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탐험하고 발견하는 행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체력을 단련하고 기술을 익히고 감각을 키우는 과정이다. 아이들은 아직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공간을 접하게 될 때 홀린 듯 그곳을 탐색한다. 감당할만한 재료와 공구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면 아이들은 어느새 경험했던 공간을 모사하거나 상상의 공간을 건축한다. 공간 경험과 자유롭고 가벼운 건축은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놀이다. 예술가와 건축가들은 아이들에게 부드럽고 가벼운 재료로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낯선 공간을 선사하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공간 감각을 키워간다. 부드럽고 가벼운 재료라면 아이들은 건축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놀이 공간을 만들기에 저렴하고 가볍고 부드러운 재료는 이미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골판지 상자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하는가이다. 골판지 상자는 아이들에게 건축의 자유를 허락하는 팝업 놀이(Pop Up Play)의 재료로 자주 사용된다. 이 값싸고 가벼운 재료로 예술가나 건축가는 아이들을 위한 멋진 탐색과 모험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골판지 상자를 단지 쌓거나, 끼우거나, 잇거나, 뚫거나, 새로운 건축 부재로 만들어서 새로운 공간 경험과 건축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쌓거나 끼우거나
프랑스의 건축그룹 아틀리에O-S아키텍처(Ateliers O-S Architecture)는 ‘살아있는 건축 축제(Festival des Architectures Vives)’ 기간 동안 몽펠리에 생콤호텔에 40센티미터의 정육면체 골판지 상자를 쌓아 독특한 설치물을 만들었다. 칙칙한 골판지 상자에 특별함을 더한 비밀은 ‘빛’이다. 거친 외부와 달리 내부 통로 안쪽에 반사필름을 부착하고 밝고 따뜻한 조명을 켜두었다. 블랙홀이 빛을 빨아들인다면 빛은 사람을 끌어들인다. 스위스 설치예술가이자 소리예술가인 지몬(Zimoun)은 50센티미터의 정육면체 골판지 상자를 원통형으로 쌓아 멋진 공간을 만들어 냈다. 또 다른 그의 설치물은 골판지 상자와 상자 덮개 부분을 끼워 맞추며 쌓았다. 단지 골판지 상자로 만들어진 지몬의 구조물에 새로운 경험을 더하는 장치는 ‘소리’다. 상자마다 저소음의 DC모터에 대마 끈을 묶은 구슬을 매달아 골판지 상자를 두들기며 수많은 소리들이 공간을 채우도록 만들었다. 만약 아이들이 이 골판지 상자 구조물로 들어온다면 어떤 반응을 할까.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 어떤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이 공간을 토끼 같은 눈과 쫑긋한 귀로 느끼게 될 것이다.
잇거나 뚫거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예브게니 쿠드랴체프(Evgeny Kudryavtsev)의 별명은 ‘골판지 아빠'(Cardboard Dad)다. 어린 소녀의 아빠이기도 한 그는 단지 골판지 상자를 잇거나 뚫는 방법으로 3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골판지 마을을 만들어냈다. 이 골판지 마을엔 미로와 장애물, 숨을 곳이 있다. 아이들은 그곳으로 숨어들거나 주변에 준비된 물감으로 골판지 마을에서 마음껏 색칠놀이를 즐길 수 있다.
