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이자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센터 바비칸(Barbican)은 보통의 예술센터와는 달리 콘서트홀, 극장, 영화관, 갤러리, 도서관 등의 복합문화예술시설뿐만 아니라 길드홀음악연극대학(이하 ‘길드홀대학’) 등의 교육기관, 그리고 주거시설이 함께하는 복합문화단지를 구성하고 있다. 지난 8월 바비칸-길드홀대학 창의학습부서 디렉터 션 그레고리(Sean Gregory)를 만나기 위해 바비칸을 찾았을 때, 안내 직원은 미래도시의 모습을 지향하며 모든 요소에 공을 들여 설계한 장인적인 실험정신에 대한 자부심을 내보였다. 한 때 바비칸은 가장 못생긴 건축물이라는 불명예를 얻었으나, 지금은 현지에서 가장 감각적인 공간으로 손꼽히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수십 개의 건물을 연결하는 공중 도보가 주는 묘한 분위기와 일반주거시설과 공공문화시설마저 서로 이어지는 구조가 주는 당혹감은 분명 미래적이었다. 션 그레고리 디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만난 바비칸-길드홀대학의 예술교육에 대한 비전은 건물의 독특한 스타일만큼이나 관점에 따라 매우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
예술센터와 대학의 파트너십과 시너지
바비칸과 길드홀대학이 협력해 시행하고 있는 창의학습(Creative Learning) 프로그램은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다양한 예술체험부터 진로 및 전문 예술교육까지 예술에 대한 다양한 접근 경로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30여 년 전부터 인근 런던 동부지역 아웃리치 사업을 진행해오던 바비칸과 길드홀대학은 예술접근성과 예술경험의 질을 제고하고자 하는 공통 목표의식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교류관계를 쌓게 되었고, 7년 전부터 본격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2009년 창의학습부서가 발족되면서 길드홀대학의 창의‧전문성센터 학장으로 있던 션 그레고리가 디렉터로 부임하였다. 양 기관의 파트너십으로 바비칸의 예술 콘텐츠/인프라, 플랫폼, 예술가 풀과 길드홀대학의 교육과정/철학, (예비)신진예술가들이 만나 예술프로그램 보급부터 전문인력 양성에 이르기까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창의학습 프로그램은 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문턱을 낮추기 위해 야외 행사장에서 다양한 예술 워크숍을 체험할 수 있는 무료행사부터 지역기관 및 학교와 연계하여 학교현장에 찾아가 진행하는 예술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14~25세 청소년 대상으로 음악‧시‧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 프로그램과 진로 교육 등 다양한 층위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문인력 양성 또한 다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영국에서는 문화예술교육을 예술가의 작업과 분리된 별도 분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예술교육가(창의적 리더)와 예술가 양성 과정을 분리하는 대신 전문 예술가에게 필요한 하나의 역량으로서 창의성 촉진, 관계/소통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을 제공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문 예술교육에 대한 길드홀대학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리더십 석사과정은 전문 예술가로 양성된 학생들이 자신의 예술 역량, 기량을 다른 방식과 환경에 활용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다.(교육과정의 명칭도 ‘리더십 프로그램’이다.) 전문 예술 기량 교육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적 환경에서의 예술가 역할과 필요 역량을 함께 교육하고 있다. 1984년 시범과정 도입 후, 1987년 준석사(Post Graduate Diploma)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현재는 정규 석사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바비칸과의 협력을 통해 많은 재학생들이 창의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아동청소년들과의 작업경험을 쌓으며 창의학습 예술가 리더로 성장하게 된다.
바비칸은 이 외에도 자체적인 러닝랩(Learning Labs)을 운영하며 다장르 간 예술협업, 창작 및 창업, 예술‧건강‧취약노인과 작업하기 등 특수한 맥락에 맞는 역량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러닝랩은 길드홀 대학 리더십 석사과정 입학을 고려하고 있는 예술가를 위한 준비과정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또한 아트웍스1) 펠로십을 통해 2013년부터 참여적 환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맞춤형 역량개발을 할 수 있도록 필요에 맞는 예술기관을 매칭하고, 각 4,000파운드(한화 약 570만원)를 지원하고 있다. 2015-2016 프로그램에는 현재 BALTIC Centre for Contemporary Art, Literature Wales, National Glass Centre가 참여하고 있다.

