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고3 학생들에게는 낯선 여유를 만끽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함이 밀려들기도 했을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알뜰하고 옹골차게 보낼 방법은 없을까? 무얼 해야 좋을지 모를 이 어색한 시간을 위해 〈관계의 기술〉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관계의 기술〉은, 전국 5개 도시의 고3 학생들을 만났다. 이중 지난 12월 16일, 대구를 찾았다. 우리가 만난 친구들은 생기발랄했고, 밝게 웃었다.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
효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6반 교실에서는 시종일관 꺄르륵, 여고생 특유의 웃음소리가 차 올랐다. 대구에서 진행된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현장이다. 학생들은 5~6명씩 모둠을 지어 앉아 서로의 닉네임을 부르며 친구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이날 3학년 6반 학생들은 출석부에 적혀있는 이름은 잠시 내려두고, 자신만의 닉네임을 사용했다. 엘사, 달팽이, 빵쟁이, 하리보, 딸기공주 등 나를 표현하는, 그리고 친구들이 붙여준 독특하고 귀여운 별명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세 시간 동안 그 이름으로 불리웠다.
학생들이 종이에 그리는 것은 곁에 앉아있는 친구의 얼굴이었다. 닉네임이 적힌 종이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일부분씩 그려나갔다. 첫 친구가 눈썹을 그렸다면, 다음 친구가 코를 그리거나 헤어스타일을 그리는 등 순서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렸다. 각자에게 인상적인 친구의 모습을 모두 함께 그려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터지는 웃음 속에서 친구들만 알 수 있는 사랑스러운 요소가 듬뿍 담긴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이어 친구에게 장점 쪽지를 붙여주는 작업이 시작됐다. 자신이 생각하는 친구의 장점을 적어 붙이면, 옆 친구가 또 다른 장점을 적어 붙이고, 옆 친구가 잇고, 잇고 이어지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시간 동안 학생들은 끊임없이 친구들의 장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장점 쪽지 중 그 친구를 가장 잘 나타내는 키워드를 골라 그림을 표현해보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공감을 잘 해준다’라는 키워드를 가진 여왕마마는 큰 귀를 가진 사람으로, ‘흥이 많다’ ‘청소시간에 춤을 춘다’는 초코뚱뚱이는 음표를 손에 쥐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지금껏 ‘친구’에 대해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을까.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왕마마(김도연 학생)가 “친구들과 헤어짐을 앞두고 이렇게 서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서 기쁘다.”고 전한 소감처럼 한 글자씩 친구의 장점을 적는 학생들의 작은 손에 힘이 담겨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초선영 작가는 내면 초상화는 자신을 알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작업이라고 전했다.
“오늘 만난 친구들이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인 만큼 이번 작업을 통해 ‘내 장점이 뭘까’, ‘내가 불리고 싶은 이름은 뭘까’,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등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을 만나는 시간이에요. 오늘 프로그램이 친구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고등학교의 졸업이란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졸업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제 사회로 나아가 각자 정해진 길로 흩어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하는, 아쉽고도 외로운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을 앞두고 내 곁의 소중한 친구들을 손 끝으로 그리고, 좋은 모습을 가슴에 남겨두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나만의 옷, 나만의 런웨이
〈옷은 나에게〉
‘옷은 나에게’ 프로그램은 이 프로그램에 관심 있는 각 학교의 고3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평소 ‘옷’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옷’이 갖는 의미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총 9명의 학생과 마주앉은 안데스 작가는 복장에서 이미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조금은 신기하고 낯선 작가의 프로젝트를 영상으로 만나 본 후, 본격적으로 친구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OX 퀴즈를 통해 옷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옷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지, 옷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있는지, 집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 중 진짜 내 모습은 어떤 것인지. 그간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물음에 친구들은 골똘히 고민했다. 보통은 주변의 시선에 의식해 옷을 고르는 편이었고, 갖고 싶은 것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들도 있었다.
수학여행에서 열여섯 명의 남학생 중 여덟 명의 친구가 같은 색 남방을 입고 온다거나 겨울이면 모두 같은 브랜드의 패딩 점퍼를 입는다는 친구들의 말이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이야기이다. 프로그램을 이끈 안데스 작가의 의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준에 따라 옷을 고르는 평소의 습관이나 고정관념에서 친구들이 한 발 물러서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에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처럼, 혹은 지구상에 처음 들른 외계인처럼 ‘옷’이라는 것의 개념을 모르는 채로 옷을 고르게 하는 거예요. 학생들이 옷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립하고 있는지 되짚어보고, 오늘 하루만큼은 ‘옷’에 대해 다른 체험을 했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친구들은 안데스 작가가 준비한 오색찬란한 옷 더미 속에서 입고 싶은 대로, 혹은 친구가 입혀주는 대로 걸쳐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란히 앉아있을 때 수줍고 조그맣던 친구들은 몇 번이고 옷을 입고 벗는 동안 점차 대범해져 갔고, 주변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만의 특징을 강조하고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평소라면 손도 대보지 않았을 아얌(겨울 한복차림에 쓰는 쓰개)을 써보기도 하고, 남자 사각 팬티를 장신구 삼아 멋을 내보기도 했다. 교복을 벗고는 도로 제복을 입기도 했고,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알라딘 바지를 입고 겅중겅중 뛰어보기도 했다.
각자 멋지게 차려 입은 친구들에게 런웨이의 시간이 주어졌다.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대화하던 친구들은 런웨이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는 스탭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당당하게 걸었고, 큰 목소리로 자신의 컨셉을 설명했다. 처음 안데스 작가의 영상을 보며 난해하다고 고개를 저었던 친구들은 어느새 영상 속 사람들처럼 평소의 ‘나’를 벗고, 또 다른 ‘나’를 만난 것처럼 신나게 웃었다. ‘나를 놓고 즐길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입으니 자신감이 떨어진다’, ‘마음에 드는 옷을 마음껏 입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등 각자의 소감을 전할 때, 친구들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된 채였다.
아직 다른 이들의 시선에 예민하고, 사람들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시기. 이 친구들에게 <옷은 나에게> 프로그램이 홀가분한 기분과 약간의 용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 프로그램에서 한 학생의 그림이 기억에 남는다. 귀여운 ‘울라프’로 친구를 표현했는데, 몸이 많이 상해있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여있었다. 그림을 그린 학생은 ‘내 친구는 수능이라는 벽 앞에서 많이 무너졌지만, 그 위에 새 눈이 쌓여 다시 힘낼 수 있다는 걸 표현했어요.’라는 뭉클한 설명을 덧붙였다.
친구의 한마디는 거친 세상을 버틸 힘이 되기도 한다. 특히 살얼음 같고 위태롭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친구들은 서로에게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 스스로에게 충실하되 내 곁의 사람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때론 어깨를 빌리기도 하는 것. 아직 열 아홉 살, 친구들이 사회로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유연하고 가벼워진다면 좋겠다.
- 윤정희 _ 사진
- 정민영 _ 영상
- 최민영 _ 글
고3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관계의 기술> 프로그램 소개 http://www.arte365.kr/?p=36076
<관계의 기술> 현장 사진 더보기 https://www.flickr.com/photos/arte365photo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