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농사를 배우다 ① 쌈지농부 · 논밭예술학교 탐방 기사보기
문화예술, 농사를 배우다 ③ 텃밭교육 현장 사례 기사보기
하나. 텃밭에선 관계가 싹트고 갈등도 자란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재개발 예정 지역. 고층아파트와 아파트형 공장에 둘러싸여 섬처럼 존재하는 이곳 낡고 빛바랜 건물들 옥상엔 언젠가부터 녹색 작물들로 두런두런 하다. 비교적 값싼 임대료 때문에 모여든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1970~80년대 전성기를 겪었지만 이제는 첨단 기술에 자리를 내주고 도심 배후로 밀려날 처지가 된 철공소가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곳에 공식적으로 옥상텃밭이 만들어진 것은 올해 봄부터.
그렇지 않아도 가게 앞에 화분을 내놓아 금속성의 삭막함과 폐허같은 분위기를 달래보려는 철공소 아저씨들의 잔잔한 마음 씀씀이를 눈여겨보던 예술가들이었다. 어떤 작가는 덩달아 골목 귀퉁이에 달걀껍질로 작은 정원도 꾸렸고, 또 어떤 작가 그룹은 하나 둘씩 화분을 울려다 이미 옥상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을 공동의 텃밭을 가꿔보자는 모 단체의 제안아 있었고 몇몇의 예술가들이 의기투합, 시민단체와 기업의 후원까지 받아 옥상텃밭 가꾸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은 만만치 않았다. 들고 나는 세입자들이 버리고 간 물건과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옥상을 깨끗이 치우고 채소를 길러보자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제안에 집주인들은 몸을 사렸다. 건물 안전이 문제라며 얼버무렸지만 실은 텃밭을 만들어 괜히 재개발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짐작했던 바이기는 하나 타격이 컸다. 집주인들은 어떤 시도, 그것이 예술이든 아니든, 어떤 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나길 원치 않았다. 세입자로 사는 철공소 종사자들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애초에 관심을 거두어갔다. 하긴 그건 이곳에 입주한 다수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미 서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고 적당한 갈등을 겪으며 사는 터였다. 숨죽이고 있던 갈등들이 텃밭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갈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사업을 후원하고 텃밭 워크숍을 수행하는 시민단체와 내용을 이끌고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예술가들 사이에도 잡음이 일어났다. 시민단체에선 매번 시시콜콜 따져대는 예술가들이 답답했고, 예술가들은 섬세하지 못한 시민단체 관계자가 섭섭했다. 하지만 스토리가 그렇게 끝난 것은 아니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려는 순간 한 건물주가 자신의 옥상을 내줬다. 어린애들 장난 같다며 애써 무관심한 척하던 철공소 사장님들도 텃밭상자를 분양 받아 상추며 고추, 토마토 따위를 심기 시작했다. 철공단지라면 손사래를 치던 인근 아파트 주민들도 하나둘 함께했고, 격주 토요일마다 텃밭에서 벌어지는 농사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먼 곳에서 발길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최근엔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을 특별한 장터에 내놓아 팔기도 했다. 예술가들과 시민활동가들도 어느새 어울려 동네 사람들, 아파트 주민들과 내년엔 텃밭을 어떻게 꾸릴지 진지하게 대화한다. 물과 거름을 주고 작물을 돌보며 키워가는 동안에 주민들 사이엔 없던 관계가 싹텄다. 그리고 그 주변에 다시 새로운 갈등의 씨앗도 싹을 틔우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두울. 논에는 생명과 화해가 자란다
경기도 북부, 전형적인 신․구도심 경계지역의 한 마을. 과거에는 군부대를 중심으로 호황을 누렸으나 현재는 제조업과 영세 자영업을 기반으로 낙후되어가는 구도심, 그리고 그 옆으로 약 천 여세대가 넘는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지 1년 남짓. 자기 충족적 현대 주거시설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과 생활 방식도, 실질적인 생활권도 다른 구도심의 선주민들은 걸어서 10분 남짓 되는 가까운 거리에 살지만 구태여 만날 일이 없었다. 더구나 공장이 들어서면서 이주해온 외국인들도 애써 외면해온 터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웃하며 살고 뻔히 마주치면서도 서로에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여기에 논과 밭을 매개로 하는 공공미술이 지난해 말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다양한 생물체가 공생하는 논과 밭처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서 오는 낯섦과 경계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새로운 공존의 모델을 실험하고자 했다. 마침 시(市) 소유의 하천부지가 있어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마을 공동의 텃밭이자 정원이자 학교로 명소로 이곳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부터였다.