예브게니 쿠드랴체프가 골판지 상자를 잇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스테이플러(일명 호치키스)를 찍어서 잇거나 송곳으로 구멍을 뚫은 후 케이블 타이로 묶는다. 만약 두 개의 상자를 맞댈 때는 폭이 넓은 전용 클립을 사용한다. 그는 대략 폭 1미터, 길이 2미터 정도의 골판지 원판이나 비슷한 크기의 골판지 상자를 사용한다. 가전제품 상가에서 나온 냉장고 포장 상자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가능하면 크기가 같아야 미로를 만들기 편리하다. 이렇게 이어 붙인 골판지 상자를 칼로 잘라 미로의 통로를 만들거나, 불쑥 불쑥 두더지처럼 아이들이 목을 내밀 수 있는 구멍을 위 아래로 뚫거나 창이나 문을 만든다. 이렇게 크고 작은 창과 원형 구멍을 측면과 위로 뚫어두면 상자 안을 밝게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이 폐쇄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미로 속에서 가끔 아이들은 이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부모가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구멍을 뚫은 절단면은 날카롭기 때문에 접착테이프를 붙여 안전조치를 취한다. 그의 블로그에서는 골판지로 아이들과 놀고 싶은 이들이라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다양하고 놀라운 ‘골판지 아빠’의 작업과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접거나 꺾거나
호주 멜버른에 있는 아트플레이(ArtPlay)는 유아부터 12세 어린이들이 자신의 창의성을 탐구하고 예술가와 함께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아동예술지원센터이다. 매년 300개 이상의 워크숍, 공연 등을 여는 아트플레이는 2012년 멜버른 모나쉬대학교(Monash University) 건축학부에 입학한 신입생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창조적인 탐사공간을 골판지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몇 그룹으로 나뉘어 7개 놀이 공간을 설계·제작했고, 극성스런 아이들이 충분히 놀 수 있도록 5주 동안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거나 관리했다. 첫해에 주로 기초 건축 소재와 가구에 대해 공부하게 되는 건축학과 신입생들에게 이 작업은 좋은 기회였다. 골판지 구조는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지만 아이들이 끊임없이 가하는 충격을 견딜 수 없다. 골판지로 만든 놀이 공간 속에서 8세 이하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 놀 수 있을 정도로 건축 구조는 강하고 안전해야 한다. 어떻게 내구성 문제를 해결했을까.
학생들은 가능하면 골판지에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착탈식으로 만들어냈다. 안전한 골판지 건축을 위해 건축과 학생들은 ‘쌓기(Stack)’, ‘결구(Interlock)’, ‘접기(Fold)’, ‘틀(Frame)’과 같은 구조 개념과 기법을 사용한다. 골판지 판재를 여러 겹 쌓아 붙이면 생각보다 압축과 휘어짐(Shear)에 강한 부재를 만들 수 있다. 또한 가구나 건축에서 사용하는 괘맞춤과 장부맞춤 기법을 응용하면 여러 겹을 붙여 만든 골판지 부재를 목재처럼 사용할 수 있다. 골판지를 접어서 폭이 좁고 긴 상자나 삼각형 틀을 만들면 마치 목재 기둥이나 안전한 구조재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골판지로 만든 부재를 경량목구조나 가구제작에서 사용되는 공법을 응용해서 비교적 안전한 놀이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모나쉬대학교 학생들은 골판지 부재를 만들 때 주로 케이블 타이나 플라스틱 리벳을 사용했다. 골판지 상자를 잇거나 통로로 만들고 접착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참고할 만한 홈페이지도 있다.
앞서 소개한 사례들이 이미 완성된 골판지 놀이 공간을 제공한다면 200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진행된 예술 프로젝트 ‘RUS’는 골판지를 이용한 행위를 제안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쓰레기를 이용한 디자인, 캠페인 등을 펼치는 건축가 그룹 바수라마(Basurama)가 진행한 프로젝트로,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은 쓰레기장에서 골판지 상자를 주워 모아 삼각형의 좁고 긴 부재를 만들었다. 부재 중간중간 한 면만 남기고 잘라 꺾을 수 있는 관절을 만들었다. 꺾을 수 있는 골판지 삼각 부재로 아이들과 사람들은 다양한 장애물이나 형상, 구조물을 만들 수 있었다.
골판지를 이용해서 놀이 공간을 만드는 몇 가지 사례와 방법을 소개했다. 만약 경량목구조나 가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값싸고 가볍고 안전한 놀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탐색하는 아이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김성원
- 적정기술, 기술놀이교육 연구가.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매니저이자 (사)한국흙건축연구회 기술이사, (주)숲과도시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이웃과 함께 짓는 흙부대집』(들녘, 2009),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소나무, 2011), 『화목난로의 시대』(소나무, 2014), 『근질거리는 나의 손』(소나무, 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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