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소식]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문화예술교육이 절실한 고려인들의 현실

고단한 역사 속,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세대가 바뀌면서 고국과의 연이 점점 희미해 지고 있는 고려인들을 만났다.

고행의 연속, 시베리아의 고려인들

그중에서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1937년 구소련에 의해 강제 이주 당한 역사적 배경이나 그 숫자, 그들의 문화적 욕구와 의지, 그리고 향후 우리나라와의 교류 확대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당연히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마침 내년에 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는 시사적인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이곳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이른바 원동, 극동이라 불리는 연해주 시베리아 지역에서 강제로 이주되어온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몇몇 학자들과 언론, 방송에 의해 당시의 일이 소개되곤 했지만 그래도 우리국민 대다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 동안 구소련으로부터의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우리의 교육 과정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10월말, 수만 명의 고려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가족과 떨어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온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짐승같이 열차에 실리는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된다. 열차 안에서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명을 달리했고 병에 걸려 신음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죽은 사람들은 기차 밖으로 던져졌다. 가히 유태인의 디아스포라에 비할 역사의 대 비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달려 그들이 내린 곳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한참 떨어진 우슈토베라고 하는 작은 농촌.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허허벌판 한복판이었다. 이미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하는 때인지라 고려인들은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어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세 겹 네 겹 몸을 포개 잠을 잤다.
이렇게 중앙아시아 대평원의 혹독한 첫 겨울을 견뎌낸 고려인들은 이듬해 봄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다행히 인근의 토착민 카자흐족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고려인들이 정착을 할 때까지 여러 가지로 도왔다. 그곳에서 고려인들은 벌판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들고 특유의 근면성과 영리함으로 농경에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이후 고려인들은 인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으로 흩어져 가는 곳마다 뛰어난 영농 기술로 지역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구 소련시절 콜호즈라 불리는 집단농장 체제에서 고려인들은 늘 남다른 성과를 내곤해서 지역사회의 모범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중 김병화 농장은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고려인 1세들은 농사로 경제적인 기반을 닦아나가며 특유의 교육열로 자식 교육에 힘쓴다. 그래서 2세대 이후의 고려인들은 농사 이외에 사업이나 교사, 공무원, 변호사, 의사 등 사회 지도층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수백 개의 민족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고려인은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똑똑하고 능력 있으며 강한 민족으로 인식되어 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닥친 어려움

이들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치는 것은 오히려 구소련 체제가 해체되고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1991년 12월 31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 소멸되면서 구성공화국 중 11개국이 결성한 정치공동체)로독립된 이후다. 중앙아시아 3국은 카자흐족, 우즈벡족, 키르기즈족 등 토착세력이 권력을 잡으며 자민족 우대주의 정책을 펴나간다.(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의 스탄은 영어의 land라는 뜻이어서 이 나라 이름들은 우즈벡족의 땅, 카자흐족의 땅, 키르기즈족의 땅이란 뜻이다) 이전에는 러시아어가 유일한 공용어였지만 갑자기 현지어를 공용어로 쓰게 하는 바람에 고려인들은 새삼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다소 정책 수정, 현지어로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절충해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게 되었지만 언제 또 이런 유의 난관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농촌지역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것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농장들의 공동화 현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틈을 타서 현지인들은 고려인 1세들의 피땀 어린 농장들을 인수하고 자민족들을 유입시킨다. 그런 이유로 농장의 고려인들은 노동력을 상실한 소수의 노인들만 남게 되었고 별다른 일거리가 없어 삼삼오오 모여 장기나 담소를 나누며 소일하는 형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려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인근 우크라이나나 모스크바 지역으로 이주하거나 일부는 연해주 지역으로 역이주를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연해주 지역에서는 이들이 정착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몇 대에 걸쳐 살아온 생활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이제 3, 4세대로 넘어가며 우리가 생각하는 이른바 ‘한민족’의 정체성이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으며,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언어의 문제로 1세대를 제외하고는 자생적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후천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지만 이들 역시 언어교육에만 국한되어 있고 여타 전반적인 문화에 대한 향유나 교육의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최근에는 지역마다 교육부 소속의 ‘한국교육원’이 한국어교육과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본국의 재외동포재단이나 각종 NGO, 민간기구등이 문화 행사를 가지고 방문하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지원프로그램의 지속적인 정착이 관건

