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가장 즐겨 놀던 놀이기구는 정글짐이었다. 정글짐은 나무나 철봉을 종횡으로 연결해서 만든 상자 사다리다. 나는 정글짐 위로 오르고, 뛰어 내리고, 회전하고, 건너뛰고, 통과하고 걸터앉으며 놀았다. 정글짐은 나의 상상 속에서 밀림이 되고, 높은 마천루가 되고, 전쟁터가 되거나 동굴이 되었다. 성공적인 놀이터와 시설은 언제나 아이들의 상상 속 공간과 중첩된다. 아이들은 놀이 공간과 주어진 놀이 기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새롭게 발견하고 창조한다. 과거 학교 운동장을 제외하고 변변한 놀이기구를 찾을 수 없던 시절 아이들은 오징어 가이상, 장석 치기, 땅따먹기와 같은 놀이를 즐겼다. 단지 땅 위에 활석으로 선을 긋고 다양한 놀이의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폭설이 내린 다음 골목 한켠으로 치워놓은 눈덩이를 파고 들어가 에스키모 흉내를 내며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디 그 뿐일까. 의자 4개위에 이불을 덮고 형제들과 들어가 도무지 알 수 없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던 추억, 박스를 쌓아 만든 중세의 성… 아이들은 숲 속에서 움막을 짓던 인류의 ‘건축 본능’을 자신들도 모르게 놀이로 재현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가진 ‘공간을 만드는 능력’, 아니 정확히 말해 ‘공간을 상상하는 능력’에 주목한다. 그러기에 아주 어설픈 공간이라도 상상이 개입할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그곳은 놀이터로 발견되고 창조 된다.
서로 엮이고 지지하며
스타돔(Star dome)은 일본 기타큐슈(Kitakyushu) 대학의 다이스케 타케카와(Daisuke Takekawa) 교수가 개발한 가장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돔 구조이다. 대나무, PVC 파이프, 활대 등 탄성 있는 긴 막대로 1시간 만에 만들 수 있다. 아이들과 대나무로 크고 작은 스타돔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스타돔을 만들며 약한 부재가 서로 엮이면 강한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걸 배우고 경험하게 된다. 아이들은 돔이 크건 작건 그 안과 밖을 오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곤 한다. 돔 구조가 만드는 공간 감각을 아이들은 즐기게 된다.
상호지지구조(Reciprocal Frame)는 기둥이나 장선 없이 부재들이 서로 엮이며 지지하면서 만들어지는 구조다. 러시아를 비롯해 유럽에서 상호지지구조 게임은 건축교육과 놀이를 결합하는 좋은 방법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관(종이 관)이나, 대나무, 각재, 빨대, 연필 등 다양한 크고 작은 부재를 연령에 맞춰 사용할 수 있다. 상호지지구조 만들기는 구조 감각, 건축 감각을 갖게 한다. 아이들에게 몇 가지 기본 상호지지구조 유형을 알려주면 같은 구조를 무한대로 확장하며 놀게 된다. 이렇게 놀이는 배움이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게 된다. 그 공간은 다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하버드대 도널드 인버그 교수는 생명체는 인장력과 압축력이 구조 전체에 균형 분배되어 자기조립하는 안정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1960년대 벅 민스터퓰러는 tension(인장력) + integrity(통합)이란 단어를 조합하여 텐세그리티(tensegrity, 인장통합구조)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인장통합구조는 인장력과 압축력이 구조 전체에 균형 분배되어 자기 조립하는 안정적 구조다. 현대 유선형 건축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다. 이 구조는 주로 봉과 같은 단단한 부재와 힘줄로 구성되는 데 각각의 부재는 서로 직접 접합되지 않고 줄에 의한 인장력과 압축력을 균형 있게 분배하여 구조를 이룬다. 인장압축구조(tensegrity)는 현대 건축에 응용되거나 경관 조경물, 놀이 시설, 놀이 기구, 가구 제작에도 적용된다. 상호지지구조와 같이 짧은 막대, 철봉, 연필, 빨대 등 다양한 부재와 고무줄, 끈 등 인장력을 더할 수 있는 재료를 가지고 크거나 작은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은 부동압력구조 만들거나 그 구조로 만들어진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거나 놀이 시설 내부에서 감각적으로 구조, 건축, 인장력, 압축력, 균형 등을 익힐 수 있다.
아치(Arch)는 건축(Architecture)의 오래된 어원이 될 정도로 건축의 기본 구조다. 아치를 벽돌, 나무벽돌, 종이 상자를 이용해서 쌓아보면서 하중의 분산과 지지, 기하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만든 아치를 통과하며 새로운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아이들은 노동과 협동, 사회를 실재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아치를 만드는 놀이는 건축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아이들로부터 이끌어낸다.
