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경험을 적어보라고 시키곤 합니다. 놀랍게도 많은 학생들이 떠올리는 행복한 순간은 예술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연극을 했던 것, 피아노를 배워 친구와 연탄곡을 치던 것,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처음으로 인화하였던 순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예술은 행복합니다. 아직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놀이입니다. 그렇기에 재미있습니다.
– 김영하 산문 『말하다』 중
이 문장은 내가 어린 시절 참여했던 <미술관 문화학교>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한다. 그린다는 것이 단순히 평면의 종이 위에서만이 아닌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때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두근거림이자 작은 행복이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아이들 또한 그러한 경험을 마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첫 수업뿐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을 마음철학으로 풀어갔으면 한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마주하는 하루하루, 매 순간이 항상 나에겐 첫 시간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학생들과 함께한 <45분> 프로그램
첫날, 첫 번째, 첫 수업, 첫인상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누구나 두근거리기 마련이다. 이런 날, 예상과는 다른 아이들의 반응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첫 수업! 정말 많은 것을 열심히 준비했고, 나는 잘할 것이고, 재미와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이고, 아이들을 이 수업의 매력에 풍덩 빠지게 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예감했던 순간, ‘어~ 그거 해봤어요.’ 또는 ‘그거 알아요.’하는 아이들의 시큰둥한 반응. 이로써 나만의 소중했던 수업이 흔하디흔한 ‘그거’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문화예술교육자로서 아이들을 만났던, 나의 첫날 첫 번째 만남의 첫인상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한 예술수업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묻고 그것을 글자나 그림 또는 기호로 표현해도 된다고 하자 열 살 아이들은 사뭇 진지해졌다. 그리고 우리들의 예술수업에 대한 마음을 하나씩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실패라고 생각했던 첫 수업이 또 다른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다.
난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무섭게 변해요. “얘들아 빨리 마무리하자!” 하면서요.
나도 선생님께 사랑을 받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예쁨을 받으려면 다른 친구보다 잘해야 해요. 그림 그리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경쟁이 아닌데요.
종이에 갇힌 기분이에요. 그리는 건 즐거운 건데 왜 난 항상 갑갑하고 힘든 걸까요?
예술수업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읽은 그 날 이후로 아이들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예술활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와 사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교육 활동 사례와 이슈가 만들어지는 공간은 하나의 ‘놀이+터’로 시간과 공간, 참여자와 다양한 재료가 제공된다는 점에서 아이들과 다양한 각도에서 마주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믿고 생각하는지에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기울여 마주보는 시간이 되었고, 이 시간이 쌓여 어느새 아이들만의 문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풀어가는 우리들의 ‘다섯 손가락 문화’ 프로젝트다.
예술로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이야기
‘다섯 손가락 문화’ 프로젝트는 다양한 대상자들의 니즈(Needs)에서 출발했다. 15명의 남자아이들과 이미지로 무엇이든지 만들어가는 <이미지 목공소>, 도심 인근 하늘과 바다를 마주 보는 섬마을 아이들과는 <옥상교실>, 사춘기 여학생들로 이루어진 <소녀시대교실>, 그리고 7살 아이들의 철학으로 만들어진 <봉지놀이 개발실>, 반항에 반하는 <우리들의 명랑교실>, 학교에서 만나는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우리들의 인생 <45분> 등의 또 다른 ‘다섯 손가락 문화’ 프로젝트를 이어가며 아이들의 다양한 이슈와 생각들을 예술활동으로 연결되었다.
‘다섯 손가락 문화’ 프로젝트는 움직임이 있는 미술 활동으로 각각의 활동에 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물음표를 던지며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수업이다. 시각(보고, See it)-청각(듣고, Hear it)-운동감각(움직이기, Do it) 외에도 다양한 활동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심의 체험활동이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스스로 또 다른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문화예술활동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야기와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45분>은 또 다른 소규모 예술활동 모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7살 아이 대화에서 시작된 <봉지놀이 개발실>은 수업 전 스스로 만들어가는 활동이 되어갔다.
7살 아이들과 함께한 <봉지놀이 개발실>
마음아, 열려라 참깨!
미취학에서 초중고등학교 아이들,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예술로 서로를 이해했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아이들과의 만남까지,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자 진행했던 프로그램 <늘었다 줄어드는 일명 마법의 카드>(이하 마법의 카드)를 소개한다. 한 장의 종이로 다양하게 바라보고 이야기를 표현하는 활동으로, 장애아동 미술에서는 시각 활동으로, 무용에서는 움직임을 이끄는 연상 도구로, 연극에서는 스토리텔링 구성 놀이로 이어갈 수 있다. 첫날의 첫 시간, 제한된 재료로도 다양성을 피울 수 있는 활동이다.
먼저 종이를 S라인으로 접어준다. 접힌 부분은 놔두고 펴진 면 위에 생각나는 그림을 그린다. 종이를 펼치게 되면 접혔던 부분에 생긴 빈 곳에 다양한 연상을 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메시지를 작성한다. 종이 한 장과 그림으로 시작된 활동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상상력을 펼쳐낸다. 잠긴 문 안의 또 다른 세상, 보석함 속 소중한 그 무엇들과 메시지…. 집에서 또 다른 마을로 연결되고, 외로이 서 있던 한 그루의 나무가 여러 개의 나무로 이어져 숲이 되고, 꽃 한 송이가 꽃밭이 되었다. <마법의 카드>는 어색할 수 있는 첫 만남에서 아이들의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내고 이야기를 나눌 거리를 준다.
<늘었다 줄어드는 일명 마법의 카드>
느린 깨달음이 있는 현장의 산책자가 되어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으로 베트남 박하와 사파 지역 아이들을 만나던 당시, 읽고 있던 책에서 본 ‘플라뇌르(Flâneur)’라는 용어는 무척 흥미로웠다. 프랑스어로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말을 빌리면 ‘경험하기 위해 걷는 사람’이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 3 – 도시의 산책자』에서 언급한 ‘플라뇌르’의 개념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는 관찰하고 머리로는 사고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걷는 사람이다. 본능적인 감각의 날을 세우고 걷는 이는 한가로운 산책길에서도 찰나를 놓치는 법이 없으며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을, 이미 보았던 것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가까운 곳에서 많은 것들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플라뇌르적 감각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에게서 반짝이는 무언가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예술교육자로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고 함께 걷는, 느린 깨달음이 있는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산책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정원
예정원
사회 문화예술교육, 학교 문화예술교육 예술강사이자 문화예술활동가이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강사의 발’, ‘움직이는 예술정거장’, ‘KT드림스쿨’, 다음세대재단 ‘유스보이스 미디어교육자’ 등 다양한 현장에서 매개자와 참여자들을 만났다. 호주에서 열린 제2회 국제예술강사대회에 참여했고, 2014 한국 문화예술교육 국제 실행 매뉴얼 개발 연계 시범사업, 베트남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통해 문화예술교육 해외 교류에도 경험을 갖고 있다. 현재 학교에서 벌어지는 우리들의 인생 <45분> 프로젝트 설계자, 아이 철학자들의 <봉지놀이 개발실> 보조연구원으로 아이들과 더불어 가고 있다.
dotdadado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