  • 창의학습 학교 연계 프로그램

  • 리더십과정 학생들이 커뮤니티일원들과 함께한 공연
    사진 출처_ 길드홀음악연극대학
예술교육자가 아닌 ‘창의적 리더’ 양성
바비칸과 길드홀대학의 창의학습 추진에 있어 예술가 리더 양성을 위한 노력은 변화하는 시대에 직업적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역량(예술적 기량, 대인관계 기술, 창의적 역량, 소통역량, 태도 등)이 다양화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예술교육자’ 양성과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예술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 가운데 직업적 예술가의 역할/역량 변화가 불가피한 환경에서, 예술대학과 예술기관이 동참하여 예술과 전문예술가 육성에 새로운 방식을 탐색해야 할 필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보이며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노력은 그러나 예술을 사회의 필요에 따라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관점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다. 2013년 발간한 「Being-In Tune」 보고서와 션 그레고리 디렉터와의 면담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교육을 이끄는 예술가의 작업을 ‘예술가의 예술활동’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무언가 자발적으로 하기에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서도 말이죠.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지 않는 사이에 일어날 수 있죠. 그렇지만 좋은 매개자는 그것을 알아챌 것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참여자는 작업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참여적 환경에서 일하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과 그것을 창의적으로 가져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매료, 그러니까 타인에 대해 배우고 알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창작하고, 예술적 환경을 제공하는 예술가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치료사의 역할과 종종 혼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작업이 성공적이면 분명 치유의 효과가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획된 치료과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참여적 예술활동에서 우리는 행동의 변화를 목적에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변화하겠지만, 그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변화는 함께 예술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Julian West, ‘삶을 위한 음악(Music for Life)’ 참여 예술가

학교, 사회시설, 지역사회 등 다양한 사회적 맥락과 환경이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펼칠 수 있는 참여적 환경인 것이다. 다만 정통적인 환경과 다른 맥락과 환경에서 예술적 기량을 펼쳐야 하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요구되는 역량의 스펙트럼 또한 다양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참여적 예술활동을 하는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예술가적, 인간적, 전문가적(직업적) 기량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서로 유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신진 예술가들이 가졌으면 하는 것은 ‘장소(place)’에 대한 깊은 이해에요. 맥락이나 세팅, 커뮤니티보다는 ‘장소’라는 말이 더 많은 층위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 표현을 쓸게요. ‘장소’가 학교 혹은 병원, 보호시설, 혹은 교도소일 수 있겠죠. 어떤 경우 사람들이 복합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연결된 장소의 개념이 있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관계의 네트워크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치매 환자나 재소자, 혹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이건, 방 안에 함께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경험하는 ‘보이지 않는 관계들’이 있잖아요. 장소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는, 혹은 도망치고자 하는 장소들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사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Helen Nicholson, 로열홀리웨이대학교 연극공연예술 교수

“장소와 타인에 대한 개방성/열린 자세는 어떠한 협력적 창의활동 과정에 있어 참여자의 정체성/정체성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참여자의 복합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들과 함께 예술적 언어, 예술적 목소리를 구성하는 데 매우 근본적입니다. (…) ‘예술은 (타인에게) 집중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예술가의 책임은 온전한 관심을 쏟을 수 있도록 하나를 충분히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 Peter Renshaw, 「Being-In Tune」 저자 / 바비칸-길드홀대학 연구원


  • 창의학습 선언문 리플릿 – 아이들의 창의적 목소리 발견하기
예술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다른 것들을 섬세하게 탐색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예술가가 예술 작업을 다양한 ‘장소’에 놓인 타인들과 함께 해 나가고자 하는 열망과 역량이 있을 때 예술가는 다양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발휘하며 예술의 힘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 스스로 자기이해, 세상에 대한 감각과 생각, 표현의 확장을 경험했듯이 함께하는 참여자도 그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길드홀대학이 리더십 과정을 통해 교육하고자 하는 것을 예술교육자로서의 역량이기보다는 ‘예술가가 다양한 환경에서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술가가 주어진 환경과 만나는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 맺는 역량을 제대로 갖추었을 때, 예술가는 참여자를 동료 예술가로서 함께하는 예술작업 안으로 초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예술 본연의 활동이 잘 이루어질 때 예술교육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비칸 전속예술단체 Boy Blue Entertainment 안무가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존중, 자긍심, 자신감’을 갖도록 밀어붙인 이유가 (힙합 댄서로서) 제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 같아요.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것이 필요하거든요. 이 분야에서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업의 가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의견들’이 넘치는 세계에 살고 있어요. 자신이 한 것에 대해 100%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그런 ‘의견들’보다 우리는 스스로 강하고, 더 강해져야 해요.
아이들과 작업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는 춤의 기량이나 스타일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만큼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프리스타일이나 솔로 작업에서 처음 안무를 배울 때는 아이들은 시스템 안에 들어갑니다. 순서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많은 청소년들이 그런 순서에서 편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자신의 방향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자리에 놓일 때, 그때부터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때, 아이들이 각자 자기 특유의 움직임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후 각 개인이 다시 팀으로 모였을 때 더욱 강한 팀이 될 수 있죠. 저희가 적어도 아이들이 자신의 춤 안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그들의 자신 없어 하는 다른 삶, 다른 영역으로까지 나아갈 희망이 있죠.”

– Kenrick, Boy Blue Entertainment 안무가

아트웍스(Artworks) : 참여적 환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위한 전문역량 개발을 지원하여, 궁극적으로 예술기반 활동과 예술에 대한 참여활동의 질을 제고하고, 전문적이고 중요한 분야로서 문화예술교육(참여적 예술활동)분야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인식 제고를 목적으로 폴햄린재단과 스코틀랜드 예술위원회가 발족한 프로젝트.
※ 제목으로 사용한 ‘예술하기’는 「ArtE Academy 인문키움 2012」 이지애 교수(이화여대 철학과) 강의안에서 발췌, 인용하였음.
권민영 _ 대외협력팀
권민영 _ 대외협력팀
mkwon@art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