흔들리는 예민한 공간
줄, 실, 밧줄, 도르래, 몇 가지 매듭 기술만 있다면 아이들과 그물망(Net playgorund) 모험 놀이터를 만들 수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수많은 넝쿨로 미로 같은 정글 숲 속을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숲속에서 놀았던 인류의 놀이 본능. 숲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은 숲을 모사하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앞에서 소개했던 정글짐은 밧줄과 그물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놀이시설들은 로프 스페이스넷(rope spacenet) 또는 로프 타워(rope tower)라 불리기도 한다. 언젠가 밧줄만으로도 학교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벌써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다. 벌써 그렇게 멋진 밧줄 놀이터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흔들리고, 출렁이고, 아찔하고, 쫄깃한 느낌… 옛날 정글짐에서 놀던 느낌이 살아난다.
그물망 놀이터를 ‘떠 있는 전경(Floating Landscape)’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이 있다. 공간예술 그룹인 누멘(NUMEN)이 그들이다. Sven Jonke(독일), Christoph Katzler(오스트리아), Nikola Radeljković(크로아티아) 3인의 협력 작업을 통해 공중에 새로운 풍경과 공간적 경험과 놀이를 제안했다. 이들은 주로 줄(string), 그물(net), 그물관(tube), 비닐 랩(tape) 등을 이용하여 건물과 건물 사이, 건물 내의 빈 공간에 떠 있는 풍경과 놀이공간을 만든다. 그물망 놀이터를 만드는 과정은 놀이가 되고 완성된 그물망 놀이터는 또한 놀이공간이 된다. 환경예술가 아테페 카(Atefeh Khas)의 작품은 줄을 이용한 또 다른 공간과 놀이를 제안한다. 어떤 공간을 거미줄처럼 분할하거나 가로 막고 연결하면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하게 공간을 느낄 수 있다. 예민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동작을 주목하게 되고 빛과 보이지 않았던 좌표와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보자.
만들어가는 흙건축 놀이 배움터
건축과 예술, 놀이가 결합된 흙건축 놀이 배움터는 건축 중심의 활동을 넘어서 흙을 이용한 예술교육, 도예, 조소와 벽화, 건축 과정을 버무려 놀이와 협동의 계기로 만든다. 이 놀이 공간은 미리 전문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건축 과정 또는 놀이에 참여하며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참여적이며, 동적이며 가변적으로 구성되어가는 놀이터이다. 이러한 구상을 독일의 렘바우 미트 킨더른(Lehmbau mit kindern) 프로젝트는 이미 현실로 만들어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흙건축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베를린 교육예술 프로젝트로 개발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90년부터 인터글로츠 아트네트워크(Interglotz artnetwork)에 의해 10곳에서 1만 명의 아이들이 참여했다. 독일 이외에도 이탈리아, 스웨덴, 영국 등 20개 지역에서 흙건축 놀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공원은 마쿠나이마 브릿츠 공원 흙마을(Makunaima, BRITZ Lehmdorf)이다. 이곳은 베를린에서 아이들이 일 년 내내 찾는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의 하나다.
건축본능은 삶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는 『건축가 없는 건축』에서 인류가 지은 건물 중에 건축가가 지은 건물은 5%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지구에 살아왔던 대다수 사람들은 직업 건축가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지었다. 수 만년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살 집을 가족들과 함께, 때로는 이웃들과 함께 집을 지었다. 근대 이전 평민들은 건축가의 멋진 설계보다 지역 기후와 조건 아래 오랜 시간 검증된 토착 건축양식에 따라 지었다. DNA가 인류의 반복된 오랜 경험과 기억의 생물학적 기록이라면 건축의 경험은 분명 우리의 DNA에 유전적 정보로 남아 본능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거나 꾸미고 싶은 욕망, 처음 집을 짓는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건축 감각들, 허술한 그 어떤 재료로도 공간을 상상하고 창조하는 아이들의 놀이. 이것을 ‘건축 본능’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고 나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무한한 자부심과 안정감, 삶의 확신은 또한 인류의 오래된 건축 경험에서 나온 직감일 것이다.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놀이란 바로 자신의 맥락을 갖는 장소를 만드는 본능적 행위이자 삶의 능력을 증명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이 상상한 공간을 자신의 손으로 짓고 그곳에 들어가 놀고 싶어 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삶을 준비한다.
- 김성원_적정기술, 기술놀이교육 연구가
-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매니저이자 (사)한국흙건축연구회 기술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이웃과 함께 짓는 흙부대집』(들녘, 2009), 『점화본능을 일깨우는 화덕의 귀환』(소나무, 2011), 『화목난로의 시대』(소나무, 2014). 『근질거리는 나의 손』(소나무, 2015) 등이 있다.
-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http://cafe.naver.com/earthbag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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