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이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사회문화예술교육은 평생교육처럼 국민 누구나 경험할 수 있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사회를 좀 더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데 그 목표가 있다고 본다. 최근 도시재생과 마을 만들기, 공동체 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지역단위의 사회문화예술교육 중에는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업들이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효과를 발휘했는가를 질문해보았을 때, 만족스러운 답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지역의 문제를 풀어 가는데 참고할 만한 사례로 문화예술교육의 힘을 그 바탕으로 삼은 일본 코코룸의 활동을 소개한다.
지역에 새겨진 고도성장의 명멸
일본 긴키지방(近畿地方)에 있는 오사카시(大阪市)는 서일본의 행정,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로 한국의 부산과 같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문화의 중심이 되는 교토,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는 아스카(飛鳥)와 나라(奈良), 한신대지진으로 유명한 고베(神戶)와 인접해 있어 연간 수십만 명의 한국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문화와 관광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오사카시(大阪市)의 니시나리구(西成区)에는 ‘아이린지구(あいりん地区)’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이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아 일본사람들도 낮에조차 드나들기를 꺼리는 곳으로, 반경 300미터 지역에 주민 3만 명 중 5천여 명이 노숙자라고 추측하고 있다.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추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소부정의 일용노동자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인 1970년대 이곳에는 간사이 최대의 인력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예전엔 기능공을 구하는 건설사 관계자의 수요보다 인력의 공급이 모자라 서로 웃돈을 주고 일꾼을 데려가는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고, 인력시장 주변으로 일용노동자를 위한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이 즐비하여 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버블 붕괴 이후 건설경기의 악화와 급격한 수요 감소로 일용노동자들이 일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지방에서 일을 찾아 오사카로 온 사람들은 저렴한 숙소인 ‘도야(ドヤ)’를 전전하다 결국은 노숙자로 전락했다. 게다가 오사카시에서 시행한 파격적인 지역 복지 정책은 일본 전국의 노숙자를 이곳으로 모이게 했다. 아이린지구에는 주민등록이 없는 노숙자, 일용노동자들에게 주민등록을 대행하고 시(市)로부터 생활보호지원을 받게 하여 자신들이 운영하는 숙소(형식은 임대아파트, 사실은 도야)에 입주 시키고 진료를 받게 하는 등 사회서비스의 제공을 사업화한 비영리단체와 사업자, 진료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자체의 지원금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하면서 집세와 식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파친코, 경마, 경정, 경륜 그리고 술과 마약으로 허비하고 있다. 일본의 숨겨진 속살이자 고도성장의 명멸을 함께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린지구의 옛 이름이 ‘가마가사키(釜ケ崎)’다.
민간단체가 이끌어낸 공공성
2002년 오사카시는 지상 8층, 점포면적 57,000㎡의 빌딩 내부를 롤러코스터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신세카이 아츠파크(新世界 Arts Park)사업을 시행하며, 빈 점포를 활용한 현대예술 거점으로 형성하고자 세 개의 비영리민간단체(NPO, Non-Profit Organization)를 유치했다. 그중 한 단체가 코코룸(Cocoroom)이다. 임대료와 수도 및 광열비는 관(官)에서, 사업비와 인건비는 참여단체가 자력으로 부담하는 독특한 시스템이 일본 최초로 도입된, 활동의 자율성이 높은 관민협동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2008년 건물의 매각과 동시에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후 코코룸은 근처의 쇠락한 상점가에 공간을 마련하고 지금까지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예술의 공공성’을 고민하며 지역문화예술교육을 지속해 나가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 ‘가마가사키예술대학(釜ケ崎芸術大学)’이다.
