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문화원을 아시는가?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약대동 오거리에 있는 담쟁이문화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창조적 공유 공간이다. 수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담쟁이문화원을 설립한 한효석 원장과 함께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담쟁이문화원이 부천을 대표하는 창조적 공유 공간의 아지트가 된 이유는 공간을 지역 사회에 개방했기 때문이다. 담쟁이문화원이 입주한 4층짜리 건물은 한효석 원장의 개인 소유 건물이다. 그러나 한 원장은 자신의 소유 공간을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에 개방해 지금껏 운영해오고 있다. ‘누군가의’ 소유 공간이었던 곳이 ‘누구나의’ 열린 공간이 된 것이다.
이 지면에서 담쟁이문화원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한 사람의 선행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 이야기되고 있는 시절에, 부천 담쟁이문화원 이야기는 소유자사회(ownnership society)를 넘어 지역의 회복력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어떤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유(共有)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법하다. 그리고 공유인(commoner) 되기의 상상력과 실천이야말로 소유자사회를 넘어 우리 사는 지역의 회복력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당신이 사는 지역은 회복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죽어버린 사회에서 어느 누가 지역의 회복력을 자신할 수 있을까. 작고한 철학자 M.푸코가 1975~1976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에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환원주의자의 과학도 아니고, 결정주의자의 경제학도 아니다. 공유인 되기의 상상력과 실천이 요구된다. 그런 공유인 이야말로 영원한 성장이라는 우리 시대의 주술을 넘어 ‘탈성장 시대’의 문화적 문법을 준비하며 지역 공동체와 상호부조의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회복의 경제학과 행복의 경제학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원래 공유인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중세 봉건 시대 영국에서 서민과 평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공유인이라는 말을 주체적이고 높은 지성을 갖춘 존재로 전유하고자 한 논자는 미국의 공유경제학자 데이비드 볼리어였다. 데이비드 볼리어의 『공유인으로 사고하라』(원제 Think like a Commoner)는 잊혀진 공유재(commons)의 역사를 추적하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협력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는 책이다. 공유인에 대한 데이비드 볼리어의 정의는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전제에서 비롯한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적 인간관과는 전혀 딴판이다. “토지, 노동, 화폐는 상품이 될 수 없다”고 한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주장이 근대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상품화’ 경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온 역사를 생각해보라.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어느 논자가 “시장경제를 가진 사회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를 이룬 시대”(마이클 샌델)로 변질된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시장사회는 시장과 시장가치가 원래 속하지 않았던 삶의 영역으로 팽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유인 되기를 역설하는 데이비드 볼리어의 주장은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라는 역작에 빚진 바 크다. 중세 시대의 돌담과 울타리 대신, “현대판 인클로저는 국제통상조약, 재산법, 느슨한 규제, 기업의 자산 매입을 통해 달성된다”는 데이비드 볼리어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질적/비물질적 대상으로서 공유재를 보존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을 때 지역의 회복력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볼리어의 공유철학은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쓴 『투게더』와 함께 읽으면 지역에서 공유인 되기를 실험하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힘에 맞서는 진짜 힘은 ‘협력의 의례’ 내지는 ‘의례적 연대’에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세넷의 주장과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세넷이 역설하는 협력의 모델은 일종의 공동 작업장 모델이다.
요즘 나는 ‘지역은 당신의 캔버스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갖은 형태의 예술(교육) 현장들을 볼 때마다 지역을 ‘캔버스’로 여기는 경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지역을 캔버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화가가 캔버스에 마음대로 붓질을 하면 마치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어떤 ‘그림(청사진)’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것은 애초 문화예술교육자들이 원한 그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의 지원사업의 구조가 지역에 대한 그런 위계화된 시선을 내면화하도록 재촉한 측면이 없지 않다. 문제는 지역 회복력이란 하루아침에 복원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부천 담쟁이문화원처럼 다양한 문화적 공유지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실험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데이비드 볼리어와 리처드 세넷의 책은 결국 나를 바꾸는 것과 지역을 바꾸는 것은 결코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그것이 바로 ‘공유인 되기’의 진짜 의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데이비드 볼리어가 책에서 말하는 “초국가적 공유인의 공화국”의 시민으로 살고 싶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책을 덮고 난 뒤 나의 고민은 더 깊어진다.
이미지 제공 _ 갈무리, 현암사
- 고영직 _ 문학평론가
- 문화예술교육 웹진 [지지봄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겨레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gohy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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