그러나 이런 프로그램들의 한계는 그것이 체계적, 지속적이지 못하며 단기적이고 부정기적인 행사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서의 문화예술분야 관련 인사들은 규모와 인원에 상관없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의 프로그램 운영에 대한 강력한 바람을 갖고 있다. 특히 생활문화부터 전문적인 예술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관심사를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욕구는 실로 아주 강하며, 이러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1, 2세대의 부재 이후, 자생적으로 계승할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위기의식까지 느끼고 있다.
40만에 가까운 이들 고려인들은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고려인협회, 고려인 문화협회 등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중앙단위와 지역을 잇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고려인들의 친목 도모와 권익 보호 그리고 고려인 사회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문화관련 활동들도 이들 조직을 활용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고려인 협회 회장이나 지도자들은 그 사회에서 경제,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인사들이며 이들은 실질적인 재정후원 외에도 현지 정부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국가 혹은 민간 교류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지역만 하더라도 한국교육원은 기존의 자체 한국어 교육프로그램 이 외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글학교들을 관리하며 여러 한인과 고려인 단체들의 둥지 역할을 하는 등,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지하 연습실에는 고려인 젊은이들로 구성된 무용단을 상주시켜 공연과 교육을 한다. 동방대학과 사범대학, 국립언어대학 등 많은 대학에서 한국어과와 한국학과를 개설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는 이주 이전부터 운영하던 고려인 극단과 무용단이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자체 고려인 극장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모든 작품을 반드시 한국어로 공연한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시절부터 중앙아시아 지역 곳곳을 순회하며 고려인들의 애환과 향수를 달래주며 젊은 세대들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고려인 문화를 향유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이들은 70세의 노 단원에서 십대의 소녀 단원까지 대를 이어 그 활동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사이에 끼어있는 키르기즈스탄은 늘 소외되는 나라이다. 2만이 넘는 고려인이 밀집해 살고 있음에도 그런 나라가 있는지조차 생소해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이곳 고려인들은 더욱 똘똘 뭉쳐 밀도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에서 성공을 거둔 고려인 협회장을 중심으로 7개 지역단위 고려인 노인클럽이 요일마다 매주 음식을 나누며 가무를 즐기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수도 비쉬켁에 자체적으로 번듯한 고려인문화센터 건물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이 공간을 채울 프로그램과 각종 기자재, 도서, 인력 등을 조달할 방법이 여의치 않아 사방팔방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공간이나 단체, 학교들은 공통적으로 교수자원이 부족하고 동아리 활동이나 한국문화 전반에 대해 가르칠 커리큘럼과 교육도구, 체험 프로그램들이 전무하다시피 해 어떠한 형태의 지원이라도 반기는 상황이다. 농촌이나 지방도시 같은 경우는 더욱 열악하다. 그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 행사나 교육의 혜택이 타쉬켄트나 알마타 같은 수도위주에 머무르는 형편이다.

기본적인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

고려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것들이다. 교육인력, 도서, 무용, 사물놀이 등의 교육이나 장례, 결혼, 돌잔치 등에 필요한 생활풍습의 전례교육, 세시풍속 등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노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여가 프로그램이나 장차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생활 풍속 위주의 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차별화되어 제공되는 것도 중요하다. 4세대인 유아들을 위한 영유아 프로그램은 부모들이 가장 절실히 바라고 있으며 한국과의 보다 많은 교류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적(substansibility)이고 실질적인(practical)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국내에서는 이미 진부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기본적인 교육조차도 이들에게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정부 차원에서도 교류와 한글교육 중심의 외교부와 교육부 역할에 덧붙여 문화가 접목되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