예술을 기반으로 한 코코룸의 지역 활동은 대표인 우에다 카나요의 전공인 문학, 특히 시(詩)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지역주민들의 삶을 미시사(micro history)의 중요성과 연결하여 구술, 채록을 통해 시(詩)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초 계획했던 ‘시’라는 장르를 넘어 무용, 연극 등의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코코룸에서 활동하던 자원봉사자와 활동가(대부분 예술가)는 물론 일본 전역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고무된 코코룸은 2011년 드디어 문화예술교육을 목적으로 가마가사키예술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과목은 시 창작을 필두로 영화, 연극 등 다양한데, 입학금이나 등록금이 없으며 당연히 정규대학도 아니다. 수강생의 대부분이 지역주민으로 그중에는 상당수 노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가마가사키예술대학은 지역의 문화예술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고, 주민들은 이 대학을 통해 자아의 인식과 잠재력의 발현을 경험함과 동시에 지역과 공동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노숙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잡지 [빅이슈]와 재활용품 판매 등을 통해 자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고, 일부 주민은 코코룸의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마가사키예술대학의 특별한 프로그램으로는 일본 전통연극 중 하나인 ‘교겐(狂言)’을 노숙자들이 만들고 공연하는 것이 있다. 교겐은 일본 전통연극 ‘노(能)’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코미디로 해학적인 내용이 특징이다. 교겐의 해학성을 노숙자들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공연하는 과정을 통해 노숙자들의 자아성찰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점점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를 재조명한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현재 가마가사키예술대학은 대학원 과정도 개설하여 그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것은 한 지역(그것도 위험지대로 악명이 높은 곳)에서 십여 년을 문화예술교육 활동으로 일관한 코코룸의 저력과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호응이 일구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코코룸은 빈 상가를 소유한 지역주민이 무상임대해준 4층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하여 지난 4월부터 게스트하우스와 카페, 교육공간과 도서관, 생태텃밭을 갖춘 새로운 공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도 지역주민은 물론 일본 전역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의 힘이 컸다. 하나의 공간을 장소로 만들어 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한 문화예술교육을 말해주는 현장이자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2014 가마가사키예술대학 성과발표회 중 시 낭독과 전시
지역과 사람을 잇다
코코룸은 가마가사키 지역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지역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청년들의 활동과도 함께하고 있다. 상점가에서 시장 갤러리를 운영하는 샤미센 연주가, 자신의 작품에는 반드시 가마가사키가 등장하는 래퍼, 자신이 태어난 집을 개조하여 카레집을 열고 밴드활동에 심취해 있는 젊은 사장 등과 함께 매년 여름 일본 전역이 마츠리(祭り, 축제)로 들썩일 때 노숙자들이 주관하는 ‘삼각공원(평소 노숙자들이 폐지, 비닐 등으로 만든 천막에 점령당한 공원)축제’를 지원한다. 그리고 그 지역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무심히 던지는 ‘우범지대’ ‘몹쓸 곳’ ‘잊혀진 동네’라는 오명을 벗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대한민국도 이미 산업화의 쇠퇴와 인구감소로 인한 원도심 공동화, 슬럼화의 시대에 돌입했다. 최근 문화예술교육계에서 ‘지역’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유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행정과 전문가,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거버넌스가 요구되는 상황이지만 장소성에 대한 사전 준비와 주민들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 또는 한시적으로 진행되는 사업들, 그것에 동원되는 예술가들, 그리고 사업의 종료와 함께 목표도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이러한 경험을 해본 코코룸의 활동 사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코코룸의 지속적인 ‘선전’과 ‘분투’를 기원한다.
- 관련링크(사진 출처)
- 김종현
- 68년 서울생. 인천에서 지역 기반 문화예술 활동을 목표로 하는 연극집단 삶은연극 대표로 일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인하대학교 문화예술교육원에 출강하고 있다.
asames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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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빅이슈 저팬을 방문한 길에 가마가사키에 들렀던 기억이 나네요.
함부로 카메라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을만큼 얼어있었는데^^;
코코룸의 사례는 좀 더 들여다봐도 좋겠다 싶습니다. 기억할 만한 활동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앗 안태호 선생님, 안녕하세요! 댓글로 다시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때때로 지역과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문화예술의 힘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나 코코룸처럼 민간으로부터 시작된 활동은 더욱 그렇지요. 이러한 사례들을 함께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사례소개 감사합니다.
인천에서도 멋진 일들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문경숙 선생님, 안녕하세요. 인천에서도 민간으로부터 시작된 문화예술 거점공간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작은 움직임들이 서로 연결되다 보면 조만간 멋진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일방적 또는 한시적으로 집행되는 사업들, 그것에 동원되는 예술가들, 그리고 사업의 종료와 함께 목표도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실’
…공감합니다.
사업이 종료된 2008년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강한 자생력으로 단체의 목표와 취지를 실현해가고있는 코코룸. 그 자생력의 원천이, 지역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으로 모인 팀원들을 결속하게 하는 힘의 원동이 궁금해집니다.
조심스레 2부를 기대해봐도 될까요?^^
이효진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문득 지역 내에서 꾸준히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해지네요.
기회가 된다면 지역 문화예술의 원동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밀착취재(!)를 해볼게요. 좋은 제안 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