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를 넘어 ‘삼포 세대’라는 말이 나오고, TV 시사프로그램에서는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젊음이 가진 열정과 패기로 무장한 청년이 우리의 내일이고 미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경험과 기회의 장을 제공하고자 했던 ‘청년기획자 발굴 프로젝트 – 청년, 꽃길을 달리다’에서는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멘토와 청년이 만나 서로 교류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청년기획자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자리매김해야 할까? 6월의 첫날 해질 무렵, 동대문옥상낙원(이하 DRP)에서 만난 박찬국 작가(‘청년, 꽃길을 달리다’ 멘토)는 청년 스스로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아픔과 증세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미술 1세대, 문화예술교육 1세대라고 알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문화예술교육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을 것 같다. 문화예술교육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
재미있는 일 많았다. 그런데 [아르떼365] 인터뷰이다 보니, 교육으로 수렴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웃음)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처음부터 교육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은 아니다. 예술의 공공성, 공공적 장소에서의 예술을 고민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최근 조정환 선생이 쓴 『예술인간의 탄생』이라는 책을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했던 ‘논아트 밭아트(nonArt butArt)’도 예술이기도 하고 예술이 아니기도 하고, 교육일 수도 아닐 수도 있고, 학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경계에 서서, 드나들려고 하는 관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술을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관점에서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라는 존재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작가의 활동 자체가 오브제(물질)화 되지 않는 방식-삶의 방식으로서의 예술을 고민하다보니 교육에 관심이 많아졌다. 교육을 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미술관을 벗어나서 하는 작업으로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에 대해 프로젝트 기획자이자 프로젝트를 하나의 작품으로 기획해 온 예술가라고 소개하는 글을 보았다. 문화예술교육을 하다 보면 간혹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던 차에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굉장히 치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획자들은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기획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웃음) 작품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작가라는 입장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비평과 창조의 지점을 놓치지 않고 계속 전위적으로 예민하게 (사회와) 만나려는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니까 서비스(봉사)나 솔루션(해법)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쟁점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프로젝트 안에서 쟁점을 다루려고 해야 한다. 갈등을 피하지 않아야 하고, 더 나아가 갈등을 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 커뮤니티 아트에서는 갈등을 만들면 안 되고, 서비스(봉사)하고 데코(장식)해야 한다는 오해가 있다.
어디서나 비슷하게 일어나는 동시대의 욕구나 갈등, 문제를 포착해야 한다. 커뮤니티 아트는 질문이 질문으로 끝나지 않는 자기 액션이 필요하다. 그것이 교육일 수도 있고, 오브제일 수도 있고, 퍼포먼스일 수도 있고, 마켓(시장)일 수도 있다. 작업이라는 의식이 있다면, 작업 자체로 물질화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그 작업이 가진 근본적인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적 질문은 훨씬 근본적이어야 한다.
그간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 예를 들면 폐교(밀머리 미술학교), 개발이 취소된 빈터(논아트 밭아트), 상가옥상(동대문옥상낙원) 같은 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주민들과 교류하고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늘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작업을 지속하려면 힘들진 않나?
비어있거나 기피된 곳, 유동적이고 흔들리는 곳에 흥미가 있다. 그런 곳일수록 작가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사실 내가 인간관계나 사회성은 꽝이다.(웃음) 그런데 목표중심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주어진 목표에 맞춰서 뭘 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잘 안하는 이유다. 그런데 거의 모든 프로젝트가 사람을 대상화한다.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목표를 두고 사람들을 다 매몰되게 하거나 활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단 그냥 해보는 거다. 그러다가 뭔가 되면, 그때 한다. 물론 처음부터 큰 방향이나 지향은 있어야 한다.
그렇게 10년 넘게 작업을 지속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래서 하다 만 게 많다.(웃음) 누구나 목표를 빨리 이루고 싶고, 좋은 것을 하고 싶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나도 그렇고. 그런데 목표치를 두고 하지 않더라도, 재밌고, 옳고, 의미 있는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다 즐거워한다. 그러면 생각보다 (목표가) 훨씬 빨리 이뤄진다.
DRP 시작할 때 내가 말도 안 되는 뻥을 친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깜짝 놀란다. 실제로 많은 게 되어 있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거다. 그러면 자기도 뭔가 한마디 거들고 싶어 한다. 이제는 동기들이 발생했고 의미가 되니까, 목표중심적으로 해도 괜찮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강요하면, 원래 하고자 했던 의미가 뭔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원래 목표대로 잘 되지도 않고, 되다 말고 그러지 않나?(웃음)
현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탄력성에 있다고 본다. 내가 지향이 있고 계속해서 비평적으로 질문하고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떤 상황이 와도 그 안에서 다른 해석과 발견, 심지어 발명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예술가가 아닌가 한다.
의미나 목표에 집착하지 않되 그것을 잊지는 말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렇다. 그것은 자기 철학이나 세계관이니까.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는데 너무 훈련되어 있다. 근대(近代)가 그렇다. 뭔가 되기 위해서 한다. 그냥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뭔가 되기 위해서 읽으라는 것이 너무 만연해 있다. 그런 전략이 전혀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게 재밌으니까 하는 거다. 그게 인간의 호기심이다. 너무 목적의식적으로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최소한을 투여해서 최대한의 효과를 보려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부딪히는 ‘멘붕’ 현상의 핵심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반드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훌륭해지지도 않고, 더구나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스펙은 엄청 화려하지만. 그게 과연 어떤 의미인가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
이번에 ‘청년, 꽃길을 달리다’ 프로그램 멘토로서 기획자의 마인드, 철학, 방향에 대해 강조하여 청년기획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셨다고 들었다. 또한 서울시청년일자리허브 청년학교 교장이기도 하다. 청년들과 많은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일단 청년들과 말이 통한다. 속으로는 어떤지 모르지만.(웃음) 청년들이 아직 유연하고 탄력성이 있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 아직 정해진 게 없으니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움직이고 얘기할 여지가 많다. 일종의 생기, 생동감은 그런 탄력성에서 나온다.
