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좌표를 뚜렷하게 해준 출판쟁이 다큐 기록

내 인생의 좌표를 뚜렷하게 해준 출판쟁이 다큐 기록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책의 탄생>은 양서들을 만들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답답하고, 아쉽고, 때론 서글프거나 너무 큰 보람에 기절할 만큼 즐겁기도 했던 ‘출판쟁이’ 20년의 생생한 다큐 기록이다.

 

“제가 올해로 책 만들기 33년이 되었습니다. ‘한 권의 책’의 위대함과 ‘책 만드는 일’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33년이었습니다.왜 책을 만드느냐를 저 자신에게 다시 묻습니다. 시대정신을 저의 가슴에 담아야 한다는 다짐도 합니다. 책 만드는 일은 저의 운명입니다.” 지난 12월 19일 파주 헤이리 북하우스에서 한길사가 주관했던 ‘2009 책의 공화국’ 행사 초대장에 꾹꾹 눌러 쓴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인사말이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으로, 1976년 ‘한길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차린 그의 출판 이력이 벌써 33년째라니…. 나 또한 출판계 언저리에서 17년째를 맞다보니 이 숫자의 의미가 나름 각별하다.

 

그가 펴낸 <책의 탄생> 1, 2권을 감명 깊게 읽을 무렵, 나는 3년차 사장이었다. 잡지기자를 그만두고 출판계 언저리에서 ‘책이랑 놀아보자’는 기분으로 신간 릴리스 회사를 만들어 독립할 때까지만 해도, 책은 그저 다 같은 책이고, 출판인은 그저 다 같은 출판인이라고 여겼던 단순 무지였다. 그러나 회사 기반을 대충 만들어 놓고 여유를 부릴 무렵 나는 <책의 탄생>을 발견하게 됐고, 그것을 읽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앞으로 걷게 될 내 인생의 좌표가 보다 뚜렷해졌다고나 할까?

 

‘한 시대, 한 사회에서 한 권의 책 또는 그것을 기획해 펴내는 출판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책과 출판인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 시대, 한 사회에서 책의 문화 혹은 출판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책의 반가움’과 ‘인문학의 즐거움’

 

책의 초판을 출간하던 1997년 당시 김언호 대표는 만 20년째 한길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말 그대로 ‘출판 한 길’ 20년 동안 그는 <오늘의 사상 신서>(1977),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6권(1979-1988), <함석헌 전집> 20권(1980년대), <한국사> 전27권 완간(1986-1994) 등 격동기 지식인들에게 ‘책의 반가움’과 ‘인문학의 즐거움’을 쉬지 않고 공급해 왔다. <책의 탄생>은 바로 그러한 양서들을 만들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답답하고, 아쉽고, 때론 서글프거나 너무 큰 보람에 기절할 만큼 즐겁기도 했던,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탄압 받기도 했던 ‘출판쟁이’ 20년의 생생한 다큐 기록이다.

 

“1985년 3월 11일. (전략)오후 2시에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회에 참석하다. 회의 분위기가 늘 그러하다. 도서전시회를 갖고 MBC, KBS의 눈치를 보는 발상이 안쓰럽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이론을 갖고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중략) 동아일보사에서 나온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난 세월 우리 스스로가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어느덧 흘러가 버린 10년. 그러나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임을 저간에 우리가 겪은 온갖 일들이 말해 준다. 여럿이 유명을 달리하고, 참담한 고생을 해오고 있다. 그 속에서 ‘체제’라는 걸 온 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격동기 한 출판인의 출판일기 : 1985∼1987’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의 탄생> 1권은 이렇듯 김언호 대표의 꼼꼼한 일기 형태의 기록을 밑바탕으로, ‘출판문화의 발전을 위한 우리의 견해’며 ‘지식인들의 시국 선언’, ‘권력은 짧고 책은 영원하다’ ‘자유로운 출판으로 사회는 발전한다’, ‘대외비가 붙은 판금 도서목록’, ‘꽃을 사랑하셨던 함석헌 선생님’ 등의 굵은 메시지와 시대상, 책 출간 뒷얘기들을 담담하게 정리해 놓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탄생> 2권을 통해 김 대표는 <한국사신론>(이기택)이며 <우상과 이성>(리영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강만길), <농무>(신경림) 등 한 시대를 이끈 책의 기원들에 대해 맛깔스레 살피면서, ‘저자와의 만남’(2부), ‘한 권의 책을 위하여’(3부), ‘오늘의 사상신서 101권 이야기’(4부) 등 저자의 생생한 경험과 지적 깊이로 낚아 올린 한 시대 출판인의 정신과 출판 철학을 넉넉하게 버무려 놓고 있다.

 

출판계의 오늘을 고뇌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출판 장인

 

2003년 나는 출판전문 온북TV를 만들었다. 1994년 이래 한 해가 저물 때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들어왔던, ‘출판계는 올해도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이었다’는 얘기가 거듭되고 있을 때였다. 장기전으로 가도 수익이 날 듯 말 듯한, 출판 관련 영상기록사를 만든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출판인들의 정인 정신을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후세에 전해야겠다는 결심 오직 그 하나 때문이었다.

 

마침 2005년에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남북작가대회가 평양에서 개최됐다. 같은 해 독일에서는 60년 한국 출판계의 최대 경사였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가 치러졌다. 온북TV는 그 두 행사를 성공적으로 기록했다. 우리 문인들과 출판인들의 표정과 숨결까지. 고뇌와 환희까지.

 

<책의 탄생> 두 권과 그 책을 쓴 저자가 내게 전한 감명은 한길사 33주년을 맞아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가 언급한 대목과 똑같다. 바로 그 감명을 자양분으로 나 역시 오늘을 고뇌하고, 내일을 설계하면서 ‘한 길 2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전략)그는 저 야만적이고 궁핍한 시절, 갓 서른을 넘긴 때에 한길사를 창립한 이래, 지금도 여전히 청년의 기운을 잃지 않는 출판 장인이다. 그는 하나의 기획을 끝냈다 해서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고, 그 다음 주제를 잡기 위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줄 아는 출판 지식인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이들은 그로부터 책의 정신을 온몸으로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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