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담아 부르는 노래, 꿍따리 샤바라

2000년, ‘꿍따리 샤바리’ 등으로 최고 댄수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클론의 강원래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이제 더 이상 걸을 수도, 춤을 출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 같은 절망에서 그를 일으킨 것은 한 소녀의 ‘자격지심’이라는 일침이었다. 2007년부터 장애인으로 구성된 ‘꿍따리 유랑단’을 조직해, 무대에 올린 강원래 단장은 소년원, 보호관찰소, 장애인 교육시설, 교도소 등을 돌며 장애인에 대한 편견 대신 꿈과 희망을 담은 꿍따리 샤바라를 누구보다 목청껏 부르고 있다.

2004년 어느 날, 강원래에게 천안 보호 관찰소에 근무하는 한 계장의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폭주족, 무면허, 음주운전 등의 범죄로 관찰소에 보호된 아이들에게 강원래 씨처럼 사고가 날 수 있다는 내용의 강연과 휠체어 타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2000년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몸과 마음의 상처에 성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고, 여전히 자신의 상황이 억울해 절망에 몸부림치던 때였다. “교통사고 이후 세상에도, 제 몸에도, 제 정신 상태에도 적응이 안됐어요. 그런 저에 대한 시선 역시 힘들었죠. 대한민국의 다양하고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위안 받고, 감정을 교류하고 있을 때였어요.” 소위 ‘제 코가 석자’였던 강 단장이 거절하려던 강연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새로운 경험과 사람을 만나는 재미였다.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보다“소년원생들, 보호 관찰생들은 어린 시절의 저를 보는 것 같았어요. 말 그대로 양아치였죠. 그들이 제 말을 귀담아 들어주니 좋더군요. 그러다 어느 순간 보니 제가 선생님이 된 기분이 들더라고요. 저런 거 하지 말아라, 이렇게 살면 좋겠다, 참 말도 안 되게 잘난 척을 하고 있더군요. 학창시절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양아치였던 강원래가요.”이에 강 단장은 노래와 춤으로 재미있게 보여주면 더 효과가 있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해 ‘꿍따리 유랑단’ 공연을 출범하기에 이른다. “한참 말썽꾸러기이던 시절, 저는 들국화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강한 노래, 긴 머리, 무대 위에서 피우는 담배, 나팔바지, 보랏빛 조명…. 그리고 얼마 후 마이클 잭슨의 춤 동작에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죠. 그런 충격을 소년원과 보호관찰소에 있는 친구들이 받기를 바랐어요. 국·영·수 중심으로 공부 열심히 해야지, 세상 살 맛나네 식의 깨달음을 끌어내기는 어렵겠지만 이 같은 충격을 받는 것만으로도 꿈을 꿀 수 있죠.” 퉁퉁거리고 꼬인 말투로 분노와 패배감밖에 표출할 줄 모르던 청소년들의 표현 방법이 조금만 달라져도, 무언가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사람들 안에서 얼마나 활력을 얻을 수 있는지만 알아도 강 단장에게는 큰 성과였다. 공연이 끝나고 멈칫거리는 아이들에서, 눈물을 닦는 모습에서도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강원래 자신도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어 본 적이 있었고, 누군가 건드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못 걷는다는 얘기를 들을 때 힘들었다. 춤도 못 추고, 똥·오줌도 못 가린다는 말 들었을 때도 힘들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장애인을 만나서 느낀 건 나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두 손도 쓸 수 있고 내 감정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 더 잘해내야한다는 욕심 때문에 세상을 포기하려던 나를 반성한다.” ‘꿍따리 유랑단’ 대사 중 독백과도 같은 자성은 강 단장 스스로가 느끼고 배운 점이기도 하다. 이에 강 단장은 휴대전화에 ‘긍정’ ‘겸손’ ‘웃음’ ‘경청’이라는 네 단어를 입력해두고 다니며 되뇌고 또 되뇐다.세상은 넓고, 사람도 장애도 다양하다

강 단장은 다양한 장애를 통해, 장애인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한 구성원일 뿐이며, 그들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장애인들 역시 스스로 용서받고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편견을 깨고 보다 열정적으로 노력하기를 바랐다. 꿍따리 유랑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 약속에 대한 개념도, 책임감도 결여됐던 단원들과 좌충우돌한 것이 벌써 2년째다. 클론 데뷔 전 안무가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수천만 장의 음반판매량을 자랑하는 톱 가수들도 그의 혹독함에 눈물지었던 일화는 비일비재하다. “100명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는데, 한 사람이 실수를 하면 100명의 노력과 땀이 수포로 돌아가는 거예요. 절대 용서란 있을 수 없죠.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지각이나 나태함에 야단을 치면 안하겠다고 나가버리기도 하고 울기도 하곤 했죠.” 이 같은 갈등에도 2년 동안 단원이 거의 바뀌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 성취감을 깨닫고 삶의 기쁨과 보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고나 어떤 계기로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은 사람이 힘든 이유는, 스스로가 장애에 대한 편견이 심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전 힘들었어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넘치고 다이내믹한 가수로 살던 강원래가 큰 좌절을 겪고 힘든 시기를 보낸 이유다. 이처럼 자성하는 강원래 단장을 일깨운 건 한 소녀의 ‘자격지심’ 발언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소녀들에 “왜 웃냐”고 화를 내는 강원래에게 한 소녀가 일침을 가했다. “저희끼리 얘기하다 웃은 건데요. 우리 아버지도 장애인인데 늘 웃으면서 사세요. 아저씨는 자격지심이 심하시네요. 그렇게 살지 마세요.”그 이후로 자신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달은 강원래 단장은 “날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만, 날지 못해서 불편한 사람은 없다. 나도 걷지 못해서 불편하진 않다. 걷는 사람들의 “못 걸어서 어째”라는 시선과 편견이 불편할 뿐“이라고 설파하며 다른 이들의 편견을 깨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다. “슈퍼맨으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브가 죽었을 때를 기억해요. 돈도 많고 그렇게 유명한데도 결국은 죽잖아요. 모든 이들이 저 때문에 희망을 갖는다고 하니 연예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변해야하는지도 알고 있고, 책임감도 느껴요. 하지만 희망도 책임감도 변화도 제가 살아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살 거예요. 열심히 살아가는 건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죠.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최선이니까요. 그리고 재미있으니까요.” 강 단장은 ‘꿍따리 유랑단’이라는 하나의 소스로, 공연은 물론, 청소년 소설, 다큐멘터리 영화, 뮤지컬, 해외 공연 등으로 재창조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장애’를 직업으로 길거리에서 행인들의 도움을 청하는 장애인, 어린시절부터 무시당하며 성폭력자로 변해가는 장애인, 사기꾼 장애인 등 5명의 장애인 에피소드로 만든 공연도 구상중이다. 이처럼 원 소스, 멀티 애플리케이션을 실천하기 위해 연습을 위한 공간을 찾고, 전용 극장을 계획하고, 대한민국의 일류 조명감독, 무용수, 작곡가, 패션 전문가 등을 동원한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보며 편견을 깨고 희망을 가질 이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