요즘 청년들 어떤가?(웃음)
굉장히 똘똘하고 좋다. 내가 너무 좋은 청년들만 만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너무 영리해서 그런지 몰라도 기성세대, 기성체제의 의중을 꿰뚫고 맞추려고 한다. 사실 맞춰주는 거지. 그런 것에 너무 빨리 익숙해진 것이 기획할 때 나타난다. 그래서 “하던 대로 해라. 그런데 하던 대로 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요즘 청년들은 다 자율적이고, 뭔가 하고 싶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냥 개인주의는 아니다. 자기 고집이나 자기 욕심만 차리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지 개인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나. 자기 디테일, 취향,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잘 살려야 한다. 그러면서 얘기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지점이 드러나야 하는데, 세상이 그들을 어렵게 하니까.(웃음) 기성세대들이 청년에게 “청년답지 않게 왜 이렇게 지루하지?”라고 할 게 아니라 판을 다르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 사회적 상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융통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다른 판을 모색해 주어야 한다. 판이 다르면 그 영리함이 사회적으로 다르게 빛나지 않겠는가?
좋은 기획, 좋은 기획자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원래 내 스타일이 ‘안 되면 되게 하라’가 아니라 ‘되면 한다’다.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고가산책단의 청년들이 자기들끼리 정한 슬로건 중에 하나가 그거라는 거다. 자발적으로 모이면 똑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어떤 목표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뭔가를 시작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처음엔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반응이 없을 수 있다. 반응이 없으면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면 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 쓸데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놀아야 한다. 엄청 기대하고 했는데 안 되면 얼마나 서운하겠나. 그러면 못 견딘다. 그 자체가 놀이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보면 실제로 놀이가 아닌 것이 없고, 하다 보면 잘 된다. 재밌으면 계속하게 되고, 계속하면서 놀다 보면 사람들이 반응하고, 그다음엔 어떤 목표를 정해도 갈수 있다. 좋은 기획은 각자가 갖고 있는 취향, 상상력, 경험을 토대로 파고들어서 나오는 것이다. 좋은 기획, 나쁜 기획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발현되도록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청년기획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고친다고 해도 기성세대가 깔아놓은 판 자체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성과주의도 있을 것이고, 요구하는 것이 있고, 모든 게 타율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체계화되어있고 강력한 목표중심적 세계에서는 잘하려고 해도 쉽지가 않다. 판을 자기 스스로 새로 깔아야 한다. 예술은 원래 그런 거다. 자기 판 못 깔면 끝이다. 작가로서 존재 불가능이다. 청년도 똑같다. 예술가가 물질화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가와 청년이 다르지 않다. 스스로 판을 보려고 하고 계속 비평적으로 읽으려고 해야 청년의 자리가 있다.
이야기를 마치자 하늘이 조금씩 어둑해진다. 동대문신발상가 옥상 이 편에는 상가와 쇼핑센터의 화려한 불빛이 뒤늦은 생기를 내뿜으며 반짝이고, 저 편 고즈넉한 창신동 언덕배기에도 집집마다 하나 둘씩 불이 들어온다. 경계에 서서, 경계를 넘나들며, 관점과 질문을 놓치지 않는 ‘작가’ 박찬국이 머물만한 곳이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낙원’에 취해 박찬국 작가와 함께 이곳을 가꾸는 청년기획자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깝게 지내고 서로에게 배우지만 서로 닮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그들의 말을 들으니, 청년들 스스로 새 판을 짜야 한다던 박찬국 작가의 말이 새삼스럽다. 그동안 기성세대가 닦아놓은 문화예술교육의 길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는 『데미안』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알을 깨고 나온 청년들이 보여줄 변화, 새로운 문화예술교육이 기다려진다.
박찬국
공공미술, 문화예술교육 1세대 작가이자 기획자이다. 1990년대 중반에 ‘M조형연구소’를 만들어 커뮤니티형 도시벽화, 어반아트(urban-art)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2002년부터 밀머리 미술학교를 운영하며 공간, 문화, 예술교육이 결합된 프로젝트를 해왔고, 2011년에는 경기도 국립광릉수목원 둘레를 숲 닮은 마을로 일구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논아트 밭아트(nonArt butArt)’ 예술감독을 맡았다. 공공미술, 커뮤니티아트, 문화예술교육과 관련한 강의와 자문, 디렉팅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시청년일자리허브 청년학교 교장으로 청년과 만나고 있다. 2014년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근처 동대문신발도매상가에 DRP(동대문옥상낙원)를 열고 옥상농부를 자처하며 ‘반려봉(伴侶蜂)’을 키워 얻은 벌꿀로 ‘증여경제’를 실험하고 있다.
사진 _ 장영주 (마루스튜디오)
기사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찬국샘 사진 잘 나왔어요~ ^^ DRP가 멋진 카페처럼 사진이 나왔네요~ 남은정샘과 두분이 나란히 나온 사진 예술입니다요~
DRP는 정말 멋진 장소였어요. 마치 유럽에 온 듯한 기분이었답니다 🙂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말들이네요~!! 🙂
박찬국 선생님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취재를 하는 동안 아르떼365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값진 시간을 보냈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한 글자, 한 글자 놓치고 싶지 않아 적어두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