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울림을 안겨준 영화

폭풍 같은 울림을 안겨준 영화

 

좋은 영화는 마음을 움직인다. 폭과 넓이, 깊이가 제각각 다를지라도 가슴 한켠에서 웅얼거리며 말거는 무언가를 가진 영화가 좋은 영화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한 몸이 되어 메말랐던 나의 눈물샘을 폭발시켰다고 말하면 과장된 것일까?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또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한동안 잊고 살았던 질문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몰가치의 시대, 인류역사상 최고조에 이른 황금만능주의 시대이기에 저토록 평범한 질문이 아주 무겁게 다가온다.

 

좋은 영화는 마음을 움직인다. 폭과 넓이, 깊이가 제각각 다를지라도 가슴 한켠에서 웅얼거리며 말거는 무언가를 가진 영화가 좋은 영화다. 세상을 압도하는 기술 상상력으로 기적 같 은 세계를 펼쳐 보이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는 영화의 미래를 ‘선언’하고, 거장의 아름다운 퇴장을 은유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는 비정한 이방인의 삶에 주름살 가득한 지혜와 성찰로 한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안의 <아이스스톰>은 중산층의 섬뜩한 소외를 얼음장처럼 차갑게 혼잣말처럼 되뇌게 하고, 도리스 도리의 <파니핑크>는 사랑과 연민의 겨울햇살처럼 따뜻하게 속삭인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뭉클하게 떠오른 단 한 편의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었다. 일흔 살이 훌쩍 넘은 거장이 보여준 단순한 사실주의는 기교와 재미로 무장한 다른 영화와는 다른 차원의, 마치 ‘폭풍 같은 울림’을 안겨준다. 2006년 겨울 무렵이었을 게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영화를 보기 위해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당연히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영화가 반쯤 흘렀을까. 나는 그때부터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딱히 영화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거장이 숨겨놓은 슬픔의 지뢰가 터졌다고 할까? 젊은 시절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졌던 상황이 오버랩 됐는지도 모르겠다.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한 몸이 되어 메말랐던 나의 눈물샘을 폭발시켰다고 말하면 과장된 것일까?

 

1920년대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 독립투쟁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독립투쟁을 그린 영화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폭력통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 이에 저항하던 아일랜드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 독립투쟁을 그리고 있다.

 

 

푸른 초원에서 젊은이들이 헐링(헐리라고 불리는 아일랜드의 國技) 게임을 하고 있다. 젊은 의사 데미언(킬리언 머피)은 런던의 큰 병원에 일자리를 얻는다. 하지만 평화로운 초원, 한적한 시골마을에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영국법에 의거해 공공집회는 금지됐고, 여기에 헐링 경기도 포함된다”며 영국군이 젊은이들을 몰아세운다. 그들은 젊은이들을 집 담벼락에 붙여놓은 뒤 이름을 크게 말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17살의 미하일 오셜리반이 영국어로 말하라는 군인의 지시에 계속 켈트어로 응답한다.

 

미하일이 닭장으로 끌려가 묶인 채 맞아죽는다. 17살 소년의 죽음, 단지 켈트어로 대답했다는 이유로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것이 당시 아일랜드의 일상이었던 셈이다. 소년의 죽음을 위로하는 구성진 노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흘러나온다.

 

그녀를 향한 오래된 사랑 나의 새로운 사랑은 아일랜드를 생각하네. 산골짜기의 미풍이 금빛 보리를 흔들 때 분노에 찬 말들로 우리를 묶은 인연을 끊기는 힘들었지. 그러나 우리를 묶은 침략의 족쇄는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네. 그래서 난 말했지. 이른 새벽 내가 찾은 산골짜기 그곳으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황금빛 보리를 흔들어 놓았네.

 

-로버트 조이스의 시 전문

 

켄 로치 감독, 자신의 철학을 일관되게 영화에 투영

 

주인공 데미언은 의대를 나와 영국 런던으로 취직을 하러 가느냐, 남아서 독립운동을 하느냐 사이에서 갈등한다. 친구들과 형 테디의 집요한 설득이 이어진다. 어른들은 의사가 된 그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시인 예이츠의 말처럼 “모든 아일랜드 젊은이들에게는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에게도 학생운동을 끝내고 취업을 할 것인지, 사회운동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 밤을 새며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사회적 가치와 개인의 성취 사이에서 고민하는 건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고민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건강한 것 아닐까? 요즘처럼 너나 할 것 없이 개인과 가족의 부를 위해 모든 가치를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남았고 싸웠다. 하지만 켄 로치 감독은 쉽사리 누구의 편을 들지 않는다. 카메라는 정직하고 단순하다. 생계 때문에 밀고한 17살 농부 크리스를 동료들이 처형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슬프다. 권총을 쥔 데미언은 당당하지 않고 초조하다. 같이 자라온 동생 같은 농부를 밀고자라는 이유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슬프다. 그가 묻는다. “편지는 썼니?”

 

나는 여기서부터 울기 시작했다. “편지는 썼니?” 그 말을 하는 데미언의 표정과 톤, 주변 상황이 눈물샘을 터뜨린 것이다. 데미언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는 확실히 “감정이 숨을 곳이 마땅치 않은 얼굴을 가졌다.” 섬세하다. 소년이 대답한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글도 못 읽는걸요. 형, 나 그 언덕에 묻어줘.”

 

내가 켄 로치 감독을 좋아하는 건 그가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철학을 영화에 투영한다. 묵묵하게,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찍었고, 사실을 왜곡해 누구를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있지만, 약자들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 형 테디와 동생 데미언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과정은 적이 밖에도 있지만 그들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그 어떤 말보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무엇을 반대하기는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레이닝 스톤> <랜드 앤드 프리덤> <칼라 송> <빵과 장미> <내 이름은 조> 등 그의 굵직한 필모그래피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때 심사위원장이던 왕가위 감독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의 영화는 그렇듯 가슴에게 말을 건넨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게 때론 읊조리듯 편안하게, 때론 침묵처럼 무겁게 말을 건넨다.

 

데미언이 형에 의해 처형당한 뒤 애인 시네드를 비추는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은 영화사상 가장 슬픈 장면에 꼽힐 만하다. 관객이 모두 떠나고, 불이 환하게 비췄을 때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가끔,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 록그룹 U2의 ‘Sunday Blood Sunday’를 들을 때에도 이 장면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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