 게 목숨이 죽는다는 게 아니고 내가 그만두면은 그 뒤에 오고 싶은 사람도 ‘내가 이 나이에 뭘 해’ 그러고 안 할 거 같애. 그래서 저는 (무대에서) 한마디를 해도, 지나가는 사람을 하더래도 나와야 되요. 자기들이 나한테 묻더라고. “나도 해도 돼?” 하고. 그래서 내가 내년에 꼭 신청해라. 꼭 신청해라. 이거를 하믄 사람이 희망을 갖는다. 내가 지금도 뭐를 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질 거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할머니들께 출연료를 받으시면 어디에 쓰실지 여쭤봤는데, “쓸데 많아” 하시며 미소 짓는 모습에 건강한 자존감이 배어있었다. 할머니들께서 연극반 활동을 하시면서 오랫동안 연극의 즐거움을 향유하시기를 응원한다.
사진_박영균(미디어작가)
최설화
최설화
연극배우. 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일곱집매> <문밖에서>, 보호관찰 기간을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과 만든 <청춘예찬> 등의 공연에 출연하며 사회 이슈를 다룬 연극에 참여해왔다. 2017년 영국의 Royal 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에서 Applied Theatre 석사 과정을 마쳤다.
csf10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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