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원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내게는 ‘결여된’ 무엇을 욕망한다. 내게 없는 모든 것은 욕망의 대상일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가치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가. 가치는 내가 부여한 가치인가 아니면 대상이 지닌 가치인가. 전자라면 가치 판별 능력은 천부적 재능인가, 후천적 학습에서 비롯되는가. 후자라면 가치는 대상의 외양에 있는가, 대상 그 자체에 있는가. 질문을 더할수록 욕망에 관한 일반적 정의는 불충분하거나 서로 모순된다. 추론이 문제인가 아니면 전제가 문제인가.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워한다. 기계에서 재생되는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이물감을 느껴서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나인데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혹시 기록 과정에서 불순한 무엇이 끼어들었던 것 아닐까. 듣는 내게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 아닐까. 기괴한 목소리는 이내 사라지지만 불쾌한 감정은 오래 남는다. 어디서 오류가 발생한 건가. 자명한 감각의 뒤틀림에 관한 궁금증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일상 속 익숙한 나의 목소리에 어떤 환상이 슬그머니 들러붙어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다.
- <블랙스완(Black Swan)>
이미지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058
예술작품을 대할 때의 난관도 다르지 않다. 이 장면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 오브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욕망했느냐는 질문에 창작자가 회피하지 않고 답한다 해도 꼭 들어맞지 않는다. 창작자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설명하면서 앞서 언급한 이물감 혹은 불쾌함을 느낄지 모른다. 왜? 욕망은 타자 없이 작동하지 않아서다. 우디 앨런의 <브로드웨이를 쏴라(Bullets Over Broadway)>(1996)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2014) 등 예술가의 자의식을 다룬 영화들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만 자아의 환상이 이를 은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블랙 스완(Black Swan)>(2010)이 폭로하는 것도 환상의 베일 뒤 검은 욕망의 실체다.
뉴욕시티발레단 소속의 무용수 니나(내털리 포트먼)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집과 연습실만을 오가는 그녀는 젊은 시절 발레 무용수였던 엄마(바바라 허시)의 과도한 관심을 당연한 애정으로 여긴다. 수석무용수 베쓰(위노나 라이더)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발레단은 새 주역무용수 오디션을 치르는데, 니나는 <백조의 호수> 오디션에서 탈락하지만 예술감독 토마스(뱅상 카셀)의 눈에 들어 오데트/오딜 역할을 따낸다. 그러나 토마스는 리허설 기간 내내 니나의 흑조 연기가 형편없다고 질책하고, 니나는 신입단원 릴리(밀라 쿠니스)에게 이끌리는 토마스의 마음을 붙잡아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니나는 무엇 때문에 고통 받는가. 떠맡은 배역에 대한 부담인가, 주역을 뺏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인가. 프로이트는 딸기 케이크를 먹는 꿈을 꾼 아이의 욕망은 ‘나는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다’가 아니라 딸기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보이지 않는) 부모의 시선에 가닿아 있다고 말한다. 타자로부터 가상의 응시를 기대하는 욕망은 조건이 갖춰지면 충족되는 생물학적 욕구와 태생적으로 다른 구조를 지녔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니나가 던지는 말은 “나는 무엇을 원한다”라는 욕구의 외침이 아니라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욕망의 질문이다.
- <블랙스완(Black Swan)>
이미지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058
<블랙 스완>을 연출한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니나는 덫에 걸린 인물이며, 엄마와 토마스는 이들을 감시하는 간수”라고 비유한 적 있다. 니나가 자신을 애 취급하는 엄마와 자신에게 은밀한 제안을 던지는 토마스에게 이중 구속되어 있다는 설명이지만 여기서 이 둘 모두 간수에 불과함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들이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욕망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거대한 타자일 것이라는 믿음은 다름 아니라 니나의 환상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그들 앞에서 가면을 번갈아 바꿔 쓰며 자신의 가치를 되묻지만, 현실의 타자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대답할 수 없다.
설령 타자의 대답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부정되고 부인된다. 공연을 앞둔 니나가 “주역이 아니어도 좋다”는 엄마의 다독임과 “너는 나의 작은 공주님”이라는 토마스의 속삭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라. 지금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타자의 위안은 그녀 자신의 욕망을 멈춰 세울 것이기에 그녀는 이를 한사코 거부한다. 그녀가 끝없이 되물음으로써 타자를 침묵하게 만들고, 타자의 침묵을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처벌을 가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환청과 무시무시한 환각이 바로 그 처벌의 기제다.
<블랙 스완>에서 욕망은 금지이고, 금지는 욕망이다. 욕망과 금지는 서로를 배척하는 대립항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보충물이다. 토마스에게 다가갈수록 니나는 감당할 수 없는 환청에 시달린다. “유혹에 넘어가선 절대로 안 된다. 그러다가 내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경고에 부딪치는 것이다. 반면 엄마에게 기댈수록 니나는 무시무시한 환각에 빠져든다. 이번에는 “마음껏 즐기지 않으면 너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토마스의 힐난에 사로잡힌다. 한데 들러붙은 불만족과 죄의식, 그래서 “타자를 위한 욕망, 타자가 원하는 욕망, 타자가 원하는 것을 위한 욕망”의 사다리는 언제나 불안하게 삐걱거린다.
그렇다면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완벽함을 느꼈어요!” 공연을 끝낸 니나가 피 흘리며 남긴 중얼거림은 현실의 만족인가, 초월의 도취인가, 죽음의 의지인가. 니나의 선택에 대해 다른 식으로 접근해보자. 욕망의 범람을 막기 위해 사회적 금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개인은 더욱 더 욕망해야 한다고 맞서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는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비꼬는 ‘향락적 금욕주의’로 귀결되지 않는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말이다. ‘건강한 자아’ 혹은 ‘건전한 문화’도 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선언은 “나는 욕망한다”에서 “나는 욕망의 비일관성을 수용한다”로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 참고문헌
- 『꿈의 해석』, 지그문트 프로이트, 열린책들, 2004년
-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 이영진 _ 영화평론가
- 오랫동안 잡지를 만들었다. 지금은 영화와 글쓰기가 삶의 전부인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려고 궁리중이다.
zizek7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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