시 소유의 하천부지에는 벌써 십 수년째 마을 사람들 몇몇이 공공연하게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 농사를 짓던 입장에서는 아무리 공공의 목적이라고는 해도 갑자기 터를 뺏기는 일이라 상실감이 컸고, 작가라는 사람들이나 예술이라는 것이나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시가 나서서 달래고 설명회도 수차례 진행해 설득해보았지만 좀처럼 마음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이미 특혜를 본 사람들이 욕심을 낸다고 뒤에서 수런거리면서도 정작 공식적인 자리에선 목소리를 죽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이 사업에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던 아파트 주민들도 둘로 갈라졌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댔지만 태도가 바뀐 데에는 공공미술이 ‘집값 오르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수년간 마을 단위 사업으로 단련된 인내심 많은 작가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어쩌면 속수무책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어렵사리 오프닝 잔치가 치러지고 마을 사람들도 일부가 쭈뼛거리며 이를 즐겼다.
하천부지는 애초에 사용하려던 면적을 줄여서 논을 갈고 마을 공동의 노동으로 모도 심었다. 오리농법에 동원될 오리집과 작은 연못도 만들었다. 논에 아이들이 왔고, 피는 뽑아서 다시 지붕위에 심어주었다. 그랬더니 숨어서 피해 다니던 외국인들이 당신들의 맛난 요리법을 들고 함께 했다. 마을 대소사에는 큰일을 하고서도 의사결정에선 번번이 무시되던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진심으로 마음을 보태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하천부지 점유권을 주장하는 몇몇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계획된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세엣. 변두리 밭고랑에, 흙에 씨뿌리는 사람에게 길이 난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필자가 참여하는 특별한 도시농장이 있다. 베드 타운의 특성상 아파트가 주를 이루고는 있지만 그린벨트가 많아 이 지역엔 주말농장 분양률이 높다. 그런데 자기가 키우고 싶은 작물을 자기 밭에 심어 거두어 가는 ‘공간’일 뿐인 다른 주말농장에 비해 이 농장은 좀 별나다. 선후배가 있고 따로 또 같이 일하는 문화가 있고, 항상 밥을 같이 먹으면서 느는 ‘관계’가 있다. 가히 도시농사공동체라 할 만하다.
주말뿐 아니라 주중에도 짬을 내어 술자리를 양보하고 밭을 찾아 가꾸는 직장인들도 있다. 그런 몇몇이 시간이 맞으면 막걸리를 한잔 기울이면서, 더 건강한 작물을 키우는 법, 토종종자를 지켜내는 법, 농약을 치고 농사를 짓는 이웃 텃밭과의 갈등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최근에는 도시농부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가끔 공간을 개방, 공동체 이벤트로 작은 장터를 벌이고 농부학교를 열기도 했다. 자기 작업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애쓰고 새로운 사업의 아이디어를 키워나가면서 서로 역할분담과 함께 공동의 의사결정과정을 만들어간다. 새로운 공동체, 동아리 안에서 시민성을 키워간다. 그리고 주변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작물별 공동체밭을 일구는 소생공동체(소비-생산 공동체)에 가입하면, 공동으로 밭을 가꾸고 작물을 나누는데, 각자가 일한 시간, 제공한 노동력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다. 가져가는 수확물에 좀 손해를 보는 대신 나누는 기쁨을 두 배로 가져가는 특혜를 누린다는 생각이 몸에 배여 있다. 비아냥거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특별히 착한 사람들만 모인 것은 아니다. 목표수확량이 없는 농사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야 만다.
이런 농장이 고양시 덕양구 인근에 7개, 모두 합해 3천 평이 넘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농장들을 모두 땅주인들로부터 무료로 임대했다는 것이다. 수확물을 얼마 나누기는 하지만 이 시대에 꿈만 같은 일이다.
논에서 김을 매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시, 문학, 예술이 우리의 영감을 자극하고 세계를 향해 문을 열어주듯이 대지에 몸을 맞대고 바람을 느끼는 그 순간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 사람, 어떤 풍경, 공간 등이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생명의 시인으로도 유명한 김준태 시인은
(……)
도시의 변두리 밭고랑 그 끝에서
(……)
흙과 서로의 몸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바로 길이었다
고 그의 시 <길-밭에 가서 다시 일어서기1>에서 말했다.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에 빠진 이 문명사적 위기의 시대에 인간 혹은 인류는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하는 데 시인은 그 길이 밭(흙)의 원초적 상징성과 의미에서 찾아지기를 희망한다.
농사짓는 땅, 생명을 길러내는 터로 땅 보기를 다시 한다면 거기, 도시의 변두리 텃밭이 꾸려지는 그곳에 분명히 지금까지 존재하던 문명과 문화를 넘어서는 공간, 시인이 찾던 길일 있으리라. 그렇게 믿어보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짓일까?
글_박생강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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